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파

유다의 율법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여러 당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유다 사회는 바로 이 당파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다. 바로 들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흔히 나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루가는 이 집단들을 “당파(Parteī:그리이스어로는 haíresis)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세푸스도 이 집단들을 보통 그렇게 취급했다.

1.1.명칭
바리사이파 사람이란 명칭은 pārasch-p·rasch(분리하다.구분하다)란 낱말에서 유래했다. 이 동사는 성서에서 “명료하게 하다”(deutlichmachen)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래된 가설에 의하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본래 “(율법의)연구자, 해설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라삐문서에서 이 동사는 “대부분 구별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바리사이파인이 또 다시 “구별된 자”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성립 직전과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는 이 명칭이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제할 수 있다. 또한 바리사이파인들은 경우에 따라서 비이성적인 무리들을 심하게 비난하기는 하지만(요한7,49) 자신들을 스스로 민중들로부터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이 명칭의 본래적인 의미는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들의 부정과 가증스러운 것을 섬기는 세상의 민족들을 멀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리사이파인은 “청교도”라고 볼 수 있다.

1.2.사상
바리사이 사상은 정결이란 초월적인 개념을 그 특색으로 삼고 있다. 바리사이사상의 기본 이론은 계시 및 사회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정결 준수의 체계로 형성되었다. 이 정결 준수는 계약 사상의 실현을 위한, 종교적으로 진보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사회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느님은 성서와 전승과 율법학자들을 통해 정결의 규범들을 계시했으므로 바리사이파인들은 이 계시를 밝히고 사회에 유익이 되도록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모든 유다인들은 계약 백성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와 맺은 맹세는 바로 이러한 근본관념을 제시해 준다(느헤10,29-30). “주위의 다른 나라 백성들과 관계를 끊고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한 모든 사람들은 동족들 가운데 유력한 인사들의 뒤를 밀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도 하느님의 종 모세에게서 물려받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 우리 주 야훼의 계명과 법령과 규례대로 살기로 하고,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맹세했다.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레위적인 계약 백성의 정결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에즈라와 레위인들이 모범을 보였던 것처럼(느헤 8,7-9,13) 계명과 규례를 철저하게 통달하여 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주석적인 설명을 ‘미드라쉬’라고 한다.
바리사이파인들은 성서를 기본적인 법 규범으로 보아 이를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법규범으로서 성서의 기본자료들이 바리사이적 주석을 통해 점점 더 보충되다가 결국은 해석 전승 자체에 의해 즉 “조상들의 전통”으로 거의 대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통들과 권위들을 위해 성서를 상대화하는 경향은 여러가지 이유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예수의 반발을 초래했다.
바리사이파인의 본래적인 논점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삶의 상황에 적합한 성서구절들과 이 구절의 의미와 적용범위에 대한 권위적인 해석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바리사이 사상은 성서와 전통을 통해 하느님이 제시한 정결성을 계약 백성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은 행정과 재판과 율법 강의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레위인의 이념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동체도 형성했다.
바리사이파인의 의무에는 손을 씻는 것(마태15,2)과 계명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왼쪽 팔에 눈에 잘 띠는 기도문 조각들을 매달고 다녔으며, 옷단의 사방 구석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녔고(마태23,5),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많은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쳤다(마태23,23). 그 밖에 그들의 의무에는 특별한 안식일 식사(루가14,1)와 열심히 자선을 베푸는 일과 가문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바리사이파 공동체의 운동은 사랑의 나눔과 사회적인 성향을 강조했기에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계약백성이 성화를 통해 온전해지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사는 종말론도 내포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영혼불멸설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과 내세에 대해 가르쳤다.

1.3.예수에 대한 바리사이파인들의 반발
공관복음에 의하면 이 학파의 신봉자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많은 사람들에게 더 높은 계시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마태7,29;12,23-24) 예수가 바리사이파인들의 율법 준수 전통을 거부하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의 지위를 비판하는 것도 결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인들은 예수와 투쟁하기 위하여는 갈릴래에에서는 헤로데당(마르3,6)이나 사두가이파인(마태16,1)과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대사제들과 결탁하는 것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죽은 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먼저, 저명한 바리사이파 사람 교수 가말리엘 1세가 산헤드린에서 지도적인 사도들의 체포에 반대하고 나섰다(사도5,34). 그 후 그의 문하생 바울로가 대사제의 위임을 받아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광신적으로 박해했지만(사도 9,1-2;필립 3,5-6),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다(사도15,5). 그리고 그 후 산헤드린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바울로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사도 23,9).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사도시대에 산헤드린과 정부에 대해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아그리빠 1세 시대에 아주 막강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주후 50년 이후 민중들에 대한 영향력 가운데 일부를 젤롯당에게 넘겨 주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민족주의자들의 과격성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바리사이 사상은 그리스도교가 출현한 이후의 유다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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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유다의 율법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여러 당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유다 사회는 바로 이 당파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다. 바로 들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흔히 나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루가는 이 집단들을 “당파(Parteī:그리이스어로는 haíresis)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세푸스도 이 집단들을 보통 그렇게 취급했다.

