◎ 알렐루야.
○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천상의 것을 추구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8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저녁노을(모니카)
새로 난다는 것.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웃자고 한번 해봤습니다요)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2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3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활동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내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적인 이해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조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사륵스)입니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하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킵니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 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상처받은 인간성은 허약함과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육의 이해력은 니고데모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갇힌 범주들 및 이해들의 세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신비들을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실재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그리스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와 마찬가지로 “바람” 혹은 “숨 기운”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성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성의 생명의 원천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운명에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변형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과 영으로서의 삶은 짐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방식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프네우마”의 뜻인 “숨 기운” “바람” “영”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창2,7).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거역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생명의 새로운 프네우마(영)의 그림자입니다. 성령(프네우마)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바람처럼 불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면서 원하시는 대로 오고 가시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남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은 교회 성사에 연관된 종말론적 성취의 두 가지 표상들을 가리킵니다. 물은 구약성서에서 축복 혹은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상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주리라”(요엘2,28). 영광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새로 난다는 것.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웃자고 한번 해봤습니다요)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2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3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활동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내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적인 이해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조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사륵스)입니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하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킵니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 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상처받은 인간성은 허약함과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육의 이해력은 니고데모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갇힌 범주들 및 이해들의 세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신비들을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실재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그리스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와 마찬가지로 “바람” 혹은 “숨 기운”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성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성의 생명의 원천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운명에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변형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과 영으로서의 삶은 짐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방식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프네우마”의 뜻인 “숨 기운” “바람” “영”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창2,7).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거역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생명의 새로운 프네우마(영)의 그림자입니다. 성령(프네우마)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바람처럼 불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면서 원하시는 대로 오고 가시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남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은 교회 성사에 연관된 종말론적 성취의 두 가지 표상들을 가리킵니다. 물은 구약성서에서 축복 혹은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상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주리라”(요엘2,28). 영광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니고데모 :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예 수 님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율법에 철저하며 존경받기 좋아하던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저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한다는 세례성사의 신비를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새로 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육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것”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
“예전의 나를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는 것”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고쳐나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물로 세례받은 자 답게요. 그렇다면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니고데모가 자신의 기득권이 달린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 처럼 저도 대단치 않은 저의 자존심을 버리고 보잘것 없고 관심조차 갖기 싫은 사람일지라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저에게 제 마음안을 꽉 채우고 있는 시기와 질투 미워하는 마음등 나쁜생각들을 깨끗이 비워내고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니고데모처럼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어 작은 것 즉 육의 세계에 연연
하지 않고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주님의 성령
소나무: +찬미 예수님
루실라 자매님.. 자매님 뜻과 하느님 뜻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사랑안에서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04/19-17:19]
니고데모 :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예 수 님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율법에 철저하며 존경받기 좋아하던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저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한다는 세례성사의 신비를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새로 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육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것”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
“예전의 나를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는 것”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고쳐나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물로 세례받은 자 답게요. 그렇다면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니고데모가 자신의 기득권이 달린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 처럼 저도 대단치 않은 저의 자존심을 버리고 보잘것 없고 관심조차 갖기 싫은 사람일지라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저에게 제 마음안을 꽉 채우고 있는 시기와 질투 미워하는 마음등 나쁜생각들을 깨끗이 비워내고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니고데모처럼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어 작은 것 즉 육의 세계에 연연
하지 않고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주님의 성령
소나무: +찬미 예수님
루실라 자매님.. 자매님 뜻과 하느님 뜻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사랑안에서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04/19-17:19]
놀러가자고 전화를 하여 갑자기 오후 늦게 형제님 부부와 함께 대천을 놀러갔습니다 저녁늦게 도착해 오랜만에 가본 대천바다에서 아이들처럼 폭죽을 터뜨리고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고 하니 그동안의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같아 즐거웠습니다 대천에서 하루를 지내고 집에오는 길가에 핀 꽃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름모를 풀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연산홍 벚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아름다운데도 마음이 굳게 닫혀있어 보지못했던 눈뜬장님이었던 저의 무지와 이기심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새로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갈수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해마다 성유축성미사때 신부님들이 서약식을 할때마다 느끼는 부분이 신자들도 하느님께 신앙갱신식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 새로 태어나려면 적어도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나아야하는데 마음으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다짐을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면서 살아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노력도 하지않으면서 생각으로만 하는 제 자신이 더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많아야 변할수 있는데 세속의 욕심과 이기심 아집과 교만으로 변하지못하는 저의 추한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니고데모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만이라도 느낄수 있다면 변화될수 있을텐데…….. 자신의 아집과 잘못된 선입견으로 많은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답답하고 우매한 사람인 제가 언제쯤이면 새로태어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써 살아갈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받고 태어날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태어나 기뻐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영세할때 기쁘고 설레여 잠이오지 않았던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수만 있다면……… 참! 어제저녁에는 그형제님부부와 함께 임형주 콘서트에가서 또 소리지르고 웃고 떠들고 즐겁게 지내면서 임형주의 맑고 고운 목소리처럼 저도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 임형주의 아베마리아를 들으며 성모님께 기도를 했던 마음처럼 저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새로시작하는 한주간 하느님의 은총안에 기쁘게 지내시기를….
