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다행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신자라고 해서 박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매질하고 법정에 넘겨주고….얼마나 다행입니까? 아마 누군가가 나의 신앙 때문에 나를 박해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마 도 저는 무슨 말로 합리화를 시키고 빠져 나올까를 고민할 것 같습니다.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 제자들은 마치 이리떼 속에 있는 양과도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리”라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론가, 열광자, 괴변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리떼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모욕과 박해 속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함을 말씀하십니다. 뱀은 교활하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달리 말하면 어떠한 위험일지라도 교묘하게 피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사립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리 속에 들어 간선교사는 스스로 그 이리의 입 속으로 뛰어 들어 가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뱀과 같이 자기를 보호하는 데 슬기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으로 슬기로운 선교사는 그들과도 어울 릴 수 있어야 합니다.
희고 아름다운 비둘기는 솔직함의 상징입니다. 죄 없는 생활을 하며, 음모를 꾸미지 않고, 악한 자의 의심도 일으키지 않는 정직한 생활을 보내는 것은 불화와 논쟁만을 일삼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조건입니다. 여기에 신중함을 곁들인다면 그 소박함을 지킬 수 있고, 악인의 함정을 피할 수 있으며 부당한 고소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비둘기에 대한 해석>
비둘기는 순진한 걸음걸이를 하며 언제 잡아도 괜찮다는 듯이 보이지만, 이쪽에서 막상 잡으려 하면 훌쩍 날라가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라는 말씀일지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 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조심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교활하고 난폭한 유다인입니다. 악한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는 채찍이요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진리의 말씀을 막으려고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71인의 최고의회를 비롯하여, 최저 120명의 유다인이 있는 지방마다 23명으로 구성된 의회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종교적인 범죄를 재판하고 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먼저 이 지방의 의회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채찍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5,40;2고린11,23-24). 사도행전을 보면 이러한 재판의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범죄는 모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죄목뿐이었습니다.
신앙인이기에 박해를 당할 때가 언제일까요?
개신교 학교에서 신자들이 박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숨기고 생활하고 있고, 더러는 개신교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계신지 모릅니다.
가정에서 종교가 달라서 박해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불교나 개신교이고 며느리가 가톨릭일 때, 어떤 이들은 시어머니를 따라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가지 하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미개척지(비신자 가정)에 들어가 훌륭히 신앙을 증거하여 가톨릭 신앙에로 초대합니다.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길 수 없는 박해는 없는 듯 합니다. 사도들은 훌륭하게 증언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목숨은 내놓았을지언정 그들 앞에서 당당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손에 넘어갈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그러나 잡혀 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사도들과 같이 배우지도 못한 소박한 시골뜨기가, 학문도 있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재판관들 앞에 나간다면 겁을 집어 먹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 시키십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 조용히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면 들어 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힘은 인간적인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다. 내가 무슨 힘이나 재능이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겠습니까? 그분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기록을 보면 아주 연약한 처녀들이나 천진난만한 아이들까지도 초자연적인 지혜에 가득찬 답변을 하여 재판관들을 당황케 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시는 분은 결국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믿고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제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교회사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천주교 신자인 자녀를 내치는 경우. 신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교하고서 다른 신자들을 밀고하는 배교자들. 하지만 끝까지 참고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분들은 구원을 받으셨고, 그분들의 신앙은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퍼져 감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으나, 일가족이 모두 신자가 된 집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생질인 푸라비우스 크레멘스를 죽게 한 도미시아누스 황제와 같은 예가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신자 가정에 들어가 신앙생활 하는 며느리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참으로 멋진 순교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커다란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피가 헛되이 흐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엎어 놓고 죽음 앞에 생명을 내던져서는 안 됩니다. 신중은 덕의 여왕입니다. 신중 없이는 덕도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현명하게 박해자들의 핍박을 벗어나셨습니다. 그들을 겁내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날까지는 그릇된 명예심이나 공명심을 위해 어리석게 목숨을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박해가 심하다 할지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 말씀을 음미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주어지는 시련들이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의 제자로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하기 위해 내가 닦아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을 잘하고 있으며, 어떤 것이 부족합니까?
2.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모욕을 당하거나, 거부를 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가령 “너나 잘해. 나는 나를 믿어. 하느님이 계시다면 내 앞에 나타나 보시라고 해봐. 이 다음에…” 이런 때는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