    1.1.명칭
    바리사이파 사람이란 명칭은 pārasch-p·rasch(분리하다.구분하다)란 낱말에서 유래했다. 이 동사는 성서에서 “명료하게 하다”(deutlichmachen)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래된 가설에 의하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본래 “(율법의)연구자, 해설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라삐문서에서 이 동사는 “대부분 구별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바리사이파인이 또 다시 “구별된 자”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성립 직전과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는 이 명칭이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제할 수 있다. 또한 바리사이파인들은 경우에 따라서 비이성적인 무리들을 심하게 비난하기는 하지만(요한7,49) 자신들을 스스로 민중들로부터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이 명칭의 본래적인 의미는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들의 부정과 가증스러운 것을 섬기는 세상의 민족들을 멀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리사이파인은 “청교도”라고 볼 수 있다.

    1.2.사상
    바리사이 사상은 정결이란 초월적인 개념을 그 특색으로 삼고 있다. 바리사이사상의 기본 이론은 계시 및 사회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정결 준수의 체계로 형성되었다. 이 정결 준수는 계약 사상의 실현을 위한, 종교적으로 진보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사회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느님은 성서와 전승과 율법학자들을 통해 정결의 규범들을 계시했으므로 바리사이파인들은 이 계시를 밝히고 사회에 유익이 되도록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모든 유다인들은 계약 백성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와 맺은 맹세는 바로 이러한 근본관념을 제시해 준다(느헤10,29-30). “주위의 다른 나라 백성들과 관계를 끊고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한 모든 사람들은 동족들 가운데 유력한 인사들의 뒤를 밀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도 하느님의 종 모세에게서 물려받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 우리 주 야훼의 계명과 법령과 규례대로 살기로 하고,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맹세했다.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레위적인 계약 백성의 정결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에즈라와 레위인들이 모범을 보였던 것처럼(느헤 8,7-9,13) 계명과 규례를 철저하게 통달하여 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주석적인 설명을 ‘미드라쉬’라고 한다.
    바리사이파인들은 성서를 기본적인 법 규범으로 보아 이를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법규범으로서 성서의 기본자료들이 바리사이적 주석을 통해 점점 더 보충되다가 결국은 해석 전승 자체에 의해 즉 “조상들의 전통”으로 거의 대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통들과 권위들을 위해 성서를 상대화하는 경향은 여러가지 이유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예수의 반발을 초래했다.
    바리사이파인의 본래적인 논점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삶의 상황에 적합한 성서구절들과 이 구절의 의미와 적용범위에 대한 권위적인 해석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바리사이 사상은 성서와 전통을 통해 하느님이 제시한 정결성을 계약 백성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은 행정과 재판과 율법 강의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레위인의 이념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동체도 형성했다.
    바리사이파인의 의무에는 손을 씻는 것(마태15,2)과 계명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왼쪽 팔에 눈에 잘 띠는 기도문 조각들을 매달고 다녔으며, 옷단의 사방 구석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녔고(마태23,5),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많은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쳤다(마태23,23). 그 밖에 그들의 의무에는 특별한 안식일 식사(루가14,1)와 열심히 자선을 베푸는 일과 가문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바리사이파 공동체의 운동은 사랑의 나눔과 사회적인 성향을 강조했기에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계약백성이 성화를 통해 온전해지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사는 종말론도 내포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영혼불멸설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과 내세에 대해 가르쳤다.

    1.3.예수에 대한 바리사이파인들의 반발
    공관복음에 의하면 이 학파의 신봉자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많은 사람들에게 더 높은 계시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마태7,29;12,23-24) 예수가 바리사이파인들의 율법 준수 전통을 거부하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의 지위를 비판하는 것도 결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인들은 예수와 투쟁하기 위하여는 갈릴래에에서는 헤로데당(마르3,6)이나 사두가이파인(마태16,1)과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대사제들과 결탁하는 것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죽은 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먼저, 저명한 바리사이파 사람 교수 가말리엘 1세가 산헤드린에서 지도적인 사도들의 체포에 반대하고 나섰다(사도5,34). 그 후 그의 문하생 바울로가 대사제의 위임을 받아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광신적으로 박해했지만(사도 9,1-2;필립 3,5-6),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다(사도15,5). 그리고 그 후 산헤드린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바울로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사도 23,9).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사도시대에 산헤드린과 정부에 대해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아그리빠 1세 시대에 아주 막강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주후 50년 이후 민중들에 대한 영향력 가운데 일부를 젤롯당에게 넘겨 주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민족주의자들의 과격성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바리사이 사상은 그리스도교가 출현한 이후의 유다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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