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조직신학적 고찰(특별한 문제들)

    4.2.   특별한 문제들1)


4.2.1.   성체의 보존과 경배에 관한 문제


이미 고대 교회에서도 축성된 빵이나 가끔은 축성된 포도주까지도 성찬례를 거행한 후에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습에 반대하는 교회의 규정도 있었다.


성체를 보존했던 이유는 병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성찬례가 거행되는 않는 날에 집에서 영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 일치의 표시로써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fermenentum”이라고 부르는) 성체 조각을 다른 공동체와 교환하거나, 혹은 같은 장소에서도 다음의 성찬례를 위해서 두는 관습에 있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성체 보존을 반대하는 근거로서 성찬 축제는 경과적이고 지나가는 특성지닌다는 점을 내세웠다. 즉 구약 성서에서 만나와 빠스카의 양고기를 남겨서는 안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의 최후 만찬에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처럼, 성찬의 잔치에서도 아무 것도 남아 있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중세의 중기에는 성체 보존을 위해서 새로운 동기가 첨가되었다. 즉 축성된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미사 밖에서도 흠숭하기 위해서 성체를 따로 보전하였다.


이런 흠숭은 새로운 형태의 성체 신심을 형성하게 된다: 성체 성혈 축일, 성체 거동 행렬, 성광에 모신 성체의 현시 등등의 것이 생겨났다. 성체 신심이 이렇게 전개된 데에는 성체 배령의 퇴조, 성체를 바라봄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 성인들의 유해 공경의 모방, 실재현존을 거부하는 이단자들과의 격렬한 투쟁등이 이유가 있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체를 경배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서 거부하였다. 이들에 대항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전통적인 성체 신심을 변호하면서, 성체 배령을 찬성하는 것이 성체 흠숭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 (성체) 안에 성서의 증언 (마태 28,17)에 따라 사도들이 갈릴레아에서 경배한 동일한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DS 1643; 참조: 1656).


오늘날 성체 흠숭의 관습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체 신심의 본래적이고 일차적인 형태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는 것이고,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말씀의 선포, 성찬의 감사 기도, 최후 만찬의 기억, 성찬 제물을 나누고 영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다른 여러 가지 신심 형태는 이차적일 뿐이다: 그것들은 신자들을 성찬의 잔치에로 이끌고, 그것을 폭넓게하고 심화하는 한 적합한 것이다. 그래서 성체 신심 형태들이 성찬례의 특성을 불분명하게 만들거나 거기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신학적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가톨릭 측에서 성체 공경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례 실천의 고유한 전통임을 인식한 것이 교회 일치를 위한 토론에서도 부담을 덜게 되었다. 즉 이는 비로소 천년대에 생긴 관습으로서, 서방 교회 내에 국한 되어 있고, 그러기에 미래에 교회가 다양성 안에서 일치되더라도 의무적인 실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4.2.2.   성찬례의 공동참여에 관한 문제


지난 수십년 동안 그리스도 교회들 간의 관계는 분위기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관점도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그와 함께 공동의 경신례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도 변화되었다.


1917년의 교회법은 “교회의 성사들을 이단자들과 분열자들에게 수여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금지시켰고 (1917년 교회법 731조 2항), 가톨릭 신자들이 비가톨릭의 그리스도 교회의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거나 함께하는 것을 금하였다 (교회법 1258조 1항). 이와는 달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갈라진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허락되는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이와 같은 공동 기도는 분명 일치의 은총을 얻는 효과적인 방법이며, 가톨릭 신자들과 갈라진 형제들을 아직도 결합시켜 주는 紐帶의 진정한 표현이기도 하다” (일치교령 8항). 성찬례의 공동참여(communicatio in sacris)도 “적당한 기회에 교회 장상의 인준을 받아 허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권장하는 바이다”(일치교령 15항; 교회법 제844조 3항 참조). 공의회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일치의 표현이란 점에서는 흔히 공동 행위를 금한다. 은총을 받으려는 목적은 가끔 공동 행위를 권장한다”(일치교령 8항). 이 두가지 원칙 간의 긴장은 현재 실천적인 면이나 신학적인 반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3년의 교회법에서는 비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체를 수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으나, (좁은 범위 내에서의) 일련의 예외를 허락하고 있다. (비상시에) 가톨릭 신자들이 “참회와 성찬 및 병자의 성사를 유효하게 보존하는 비가톨릭 교역자들한테서” 성사를 받는 것이 허락된다 (교회법, 844조 1.2.4항). 여기에서 비가톨릭 교회는 현재로는 동방 교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개신교회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신학적인 토론에서 한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 간의 공동의 성찬례가 허락될 수 있다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세례성사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대두되었다. “성세는 성세로 재생한 모든 사람들 사이를 묶어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일치교령 22항)이라는 생각이 공동의 성찬례를 찬성하게끔 한다. 지난 수십년간 이런 일치에 대한 의식이 자라났다. 갈라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최후만찬 기사 안에 제자들의 일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요한 17,21-23)가 자리한다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기도를 함께 바치며 일치를 간청한다면 일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실천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 신자들이 그들이 거행하는 “성찬식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그리스도와 이루는 친교로 생명을 얻는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기다린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 교도권은 여전히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간의 공동의 성찬례를 반대하는데, 그에 대한 주요 論據는 다음과 같다:


