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조직신학적 고찰(성찬례 기본요소)

 

4.  조직신학적 고찰




4.1      성찬례의 기본 요소



4.1.1.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


1세기 말엽부터서 성찬례는 “감사제”(eucharistia)로 불리웠다. 구약에서 유다 백성은 식사를 시작하며 가장이 빵을 들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억(zikkaron=anamnesis)하며 “찬양”(berakah)한 것처럼 교회도 성찬례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와, 창조와 구속과 성화로 이루어주신 모든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60조). “성찬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큰 제사이다. 교회는 온세상을 위해서 이 큰 제사를 드린다”(리마 문서 “성찬” 4항). 이렇게 모든 피조물을 대표해서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인 성찬례의 본래적인 주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찬미의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찬미와 전구에 신자들을 결합시키신다. 이로써 성부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지도록,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61조). 교회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인 성찬례의 지속적인 거행을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으로 받아들여서 세상 끝날까지 실행할 것이다.




4.1.2.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예수께서 최후만찬 석상에서 빵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내 몸입니다”, 포도주 잔을 건내시면서 “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나의 피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빵과 포도주로 표현되는 예수의 몸과 피는 단지 물리적으로 신체의 일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모든)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헌신하는 예수 자신을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성찬례와 성찬의 음식에 예수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수하면서(참조: 1고린 10,16) 예수와의 일치를 위해서는 성찬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참조: 요한 6,56).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히브리적 사고에 근거해서 성찬례에서 과거의 사건인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anamnesis)함으로써 그분이 성찬례와 성찬 음식 안에 현존하신다고 이해하였다. 물론 이런 현존은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인한다고 전제하였다.


빵과 포도주 안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어 왔다. 희랍교부들은 플라톤 철학의 원형-모형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서 빵과 포도주라는 상징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현존한다고 이해하였다(실재상징).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는 한 사물의 정신적인 본질인 실체와 오관으로 감지되는 겉모양인 우유를 구분해서 고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찬 음식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설명한다. 즉 성변화 이후에 빵과 포도주의 우유는 그대로 존속하지만 실체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는 것이다(실체변화).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찬의 음식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되게, 실제적으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DS 1651)고 표현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찬적 현존을 ‘실체변화’와 밀접하게 연관짓고 있다. 그래서 ‘실체변화설’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자들의 의식 속에 성체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설명하는 ‘정답’ 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을 둔 우유와 실체라는 개념으로 물질을 분석하지 않는다.1) 분자, 원자, 원자핵, 전자, 양자, 소립자 같은 말마디로 물질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실체변화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성찬적 현존이 인격적 현존이라는 점을 표현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다고 평가된다. 랕찡어(J.Ratzinger)는 실체변화를 주제로 다룬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님은 감각적 사물처럼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방식으로 그리고 인격대 인격의 관련 속에서 현존하신다[…]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당연하게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 안에서 현존하는 방식으로, 나를 너에게 자발적으로 내어주고 선사하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2)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장소적(localiter)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personaliter) 현존하신다고 강조한다.3) 성찬례에 관해서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일치를 본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성찬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이란 하나의 인격적인 현존이며 이것을 어떤 기존 사물과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4)




인격적 현존은 사물의 현존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낯선 사람과 만났을 경우, 사람이 곁에 있지만 인격적 현존이라고 할 수 없다. 단지 누가 옆에서 공간을 차지할 뿐이다. 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도 인격적으로 현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그 편지는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현존케 하는 역할을 한다.




