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의 백서..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죄인 도마 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하옵니다. 지난 봄에 그 곳에 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와 주교님께서 안녕하시다는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 후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이미 해가 저물게 된 이 때도 기체 만안하신지 살피지 못했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교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주님의 넓으신 은혜를 충만히 받으사 덕화가 날로 높아지실 것이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여 마지
아니 하옵니다. 죄인 등은 죄악이 많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의노를 범하고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 아래로는 사람들과 의논조차 못한
채 박해만 크게 일어나게 하여 그 화가 신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리고 죄인 등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도 스승과 함께 목숨을 버려
주님께 보답하지도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감히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리이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교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여 있고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는 고통을 겪고 있으나 어지신 아버지를 이미 잃은지라 그를 붙들고 부르짖을 길이 없고 진실한 형제들은 사방에
흩어져 서로 의논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주교님께서는 온정 깊은 부모를 겸하시고 사목의 책임을 지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 우리들은 다른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제 박해의 전말을 대강 아뢰고자 하오나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또 그 실마리가 하도 복잡하여 한꺼번에 진술하기가 어려워 다음에 자세히 적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살펴 주옵소서. 현재 교회 사정은 말이 아니옵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죄인이
요행화를 면하였고 요왕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라에 주님의 은총이 아주 끊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오호 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명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이 오나 재능이 적고 힘이 약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세명의 교우가 비밀리에 모여 당면한 문제들을 의논한 결과 그동안 속에 품었던 사정을 일일이 아뢰
오기로 하였으니 읽어 보시고 이렇듯 외로운 자들을 가엾게 보시어 조속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기를 바라옵니다. 죄인 등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떠돌이가 되어 길에서 헤메면서도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체 흐느끼고 있습니다.
실로 목이 메고 가슴이 쓰라리고 뼈가 저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주님의 전능과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들여 빌어주시고 자비의 정을 크세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물불속에서 건져 주시고 가족들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날 성교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그 성덕을 노래로 읊지 아니 하는 이 없고 그 영적 감화를 기뻐하며 흥겹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먼 끝에 사는 백성들이라고 해서 어찌 주님의 자식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지방이 멀고 궁벽하여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또 그들의 기질이 약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운데다 10년 동안이나 갖은 풍파로 눈물과 불안 속에 지냈기에 금년의 박해는 얼마나
참혹한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처해질 수가 있습니까.
이 난이 비록 끝 난다 하더라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쯤 미치고 보니 간장이 서늘합니다. 중국과 서양 교우들이 우리들의 이 위기와 고통을 듣는다면 어찌 동정하지 아니 하리이까. 감히
바라옵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쓰셔서 세계 각국에 알려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은 성교회가
그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어 죄인들을 간절한 희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죄인들은 가슴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려 울며
이 어려운 사정을 피력하오며 목을 늘이고 발돋음을 하여 오직 반가운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립니다. 주교님께서는 죄인들이 드리고 싶은
말씀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함을 가련히 여기소서. 을묘년(一七九五)에 주 문모 신부를 잡으려다 놓친 후부터 선왕의 의심과 두려움은
날로 깊어져 남모르게 수사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신부의 잠적을 알아내지 못하자 조 화준이라는 자를 시켜 겉으로는 교우인 체 꾸며 충청도
일대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드디어 기미년(一七九九)겨울 청주에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충청도의 열심한 교두들은 거의다 잡혀 죽었습니다.