소나무: +찬미 예수님 임 형주 콘서트를 보고 오셨군요..^^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건강하고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04/19-17:14]
놀러가자고 전화를 하여 갑자기 오후 늦게 형제님 부부와 함께 대천을 놀러갔습니다 저녁늦게 도착해 오랜만에 가본 대천바다에서 아이들처럼 폭죽을 터뜨리고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고 하니 그동안의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같아 즐거웠습니다 대천에서 하루를 지내고 집에오는 길가에 핀 꽃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름모를 풀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연산홍 벚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아름다운데도 마음이 굳게 닫혀있어 보지못했던 눈뜬장님이었던 저의 무지와 이기심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새로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갈수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해마다 성유축성미사때 신부님들이 서약식을 할때마다 느끼는 부분이 신자들도 하느님께 신앙갱신식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 새로 태어나려면 적어도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나아야하는데 마음으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다짐을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면서 살아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노력도 하지않으면서 생각으로만 하는 제 자신이 더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많아야 변할수 있는데 세속의 욕심과 이기심 아집과 교만으로 변하지못하는 저의 추한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니고데모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만이라도 느낄수 있다면 변화될수 있을텐데…….. 자신의 아집과 잘못된 선입견으로 많은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답답하고 우매한 사람인 제가 언제쯤이면 새로태어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써 살아갈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받고 태어날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태어나 기뻐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영세할때 기쁘고 설레여 잠이오지 않았던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수만 있다면……… 참! 어제저녁에는 그형제님부부와 함께 임형주 콘서트에가서 또 소리지르고 웃고 떠들고 즐겁게 지내면서 임형주의 맑고 고운 목소리처럼 저도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 임형주의 아베마리아를 들으며 성모님께 기도를 했던 마음처럼 저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새로시작하는 한주간 하느님의 은총안에 기쁘게 지내시기를….
소나무: +찬미 예수님 임 형주 콘서트를 보고 오셨군요..^^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건강하고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04/19-17:14]
지난 토요일에 큰아이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저도 함께하며 참 좋았습니다.
세례 때 다짐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나며 저도 아이와 함께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 컸습니다.
과연 세례 때 다짐했던 마음으로 살았나 하는 반성도 해보았습니다.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말씀
동안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욕심,편견들을 버리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것도 배워야겠습니다.
토요일을 계기로 또 다시 저를 다잡아 주신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되새기며
기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셨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루실라: 아네스 자매님! 아드님의 견진성사 축하드리며 아드님의 견진성사를 통
하여 거듭나신 자매님께도 축하를 전합니다. 이 모든 것 주님께 감사드립
니다. [04/20-07:49]
지난 토요일에 큰아이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저도 함께하며 참 좋았습니다.
세례 때 다짐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나며 저도 아이와 함께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 컸습니다.
과연 세례 때 다짐했던 마음으로 살았나 하는 반성도 해보았습니다.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말씀
동안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욕심,편견들을 버리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것도 배워야겠습니다.
토요일을 계기로 또 다시 저를 다잡아 주신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되새기며
기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셨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루실라: 아네스 자매님! 아드님의 견진성사 축하드리며 아드님의 견진성사를 통
하여 거듭나신 자매님께도 축하를 전합니다. 이 모든 것 주님께 감사드립
니다. [04/20-07:49]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며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거짓인가 거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주, 나의 예수님!
그저..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한다 합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합니다..
예수, 나의 주님, 나의 눈물..
나를 살리신 분..
당신께 이 사랑을 드리기 위하여,
당신께 이 사랑으로 가기 위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합니다.
천상의 지혜, 천상의 용기, 천상의 것 성령………….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을 합당하게 하소서!
천상의 지혜, 천상의 용기, 천상의 것 성령………….
아멘.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며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거짓인가 거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주, 나의 예수님!
그저..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한다 합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합니다..
예수, 나의 주님, 나의 눈물..
나를 살리신 분..
당신께 이 사랑을 드리기 위하여,
당신께 이 사랑으로 가기 위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합니다.