(1) 공동의 성찬례 거행을 위해 필요한 신앙 고백의 일치, 특별히 희생 제사와 실재 현존에 대해서 아직도 일치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2) 그밖에도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신품성사의 결여로 성체성사의 본연의 완전한 本體를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치교령 22항).


(3) 성찬례는 교회 일치의 표징이기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 표징을 거행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이 논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겠다.


(1) 1986년에 (교회 공식적으로 위탁을 받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자로 구성된 교회 일치를 위한 연구팀이 철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종교 개혁 당시의 중요한 논쟁점, 즉 희생 제사의 성격과 실재 현존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신학적으로는 더 이상 상대방을 단죄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해결을 보았다”. 더 중요한 차이는 오히려 실천면에 있는데, 말하자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찬의 제물을 성찬례 이후에 서로 상이하게 다루는 데에” 있다고 이 연구서는 보고 있다. 여기에는 “수백년간의  실천적인 습관이 상당한 정도로 명시적인 숙고와 논증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1)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아무 편에서도 상대방의 신앙 고백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충분할 만큼의 일치가 이루어 진 것이 아닌가? 서로 다른 실천에 대해서: 전례와 신학의 역사 과정에 나타난 (가톨릭 내부의) 커다란 차이점을 생각한다면, 어떤 식의 다양성은 가능하거나, 더군다나 풍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설사 차이점이 방해의 요소로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차이점은 계속해서 분리되어 있는 데에서가 아니라 공동으로 예식을 실천하면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가톨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교회” (혹은 “교회적 공동체”)라고 일컬었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는 이런 교회들(교회적 공동체들)의 성만찬을 적어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집회로써, 그 안에 예수께서 성령을 통한 자신의 현존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설사 교회 직무 신학에 대해 교회들 간에 아직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이 집회가 가톨릭의 성찬례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인지가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더라도, 가톨릭 신자들이 이런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는가(해도 되는가)?


(3) 가톨릭의 이해에 따르면 성사는 그것이 표시하는 바를 이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기 스콜라 신학에 의하면 신비체 (=교회)의 일치가 성체성사의 본래적 효과이다. 교황 이노첸시오 3세(+ 1216)에 따르면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표시하고 이룩한다(PL 217, 879). 그렇다면 (성사의 거행자들이 그에 상응하게 노력한다는 것을 전제하에) 공동의 성찬례를 통해서 일치의 진일보를 바랄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성찬례를 통해 표현된 일치의 본질적인 차원은 사랑의 일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원수이거나 원수로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같이 빵을 나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의 완전한 일치가 성찬례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공동의 성찬례는 결코 거행될 수 없다. 성찬례는 길을 가는 데에 힘을 북돋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찬례는 교회의 일치로 가는 길에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함께 성찬례를 거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톨릭 교회 교도권은 개신교와의 공동 성찬례를 용인하고 있지 않지만, 개별적인 경우 예외적으로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영성체를 허락한다. “직권자(교구장이나 주교회의)의 판단에 따라 중대한 필요성이 긴급하게 요구할 때,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은 다른 그리스도교파 신자들에게 성사(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진하여 성사를 청해야 한다. 즉 이 성사들에 대한 가톨릭 신앙을 표명하고 올바른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401항; 교회법 제844조 4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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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조직신학적 고찰(특별한 문제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4.2.   특별한 문제들1)

    4.2.1.   성체의 보존과 경배에 관한 문제

    이미 고대 교회에서도 축성된 빵이나 가끔은 축성된 포도주까지도 성찬례를 거행한 후에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습에 반대하는 교회의 규정도 있었다.

