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성사-성서적 기초(그리스도교의 세례-신학적인 해석1)

 

2.7.2. 신학적인 해석


세례를 통해서 무엇이 실현되는가? 내적으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대화의 형식을 통해서 세례신학의 본질적인 요소를 밝혀 주는 사도행전 2,37-41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자.1)




2.7.2.1. 신앙의 표지


사도 2,37-41에 의하면 세례에 앞서서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끄는 성령 강림 사건과 베드로의 복음 선포가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성령의 작용과 복음 선포에 마음이 움직였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회개와 세례에로의 부름을 듣고 그렇게 한다. 이와 같은 점은 사도행적의 모든 세례 기사에서도 발견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성령의 작용에 의한 사건, 복음선포, 믿는 자세로 수용함, 세례. 복음선포-수용-세례라는 순서는 마르 16,16과 마태 28,19의 세례명령 기사에서도 나타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례는 신앙과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의 표지이다.


신약성서는 신앙과 세례 사이의 다른 관련점도 알고 있다. 바울로는 로마 6,1-14에서 세례받은 이들이 그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실재를 깨닫도록 이끌고 있다. 그들은 삶의 실천을 통해서 세례 때에 일어난 것을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 세례로써 그들 자신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통찰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세례는 깨달음과 신앙의 과정의 종착점이 아니라, 신앙인의 길은 세례 때에 일어난 것을 더욱 깊이 깨닫고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비슷한 것을 얘기하는 또 다른 성서 구절로는 1고린 10,1-13; 1고린 6,1-11; 1베드 3,13-21등이 있다. 여기에서도 세례를 신앙인이 되는 과정과 연결지어서 고찰하였다. 즉 이 대목들은 이미 받은 세례를 기억하면서, 세례가 거듭해서 다시 걷게 되는 신앙 도정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례와 신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결코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나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선포된 복음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표시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세례는 신앙을 전제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세례 받은 사람의 신앙은 세례의 체험과 세례 때 선사 받은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성장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식었던” 신앙이 이미 받은 세례의 은혜로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2.7.2.2.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2,38; 비교.10,48; 19,5) 이루어진다. 이로써 회개의 방향과 목표가 밝혀졌다: 회개는 본질적으로 메시아인 예수에게로의 전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가 정확하게 무엇을 내용으로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성서학은 여러 가지 해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모든 해석은 세례가 예수에게로 향하는 운동이고, 그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데에로 집중한다. 그리스도교의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짧은 정식으로 표현되기에, 이것이 세례로써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자신을 양도하여 그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울로는 이 생각을 로마 6,1-14의 훈계에서 특별히 부각시켜서 얘기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자유는 계속 죄짓는 것을 용인한다는 생각에 반대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라고 호소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고 변화되었다,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 난 이들”이 되었다(로마 6,13). 바울로는 이런 변화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관련 안에서 고찰한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운명 안으로 들어왔다. 바울로는 세례의 효과를 신약성서의 다른 증언들보다는 더 현저하게 밀접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연결짓는다. 그는 이 연결을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해방됐고, 그리스도가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그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단순한 모방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이다.)


이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수많은 “syn”-언사들이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었고”(로마 6,6),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로마 6,8), “함께 묻혔고”(로마 6,4), “그분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합치되었는데”(로마 6,5), 이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살고”(로마 6,8), “그리스도 예수 안에”(로마 6,11)살아 있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다 그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로마 6,3) 여기서 신약성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와 바울로의 정식 “그리스도 안으로 (향하여) 받는 세례”의 역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바울로의 표현은 세례자의 그리스도께 대한 자기 양도를 더 밀접하게 파악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하고 있고, 그의 운명에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부터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가까이 다가온 자신의 수난에 대해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으로 얘기한 것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마음 죄일는지 모릅니다”(루가 12,50). 마르 10,38에서는 같은 표현으로 제자들의 길에 대해 언급된다: “당신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의 길 (그리고 이 길을 추종하는 것)은 투쟁, 두려움 그리고 위험이 점철된 역사 안에로의 진입을 의미하고, 세례는 위험과 죽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상징의 말은 고난과 박해 그리고 어려움을, 인간을 멸망에로 위협하는 홍수와 비교하는 구약성서의 언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2)




2.7.2.3. 죄의 용서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받는다(사도 2,38). 죄의 용서는 사도행전의 다른 구절에서는 믿음(사도 10,43; 13,38 이하)과 회개(사도 3,19; 5,31; 26,18)와 연결되어 있다. 용서가 여기에서 세례와 연결되어 나타난 것은 믿음, 회개, 세례가 하나를 이룬다는 신약성서의 자명한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관련은 바울로의 회심을 전하는 기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고 당신의 죄를 씻어 버리시오”(사도 22,16). 여기에서 정화의 상징이 강조된다: 죄가 “씻겨진다”. “씻겨지고 거룩하여지고 의롭게 됐었다”(1고린 6,11)는 표현이나,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한다(에페 5,26)는 표현은 모두 직접적은 아니지만 세례를 가리킨다.