천상의 지혜, 천상의 용기, 천상의 것 성령………….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 내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을 합당하게 하소서!
천상의 지혜, 천상의 용기, 천상의 것 성령………….
아멘.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새로 난다는 것.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웃자고 한번 해봤습니다요)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2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3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활동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내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적인 이해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조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사륵스)입니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하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킵니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 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상처받은 인간성은 허약함과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육의 이해력은 니고데모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갇힌 범주들 및 이해들의 세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신비들을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실재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그리스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와 마찬가지로 “바람” 혹은 “숨 기운”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성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성의 생명의 원천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운명에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변형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과 영으로서의 삶은 짐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방식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프네우마”의 뜻인 “숨 기운” “바람” “영”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창2,7).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거역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생명의 새로운 프네우마(영)의 그림자입니다. 성령(프네우마)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바람처럼 불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면서 원하시는 대로 오고 가시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남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은 교회 성사에 연관된 종말론적 성취의 두 가지 표상들을 가리킵니다. 물은 구약성서에서 축복 혹은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상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주리라”(요엘2,28). 영광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새로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나고 싶으십니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새로 난다는 것.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웃자고 한번 해봤습니다요)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2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3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거나 율법을 제대로 지켜낸다거나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활동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아노텐”은 “다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위로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형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은 위로부터 내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적인 이해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과 동의어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께 자기 조재 목적을 두지 않는 소외된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이 육(사륵스)입니다. 육은 인간의 죄스러움을 단죄하거나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신적 열망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은 인간 종류의 허약한 존재와 감상적인 윤리성을 가리킵니다. 육은 인간의 자기 무력감에 대한 언명이며 도움을 간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사람으로 되신 말씀, 그리하여 인간성의 내재적 내지 본성적인 운명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상처받은 인간성은 허약함과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됩니다. 육의 이해력은 니고데모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갇힌 범주들 및 이해들의 세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신비들을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실재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그리스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와 마찬가지로 “바람” 혹은 “숨 기운” 혹은 “영”을 의미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성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성의 생명의 원천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된다는 운명에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변형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과 영으로서의 삶은 짐스럽게 살아가는 생활방식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만일 “프네우마”의 뜻인 “숨 기운” “바람” “영”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창2,7).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은 거역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생명의 새로운 프네우마(영)의 그림자입니다. 성령(프네우마)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바람처럼 불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면서 원하시는 대로 오고 가시면서,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남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은 교회 성사에 연관된 종말론적 성취의 두 가지 표상들을 가리킵니다. 물은 구약성서에서 축복 혹은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상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주리라”(요엘2,28). 영광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새로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나고 싶으십니까?
오소서. 성령이여!
니고데모 :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예 수 님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율법에 철저하며 존경받기 좋아하던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저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한다는 세례성사의 신비를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새로 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육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것”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
“예전의 나를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는 것”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고쳐나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물로 세례받은 자 답게요. 그렇다면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니고데모가 자신의 기득권이 달린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 처럼 저도 대단치 않은 저의 자존심을 버리고 보잘것 없고 관심조차 갖기 싫은 사람일지라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저에게 제 마음안을 꽉 채우고 있는 시기와 질투 미워하는 마음등 나쁜생각들을 깨끗이 비워내고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니고데모처럼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어 작은 것 즉 육의 세계에 연연
하지 않고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주님의 성령
루실라 자매님.. 자매님 뜻과 하느님 뜻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사랑안에서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04/19-17:19]
오소서. 성령이여!
니고데모 :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예 수 님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율법에 철저하며 존경받기 좋아하던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저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한다는 세례성사의 신비를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새로 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육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것”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
“예전의 나를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는 것”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고쳐나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물로 세례받은 자 답게요. 그렇다면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니고데모가 자신의 기득권이 달린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 처럼 저도 대단치 않은 저의 자존심을 버리고 보잘것 없고 관심조차 갖기 싫은 사람일지라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저에게 제 마음안을 꽉 채우고 있는 시기와 질투 미워하는 마음등 나쁜생각들을 깨끗이 비워내고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니고데모처럼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어 작은 것 즉 육의 세계에 연연
하지 않고 물로 세례받은 자 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주님의 성령
루실라 자매님.. 자매님 뜻과 하느님 뜻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사랑안에서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04/19-17:19]
그저께와 어제 이틀동안 친형제처럼 지내는 형제님께서 머리가 복잡하다고 바람도 쉘겸
놀러가자고 전화를 하여 갑자기 오후 늦게 형제님 부부와 함께 대천을 놀러갔습니다
저녁늦게 도착해 오랜만에 가본 대천바다에서 아이들처럼 폭죽을 터뜨리고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고 하니 그동안의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같아 즐거웠습니다
대천에서 하루를 지내고 집에오는 길가에 핀 꽃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름모를 풀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연산홍 벚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아름다운데도 마음이 굳게 닫혀있어 보지못했던 눈뜬장님이었던
저의 무지와 이기심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새로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갈수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해마다 성유축성미사때 신부님들이 서약식을 할때마다
느끼는 부분이 신자들도 하느님께 신앙갱신식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
새로 태어나려면 적어도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나아야하는데 마음으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다짐을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면서 살아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노력도 하지않으면서 생각으로만 하는 제 자신이 더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많아야 변할수 있는데 세속의 욕심과 이기심
아집과 교만으로 변하지못하는 저의 추한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니고데모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만이라도
느낄수 있다면 변화될수 있을텐데……..