화란의 신학자 스호넨베르크(Piet Schoonenberg)는 그리스도의 성찬적 현존을 인격적 지평에서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우선 “정보의 표지”(informierendes Zeichen)와 “실현의 표지”(realisierendes Zeichen)를 구분한다. 정보의 표지란 예를 들어서 100미터 전방에 커브길이 있다는 것을 단지 지시해주는 교통 표지판과 같은 것으로서 표지와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사이의 내용적인 연관성은 없다. 실현의 표지란 표지가 지시하는 바를 실제로 포함하고 실현한다. 예를 들어서 서로 다투었던 사람이 화해를 하면서 악수를 할 때, 그 악수는 화해를 담고 실현하는 표지가 된다.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는 반지는 단순히 사랑을 지시하는 표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포함하고 실현하는 표지이다. 이 경우 반지는 그것을 준 사람의 사랑, 다시 말해서 그 사람 자신을 담고 있는 현존의 표지가 된다.


성찬례에서의 빵과 포도주 역시 이런 실현의 표지이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많은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자신의 표지로 삼았고 그래서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는 본질적으로 빵과 포도주 이상의 것이 된다. 여기서 어떤 변화를 얘기할 수 있다. 물론 빵은 여전히 빵이고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로서 물질의 변화는 없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성찬의 음식은 그냥 단순한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을 담고 실현하는 표지가 된다. 다시 말하면 빵과 포도주의 의미와 목적이 변화된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의미변화” (transsignificatio), “목적변화”(transfinalisatio)라는 부른다. 현대 신학 내에서 이 해석에 대한 반응은 대폭적으로 지지하는 편이다.5)


의미변화, 목적변화란 개념이 그리스도의 성찬적 현존을 표현하는 데에 충분하느냐는 질문에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는 부정적인 대답을 내린 듯이 보인다. “실체 변화가 발생할 때 의심 없이 빵과 포도주의 외형은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목적을 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보통의 빵과 보통의 포도주가 아니며 성스러운 요소의 표징과 영적 음식의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가 마땅히 존재론적이라 불러야 하는 새로운 실재를 내포한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목적을 취하는 것입니다”.6)


회칙은 의미변화와 목적변화라는 새로운 해석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으면서도 단지 주관적인 해석으로 그칠 것을 우려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찬의 음식의 의미와 목적이 변화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신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작용에 근거한다고 할 때 이런 우려는 해소될 수 있다. “빵과 포도주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현양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 그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와 아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새로운 표지 기능을 얻게 된다. 이런 변화는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립되고 실현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이를 인식하고 받아들인다”7) 이렇게 의미변화, 목적변화를 말하는 이들도 성찬적 현존이 인간의 주관과 신앙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현존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신앙을 통해서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이는 내 몸이다”고 아무에게나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의 열두 사도들과 충실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성찬 음식의 변화와 성찬적 현존에 있어서 예수와 제자들의 인격적, 신앙적 관계가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 하겠다.8)


리마문서는 성찬적 현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찬 제정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들과 행위들이야말로 교회 성찬의 핵심을 이룬다. 성찬 회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성사)이요, 그분이 실제로 현존하시는 성례전이다 […] 교회는 성찬 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살아계신 분으로서, 능동적으로 현존하신다고 고백한다. 성찬 때의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이 사람들의 신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식별하려면 신앙이 요구된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한다”(13항).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신비스러우면서도 실제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즉 온전히 현존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믿지만, “다른 교단에서는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빵과 포도주의 표징과 그처럼 밀착시키지는 않는다”(13항 해설).



4.1.3. 희생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의 기억과 참여


히브리서는 예수의 죽음을 희생제사라고 표현하였고,『열두 사도의 가르침』에서는 성찬레를 제사(thysia)라고 불렀다. 그 이후로 성찬례를 희생제사라고 보는 견해가 점점 더 증가하였다. 고대교부들은 플라톤 철학에 기반을 둔 원형-모형 사고의 지평에서 성찬례의 희생제사적 성격은 십자가상 희생제사를 기억하고 현재화하는 데에서 보았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와서는 원형-모형 사고체계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성찬례를 십자가의 희생제사와는 별도의 희생제사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확산되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십자가상 희생제상의 유일회성을 주장하는 히브리서를 근거로 이런 견해를 비판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성찬례가 희생제사라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제물과 제물을 봉헌하는 사제가 동일하다고 말함으로써 성찬례와 십자가상 희생 제사는 동일하다고 강조하면서 성찬례는 십자가상 희생제사의 반복이나 보충이 아니고 재현, 기억, 적용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 사건의 유일회성(히브 9-10장)을 손상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십자가의 제사가 성찬례에서 기억(memoria)을 통해서 영속화한다고(전례헌장 47장) 설명한다.


