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눈먼 인도자의 종말


<말씀연구>


예수님께서 오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대놓고 저주와 위협을 퍼 부으십니다. 많은 죄를 죄를 저지른 과거에 대한 저주이고, 장래에 대한 경고와 위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위선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위선자와는 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을 잘못 만나서 그렇게 위선자가 된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참 스승이신 예수님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참 스승으로 받들고 마음을 돌렸다면 정말 열심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가 다른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여기는 것들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신앙생활이 올바른지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행 중에 한 신자를 만났습니다. 식사시간에 그는 성호를 긋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왜 그었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황이 어려울 경우에는 허벅지에 작게 성호를 그어도 된다고 대모님께 배웠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그런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 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 가지 않으면서 들어 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 가게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위선자와 같은 뜻이 될 만한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랍비 나탄(기원전160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열 가지 위선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아홉 가지는 예루살렘에 있고 남은 하나가 다른 나라에 있다”자신도 랍비이면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그릇된 모범과 가르침과 협박으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막으며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자들은 비록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보다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서는 베드로사도에게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16,19)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소작인들이 소작권을 빼앗기고 포도원이 다른 백성에게 넘겨지듯이(마태21,43), 하늘나라의 열쇠도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만 합니다.




14 (없슈)


14절은 공동번역에 빠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극히 일부 사본에만 있는 것으로 아마도 후대에 필사하는 사람들이 마르12,40;루가20,47의 말씀을 이 자리에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영혼을 구하려고 찾아 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열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개종자란 다른 사람의 신앙과 확신에 설득된 사람을 말합니다. 개종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썩 기분 좋은 어감을 주지는 않지만 신약시대에는 상당히 일반적인 단어였으며, 상당히 무리 없이 쓰여지던 말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개종자들을 찾아 다닐 때 종교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개종자들을 자신들보다도 더 고약한 광신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라 멸망의 길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종자들의 말로는 뻔한 것입니다.


유다교를 믿게 된 이방인들은 그들의 행실을 모방하고 오만과 위선을 배우고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곧 이방인으로서 저지른 죄악에 유다교 신자로서 저지른 죄악을 덧붙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옥의 자식이란 말투는 지옥에 가게 될 사람이라기보다는 “지옥에 속해 잇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포교의 열성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대부 대모의 냉담을 통해 대자 대녀들이 입은 상처들이 생각이 납니다. 어렵게 신앙에로 이끌어 들인 대부 대모들이 그들의 부주의한 신앙생활 때문에 자신들도 냉담하고, 그 여파로 대자 대녀도 냉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자 대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 대모를 바꿀 수는 없나요?”




또한 영세를 시켜놓고 냉담시키는 사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신자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열심해 지게 만들려고 영세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각 단체에 들어가서 활동하게 만들고, 장을 시키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듯 합니다.




16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고 하니 17  이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황금이냐? 아니면 그 황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냐? 18  또 너희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고 하니 19  이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아니면 그 제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이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지켜야 될 맹세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산상 설교에서 배척하신(마태5,34-36), 쓸데없이 법적으로 따지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본보기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맹세를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더 나아가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성당에 신부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본당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성전을 신축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12월 24일과 25일에 장터를 열어서 그 기금으로 성전 건립기금으로 사용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덜 중요한 것과 더 중요한 것. 마음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재물에 마음이 가 있으면 외형적인 것에 마음이 가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 마음이 가 있다면 예수님 자체로 마음이 향할 것입니다.




20  사실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고 21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며 22  또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단과 제물을 구별하는 이 교활한 엉터리 이론에 어처구니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제단과 제물은 둘로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 대신에 여러 가지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두고”,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양식들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완곡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을 증인으로 직접 부르지 않게 되며 최소한 간접적으로 부르게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양식들 역시 하느님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경솔하고 부주의한 맹세들뿐만 아니라 모든 맹세를 금하셨습니다.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 우리의 말이 솔직하고 진실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오늘 이 말씀 중에 와 닿는 말씀은 어느 구절입니까?




2.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혼돈해서 행했을 때가 있었습니까? 지금 그 일을 다시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글은 카테고리: 지난 묵상 보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