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사상적, 사회적, 정치적인 이유에서 탄압을 받았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유교의 양반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마찰을 빚었고, 사회적으로는 천주교 신자들이 제사를 거부하여 전통적 사회질서에 위협을 가져왔다는 것과 정치적으로는 당파 싸움의 방편으로 천주교가 이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난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해교난(1791년)
신해년에 일어난 첫 교난은 전라도 진산에서 윤치중(바오로)와 그의 외사촌 권상연(야고보)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버린 사건이 발단이 됩니다. 그 당시 조정에는 어진 임금 정조와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홍낙안과 남인의 우두머리로 채재공이 좌의정으로 있었습니다. 홍낙안은 이 사건이 발각되자 채제공에게 그들을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잠시 피신하였다가 자수하였고, 결국 전주에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홍낙안은 반대파인 채제공을 꺾기위해 사건을 확대시켜 이승훈, 권일신 등 신자들으 벼슬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거나 죽였습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수는 늘어나서 1794년에는 경상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전국의 신자수가 4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 신유교난(1801년)
정조 임금때는 큰 박해가 없었으므로 주문모 신부의 활약으로 신자수가 1만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김씨가 실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안동 김씨 일가는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주문모 신부와 3백여명의 신자가 순교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후 1834년에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때까지 조선교회는 성직자가 없는 교회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활약으로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빠리 외방전교회가 전교를 맡게 되자 교회는 새로운 활기를 찾게되고 신자들 수는 9천명에 이르게 됩니다.
3. 기해교난(1839년)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헌종의 회조부이며, 벽파인 조만영이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다시 천주교를 탄압합니다. 또한 외국인 선교사를 처단하려는 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여 성직자 3명과 2백여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척사윤음’을 반포하고 천주교가 사교라고 종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탄압을 가하였습니다. 당시 신자수는 약 1만명정도였고 예비자가 6백명이었습니다.
4. 병오교난(1846년)
1845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최초의 한국인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대건 신부는 귀국한지 1년도 안되어 체포되어 1846년 1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조만영이 죽고 헌종이 승하하자, 철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그 후 10여년간 교회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보임에 따라 열 두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활동을 펴게 되고 신자수는 2만 3천명에 이르게 됩니다.
5. 병인교난(1866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였습니다. 당시 조정의 대다수 인물들이 외국 세력에 대항하여 천주교를 박해하였으며,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하여 천주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그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확고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의 탄압은 유례없는 대규모로 아홉명의 성직자와 8천여명의 신자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조선 교회는 성직자가 없었습니다. 한편 이소식이 서양에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조선 신자들의 순교정신을 찬양하며 기도해 주었고, 교황님도 격려의 교서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때의 순교자들 중 24위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 성인품이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이나 크리스챤으로서 만은 이들의 신앙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이들에게 교회가 공적인 조사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성인임을 선포하는 것을 성인품에 오른다고 합니다. 성인품에 오르기 전 단계를 복자품이라고 합니다.
박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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