성찬례에서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을 ‘기억’(anamnesis)함으로써 그분이 성찬례와 성찬 음식 안에 현존하신다. 즉 현양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성찬례와 성찬의 음식에 현존하신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의 역사와 함께 현존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고난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나타나신 것(참조: 요한 20,20)처럼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그분의 삶과 고난, 사랑과 그 사랑을 위해서 치룬 희생과 함께 현존하신다. 이런 맥락에서 성찬례가 희생제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제사, 즉 많은(=모든) 이를 위한 자기봉헌을 기억함으로써 현재화하고 그 효력이 분배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희생제사라고 표현하는데, 짐승의 피흘림으로서가 아니라 기도(히브 5,7), 복종(5,8) 자기봉헌(9,12-14)를 통해서 제사를 드렸다고 규정한다. 즉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들에 대한 제한없는 배려와 유보없는 생명의 양도가 “희생제사”란 제의적 명칭으로 표현된 것이다. “구약의 제도로 보아서 사제계급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신도>였던 예수는 제사 사상의 본 목표 […] 즉 순교, 하느님 종의 대신하는 자아봉헌이라는 목표를 되살렸다. 이로써 유대인 사제들이 자기 자신이나 민족의 속죄로 거듭 바쳤던 -지금에는 의미가 없어진 – 모든 옛 물건이나 동물로 된 희생제물은(히브 5,1-3 참조) 끝장을 보게 되었다. 예수가 자신을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로 우리를 위하여 바치신’(에페 5,2) 다음부터는 다른 희생제물이 필요없게 되었다(히브 10,18 참조)”.9)




성찬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 희생제사, 즉 자기 봉헌행동과 함께 현존하시면서 성찬례에 모인 이들을 당신이 시작하신 자기봉헌의 움직임에 끌어 들이신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본래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희생제사 측면에도 해당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를 차지하도록 열어 놓아야하고, 그의 자기봉헌의 삶 안으로 자라나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성찬에의 참여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1고린 10,16)하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의 희생이 된다. 여기서 교회 공동체의 희생이란 그리스도의 희생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의 자기봉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한 삶에 들어선다.


이와 같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봉헌을 기억하며 그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로 성찬례는 교회가 드리는 희생제사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하느님 예배에, 자아봉헌의 예배에 우리 신자들 역시 실존 전체를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자아양도에 우리의 자아양도로, 그의 사랑에 우리의 사랑으로 대답한다 […]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자아봉헌 행위에 참여하는 그만큼 우리도 <희생제사>를 위한 그분의 몸이 된다. 우리도 이제는 물건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 실존 전체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은 너의 예물이 아니라 너를 원하신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이 사정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10) 성찬례가 교회가 드리는 희생제사라는 것은 “흔히 상상하듯이 교회가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는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며,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감을 의미할 뿐이다. 루터가 염두에 두고 공격한 바 미사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서 반복되는 새로운 제사이며 거기서 자동적으로 불가항력적인 효과가 나온다는 생각은 오늘날 적어도 가톨릭의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자기 봉헌은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 다시 말해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참조: 요한 17,20-26)과 죄인들(참조: 루가 23,34)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성찬례에서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그리스도 안에 죽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DS 1743) 죽은 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바친다. 이러한 연대성을 “속죄”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기도는 화해와 용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찬례가 산 이와 죽은 이들 위한 속죄의 제사라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표현(참조: DS 1753)은 교회가 이렇게 성찬례에서 기도로써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이들과 세상을 위한 예수의 헌신에 함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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