2.7.2.4. 성령의 선물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 성령 강림 기사의 맥락에서 성령의 선물은 우선 부활하신 분을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것과(사도 2,32),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하는 은혜(사도 2,4.8-11), 그리고 요엘의 예언에 상응해서 모든이에게 예언을 하는 은혜가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뽑힌 사람들만 아니라 모든 사람, 젊은이와 늙은이, 남종들과 여종들이 예언을 한다(사도 2,17 이하; 비교. 요엘 3,1 이하).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은혜를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특별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에 역점을 둔다. 성령이 선사된 것을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즉 “눈으로 볼” 수 있다(사도 8,18; 10,44-46); 이는 무엇보다도 이상한 언어를 말하고 황홀경에서 열광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에서 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작용은 교회론적으로 방향지워져 있다: 성령을 통해서 교회가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형성된다.


이미 바울로도 세례와 성령의 관련에 대해 얘기하였다: “여러분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씻겨졌습니다”(1고린 6,11). 그에게도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세례와 성령에 근거한다; 그러나 역점은 다르게 놓여 있다. 첫째로 바울로는 성령의 역사에 있어 기이한 면보다는 한 데로 모으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점을 강조한다(그래서 그는 예언의 은사를 방언의 은사보다 우위에 둔다; 1고린 14,1-25 비교). 두번째로 바울로는 성령을 통한 개개 신앙인의 내적인 변화를 더 생각한다(로마 5,5; 갈라 5,22). 세번째로는 언어적인 특색이 눈에 띤다: 바울로는 “영 안에서”(1고린 6,11; 12,13)의 세례라는 말을 한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하느님은 영은 세례를 통해 전해지는 선물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세례 사건을 위한 동력이요 場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 공동체와 신앙인 개개인을 완성하고 움직이듯이 세례 자체를 지탱하고 감싸고 꿰뚫고 있다.


세례와 성령이 근본적으로 함께 속하지만 세례 받았다는 것과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같지가 않다. 성령 강림 기사에 의하면 교회는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성립되고, 비로소 성령 강림이 세례를 가능케 한다. 이는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교회의 성사 행동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르넬리오에 관한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베드로가 아직 복음을 선포하고 있을 때에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려서 신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사도들은 성령께서 이미 이룩하신 것을 단지 성사적으로 만회할 뿐이었다.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지 못하게 누가 물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두 가지를 드러낸다: 하나는 세례와 성령이 근본적으로 한데 속한다는 것이고3), 다른 하나는 인간이 조정할 수 없이 놀라운 성령의 활동은 세례성사에 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사도 10,44-48). 분명히 이 이야기에서는 교회가 전혀 새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4), 성령을 통해서 특별한 자극이 필요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루가는 반대의 경우, 즉 세례를 받은 사람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경우도 전한다. 사마리아에서는 남자와 여자들이 필립보의 설교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되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로부터 파견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그들에게 안수를 하였을 때에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된다. “사실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지 않았고 단지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던 것이다”(사도 8,16).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하였는가? 분명히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와의 연계이다. 그래서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서 이 연계가 성립되었다(사도 8,14-17). 여기에서 루가가 얼마나 성령과 교회 공동체의 연계를 강조하는지가 잘 드러난다.


더 나아가서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선사받는 것이 성령을 소유물처럼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례를 통해서 선사된 성령을 통해서 교회는 형제적이고 연대적인 공동체가 된다 (사도 2,4.44 이하; 4,32-3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 내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활동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가 모범적으로 재산을 공유한다는 기사의 바로 다음에 루가는 재산을 속여서 보고함으로써 “성령을 속인”(사도 5,3) 부부 아나니아와 삽피라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세례만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사도들의 안수를 하였다는 기사에 바로 이어서 루가는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마술장이 시몬의 죄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는 “쓴 쓸개와 불의한 사슬 가운데”(사도 8,18-24) 있는 자로써 영적인 힘을 조작하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고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세례와 성령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밀접한 연결에서 독점성과 자동성이 유래하지는 않는다. 즉 교회가 세례성사를 집전하는 곳에만 성령이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세례성사 집행을 통해서 성령이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은 교회 공동체나 세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거기에 매어 있지 않고 자유로이 활동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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