자신의 아집과 잘못된 선입견으로 많은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답답하고
우매한 사람인 제가 언제쯤이면 새로태어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써
살아갈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받고 태어날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태어나 기뻐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영세할때 기쁘고 설레여 잠이오지 않았던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수만
있다면………
참! 어제저녁에는 그형제님부부와 함께 임형주 콘서트에가서 또 소리지르고
웃고 떠들고 즐겁게 지내면서 임형주의 맑고 고운 목소리처럼 저도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 임형주의 아베마리아를 들으며 성모님께 기도를 했던
마음처럼 저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새로시작하는 한주간 하느님의 은총안에 기쁘게 지내시기를….
그저께와 어제 이틀동안 친형제처럼 지내는 형제님께서 머리가 복잡하다고 바람도 쉘겸
놀러가자고 전화를 하여 갑자기 오후 늦게 형제님 부부와 함께 대천을 놀러갔습니다
저녁늦게 도착해 오랜만에 가본 대천바다에서 아이들처럼 폭죽을 터뜨리고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고 하니 그동안의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같아 즐거웠습니다
대천에서 하루를 지내고 집에오는 길가에 핀 꽃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름모를 풀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연산홍 벚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아름다운데도 마음이 굳게 닫혀있어 보지못했던 눈뜬장님이었던
저의 무지와 이기심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새로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갈수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해마다 성유축성미사때 신부님들이 서약식을 할때마다
느끼는 부분이 신자들도 하느님께 신앙갱신식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
새로 태어나려면 적어도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나아야하는데 마음으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다짐을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면서 살아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노력도 하지않으면서 생각으로만 하는 제 자신이 더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많아야 변할수 있는데 세속의 욕심과 이기심
아집과 교만으로 변하지못하는 저의 추한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니고데모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만이라도
느낄수 있다면 변화될수 있을텐데……..
자신의 아집과 잘못된 선입견으로 많은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답답하고
우매한 사람인 제가 언제쯤이면 새로태어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써
살아갈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받고 태어날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태어나 기뻐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영세할때 기쁘고 설레여 잠이오지 않았던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수만
있다면………
참! 어제저녁에는 그형제님부부와 함께 임형주 콘서트에가서 또 소리지르고
웃고 떠들고 즐겁게 지내면서 임형주의 맑고 고운 목소리처럼 저도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 임형주의 아베마리아를 들으며 성모님께 기도를 했던
마음처럼 저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새로시작하는 한주간 하느님의 은총안에 기쁘게 지내시기를….
†주님! 당신을 찬미하도록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지난 토요일에 큰아이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저도 함께하며 참 좋았습니다.
세례 때 다짐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나며 저도 아이와 함께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 컸습니다.
과연 세례 때 다짐했던 마음으로 살았나 하는 반성도 해보았습니다.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말씀
동안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욕심,편견들을 버리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것도 배워야겠습니다.
토요일을 계기로 또 다시 저를 다잡아 주신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되새기며
기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셨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하여 거듭나신 자매님께도 축하를 전합니다. 이 모든 것 주님께 감사드립
니다. [04/20-07:49]
†주님! 당신을 찬미하도록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지난 토요일에 큰아이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저도 함께하며 참 좋았습니다.
세례 때 다짐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나며 저도 아이와 함께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 컸습니다.
과연 세례 때 다짐했던 마음으로 살았나 하는 반성도 해보았습니다.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말씀
동안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욕심,편견들을 버리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것도 배워야겠습니다.
토요일을 계기로 또 다시 저를 다잡아 주신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되새기며
기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셨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하여 거듭나신 자매님께도 축하를 전합니다. 이 모든 것 주님께 감사드립
니다. [04/20-0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