    성체를 보존했던 이유는 병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성찬례가 거행되는 않는 날에 집에서 영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 일치의 표시로써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fermenentum”이라고 부르는) 성체 조각을 다른 공동체와 교환하거나, 혹은 같은 장소에서도 다음의 성찬례를 위해서 두는 관습에 있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성체 보존을 반대하는 근거로서 성찬 축제는 경과적이고 지나가는 특성지닌다는 점을 내세웠다. 즉 구약 성서에서 만나와 빠스카의 양고기를 남겨서는 안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의 최후 만찬에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처럼, 성찬의 잔치에서도 아무 것도 남아 있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중세의 중기에는 성체 보존을 위해서 새로운 동기가 첨가되었다. 즉 축성된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미사 밖에서도 흠숭하기 위해서 성체를 따로 보전하였다.

    이런 흠숭은 새로운 형태의 성체 신심을 형성하게 된다: 성체 성혈 축일, 성체 거동 행렬, 성광에 모신 성체의 현시 등등의 것이 생겨났다. 성체 신심이 이렇게 전개된 데에는 성체 배령의 퇴조, 성체를 바라봄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 성인들의 유해 공경의 모방, 실재현존을 거부하는 이단자들과의 격렬한 투쟁등이 이유가 있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체를 경배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서 거부하였다. 이들에 대항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전통적인 성체 신심을 변호하면서, 성체 배령을 찬성하는 것이 성체 흠숭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 (성체) 안에 성서의 증언 (마태 28,17)에 따라 사도들이 갈릴레아에서 경배한 동일한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DS 1643; 참조: 1656).

    오늘날 성체 흠숭의 관습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체 신심의 본래적이고 일차적인 형태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는 것이고,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말씀의 선포, 성찬의 감사 기도, 최후 만찬의 기억, 성찬 제물을 나누고 영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다른 여러 가지 신심 형태는 이차적일 뿐이다: 그것들은 신자들을 성찬의 잔치에로 이끌고, 그것을 폭넓게하고 심화하는 한 적합한 것이다. 그래서 성체 신심 형태들이 성찬례의 특성을 불분명하게 만들거나 거기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신학적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가톨릭 측에서 성체 공경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례 실천의 고유한 전통임을 인식한 것이 교회 일치를 위한 토론에서도 부담을 덜게 되었다. 즉 이는 비로소 천년대에 생긴 관습으로서, 서방 교회 내에 국한 되어 있고, 그러기에 미래에 교회가 다양성 안에서 일치되더라도 의무적인 실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4.2.2.   성찬례의 공동참여에 관한 문제

    지난 수십년 동안 그리스도 교회들 간의 관계는 분위기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관점도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그와 함께 공동의 경신례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도 변화되었다.

    1917년의 교회법은 “교회의 성사들을 이단자들과 분열자들에게 수여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금지시켰고 (1917년 교회법 731조 2항), 가톨릭 신자들이 비가톨릭의 그리스도 교회의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거나 함께하는 것을 금하였다 (교회법 1258조 1항). 이와는 달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갈라진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허락되는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이와 같은 공동 기도는 분명 일치의 은총을 얻는 효과적인 방법이며, 가톨릭 신자들과 갈라진 형제들을 아직도 결합시켜 주는 紐帶의 진정한 표현이기도 하다” (일치교령 8항). 성찬례의 공동참여(communicatio in sacris)도 “적당한 기회에 교회 장상의 인준을 받아 허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권장하는 바이다”(일치교령 15항; 교회법 제844조 3항 참조). 공의회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일치의 표현이란 점에서는 흔히 공동 행위를 금한다. 은총을 받으려는 목적은 가끔 공동 행위를 권장한다”(일치교령 8항). 이 두가지 원칙 간의 긴장은 현재 실천적인 면이나 신학적인 반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3년의 교회법에서는 비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체를 수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으나, (좁은 범위 내에서의) 일련의 예외를 허락하고 있다. (비상시에) 가톨릭 신자들이 “참회와 성찬 및 병자의 성사를 유효하게 보존하는 비가톨릭 교역자들한테서” 성사를 받는 것이 허락된다 (교회법, 844조 1.2.4항). 여기에서 비가톨릭 교회는 현재로는 동방 교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개신교회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신학적인 토론에서 한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 간의 공동의 성찬례가 허락될 수 있다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세례성사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대두되었다. “성세는 성세로 재생한 모든 사람들 사이를 묶어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일치교령 22항)이라는 생각이 공동의 성찬례를 찬성하게끔 한다. 지난 수십년간 이런 일치에 대한 의식이 자라났다. 갈라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최후만찬 기사 안에 제자들의 일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요한 17,21-23)가 자리한다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기도를 함께 바치며 일치를 간청한다면 일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실천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 신자들이 그들이 거행하는 “성찬식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그리스도와 이루는 친교로 생명을 얻는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기다린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 교도권은 여전히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간의 공동의 성찬례를 반대하는데, 그에 대한 주요 論據는 다음과 같다:

