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마귀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마귀들린 사람의 치유를 생각하게 되는지, 돼지가 죽어서 입은 경제적 손실을 생각하게 되는지 한번 내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어떤 것을 참된 이익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8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들린 사람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와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가다라 지방을 어떤 사본에서는 게사라 지방이라고 합니다. 불쌍한 이 사람은 무덤 근처에서 살았고, 사람들은 무서워서 그들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어릴 때 집으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던 이상한 누나가 생각이 납니다. 덩치가 얼마나 컸던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한동안 집으로 가는 길이 무서울 때가있었습니다. 산 속의 집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집에 아이 봐 주러 온 것 같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29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소리질렀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마귀는 광야에서 유혹할 때는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거든…”하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라는 말은 마귀가 메시아의 나라와 마지막 심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몰랐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0  마침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31  마귀들은 예수께 “당신이 우리를 쫓아 내시려거든 저 돼지 속으로나 들여 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32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마귀들은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 갔다. 그러자 돼지때는 온통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 떨어져 물 속에 빠져 죽었다.


마르코복음 5장 13절에는 돼지가 2천마리나 되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티나에는 소, 당나귀, 산양, 양 등을 아침마다 목자에게 맡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2,000마리라는 많은 가축이 한데 모여 있었을까? 하고 의심을 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다인은 돼지를 기를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들린 사람이 살던 곳은 거의 이교도들만이 살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것끼리는 서로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마귀가 돼지 속으로나 들어 가게 해 달라고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지옥에 가기보다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마귀에게는 하나의 위안이었다고 해석한 학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살아 있는 돼지 속으로 들어 가고 싶었으나 뜻밖에도 그 돼지가 빠져죽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나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좌우지간 마귀는 자신들이 거의 망했다 하더라도 왜 때가 되기도 전에 자기들을 괴롭히냐고 술수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그럽게 허락을 하십니다. 그런데 돼지떼는 바다로 돌진하여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어떤 이는 마귀가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는 무엇인가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기에 그것을 하나의 발악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셔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셨을까요? 이런 질문을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신부님께 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그 학생을 쳐다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은 사람보다는 돼지가 더 중요한가 보지?”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라는 시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33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읍내로 달려 가서 이 모든 일과 마귀들렸던 사람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와서 예수를 보고는 저희 고장에서 떠나 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을 사람 하나를 살렸다는 것은 결코 기뻐하지 않고, 자신들이 입은 경제적 손실만을 걱정하면서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무서워서 다니지도 못했던 길을 이제는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이익인지, 어떤 것이 손해인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이익일까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이익일까요? 재물을 살리는 것이 이익일까요? 물질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영적으로 충만해 질 수 있다면 그것이 이익일까요? 손해일까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이익과 손해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2. 내 자녀가 그렇게 심한 병에 걸려 있다면 나는 돼지 2000마리를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돼지 2,000마리를 끌어안고, 자녀를 포기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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