    (1) 공동의 성찬례 거행을 위해 필요한 신앙 고백의 일치, 특별히 희생 제사와 실재 현존에 대해서 아직도 일치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2) 그밖에도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신품성사의 결여로 성체성사의 본연의 완전한 本體를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치교령 22항).

    (3) 성찬례는 교회 일치의 표징이기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 표징을 거행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이 논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겠다.

    (1) 1986년에 (교회 공식적으로 위탁을 받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자로 구성된 교회 일치를 위한 연구팀이 철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종교 개혁 당시의 중요한 논쟁점, 즉 희생 제사의 성격과 실재 현존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신학적으로는 더 이상 상대방을 단죄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해결을 보았다”. 더 중요한 차이는 오히려 실천면에 있는데, 말하자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찬의 제물을 성찬례 이후에 서로 상이하게 다루는 데에” 있다고 이 연구서는 보고 있다. 여기에는 “수백년간의  실천적인 습관이 상당한 정도로 명시적인 숙고와 논증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1)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아무 편에서도 상대방의 신앙 고백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충분할 만큼의 일치가 이루어 진 것이 아닌가? 서로 다른 실천에 대해서: 전례와 신학의 역사 과정에 나타난 (가톨릭 내부의) 커다란 차이점을 생각한다면, 어떤 식의 다양성은 가능하거나, 더군다나 풍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설사 차이점이 방해의 요소로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차이점은 계속해서 분리되어 있는 데에서가 아니라 공동으로 예식을 실천하면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가톨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교회” (혹은 “교회적 공동체”)라고 일컬었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는 이런 교회들(교회적 공동체들)의 성만찬을 적어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집회로써, 그 안에 예수께서 성령을 통한 자신의 현존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설사 교회 직무 신학에 대해 교회들 간에 아직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이 집회가 가톨릭의 성찬례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인지가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더라도, 가톨릭 신자들이 이런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는가(해도 되는가)?

    (3) 가톨릭의 이해에 따르면 성사는 그것이 표시하는 바를 이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기 스콜라 신학에 의하면 신비체 (=교회)의 일치가 성체성사의 본래적 효과이다. 교황 이노첸시오 3세(+ 1216)에 따르면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표시하고 이룩한다(PL 217, 879). 그렇다면 (성사의 거행자들이 그에 상응하게 노력한다는 것을 전제하에) 공동의 성찬례를 통해서 일치의 진일보를 바랄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성찬례를 통해 표현된 일치의 본질적인 차원은 사랑의 일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원수이거나 원수로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같이 빵을 나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의 완전한 일치가 성찬례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공동의 성찬례는 결코 거행될 수 없다. 성찬례는 길을 가는 데에 힘을 북돋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찬례는 교회의 일치로 가는 길에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함께 성찬례를 거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톨릭 교회 교도권은 개신교와의 공동 성찬례를 용인하고 있지 않지만, 개별적인 경우 예외적으로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영성체를 허락한다. “직권자(교구장이나 주교회의)의 판단에 따라 중대한 필요성이 긴급하게 요구할 때,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은 다른 그리스도교파 신자들에게 성사(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진하여 성사를 청해야 한다. 즉 이 성사들에 대한 가톨릭 신앙을 표명하고 올바른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401항; 교회법 제844조 4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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