최 도마 필공은 중인 계급의 사람으로서 성질이 곧고 의지가 굳세고 정의로운데다 재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이 대단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풍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유년(一七九一)박해때 불행히 유혹에 빠져 배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몹시 기뻐하여 그를 장가
들게 하고 벼슬까지 주니 도마는 하는 수 없이 다 받아들이긴 했지만 근년에 와서는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과거의 잘못을 몹시 뉘우치며
항상 몸을 받쳐 속죄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미년 八월에 선왕이 뜻밖에 그를 형조로 불러 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받드느냐 고
물으시매 도마는 자기가 바랐던 대로 이제야 죽게 되었구나 하고 충효에 대한 성교의 도리와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솔직히 진술하였더니 그 말이 빛나게 밝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법관은 몹시 놀라고 분통이
터져 진술사항을 그대로 임금께 보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내리지도 않고 아무런 판결도 없이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왕께 상소문을 올려 도마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여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리 말딩 중배는 소론의 一명(첩의 자식의 칭호)으로 경기도 여주에 살았는데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고 지조가 쾌활하였습니다. 원래 김 건순과 생사를 같이 하리만치 가깝게 사귀어 왔었는데 건순이 성교를 믿게 되자 말딩도 그를
따라 믿고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불같이 뜨거웠고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대담하게 행동했으며 남들이 자기의 믿음을 눈치를 챌까봐
무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신년(一八OO)부활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에 모여 앉아 높은 소리로 희락삼종(부활절에
바치는 三종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또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는
놀이를 날이 저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원수진 집의 밀고로 그는 한사람의 교우들과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이도 있었지만 말딩의 격려와 권면에 힘을 입어 혹독한 형벌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모두 한결같이 버티어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다들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말딩은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였는데 옥에 갇힌 후 혹시 병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런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여 주어 낫지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 멀고 가까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옥문 밖은 늘 장날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고을 군수도
금할 도리가 없었고 자기도 병이 나면 와서 약 처방을 얻어 갔습니다. 이래서 옥중 살림이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김 건순은 사람들이
혹시 말딩의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과하다 할까봐 열명중에 여덟 아홉 명은 고친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감옥의 관리가 의서를 좀 보여 달라고 하니까 그는 내게는 의서는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요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 싶거든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으로 배운단 말이요 하니 말딩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불타지 않는 책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계몽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에 족하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갇혀 있던 원 요왕에게는 한 늙은 여종이 있어 늘 옥에 찾아와 돌보아 주면서 집안의
따분한 형편을 늘어 좋으며 배교하기를 꾀었었는데 요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할멈의 말이 하도 처참하고 간절하여
요왕도 번민을 하며 마음의 동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을 알아 챈 말딩이 그 할멈을 노려 보았더니 할멈은 겁이 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물러가고는 다시는 옥에 찾아오지도 않고 후에 이생원의 눈빛이 하도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말딩은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설명하여 사람들을 권유하였는데 간수 한 사람도 감화되어 교를 믿었으며 나중엔 매우 열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 철신은 남인측 대가의 자손으로서 경기도 양근군(오늘의 양평군)에 살았는데 그는 평소에 경서와 예서로 세상에 이름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시 이름 난 집안이라 남들의 비방도 대단하였습니다.
그 아우 일신이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계명을 터놓고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그를 원수같이 취급하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하여 을미년(一七九一)여름에는 드디어 그의 고향의 고약한 귀신 같은 놈들이 터무니 없는 죄를 꾸며 관청에 고발까지
하게 되었고 이에 권씨 집안의 자체들도 맞서 대항하게 되었으므로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처리하여 싸움은 거기서 중재되었고 고발 내용이 사실 근거가 없다는 것도 판명되어 간교한 모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간교한 모략을 비밀리에 계속하여 서울에 있는 악질 관리들과 결탁하여 경신년 (一八OO)五월에는 선왕을 직접 뵙고 양근땅에는
그 고을에 사학이 한창 성행해서 아니 배우는 사람이 없고 안 믿는 동리가 없는데도 군수란 자는 태평세월로 사찰조차 아니 하니 이
군수를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 고 아뢰었습니다. 선왕이 그 보고를 듣고는 옳다고 판단하여 양근 군수를 인책 사임시키고 새 군수를 부임시키니
그는 부임하자 곧 묵은 사건을 끄집어 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늙고 겁이 많은 철신은 서울로 올라가서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군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기어이 철신을 불러 들이려고 하여 사건은 오래도록 종결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선왕은 성교에 대하여 의심이 많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는 본래 무슨 사건이든 크게 확대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신부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관계되는 일이라
만일 드러나면 그 처리가 매우 곤란하겠으므로 을묘년 후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금하라고 여러번 청하였으나 일체를 말단 관리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간섭하지 아니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지방의 박해는 비밀 지령이 아닌 것이 없었고 일부러 아니 한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놓고 몰래 신부를 체포하여 암암리에 결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미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 여삼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삼형제가 다 성세를 받고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 와 살고 있었는데 여삼은
근년에 와서 냉담을 하고 배교까지 하더니 부랑자들과 어울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두 형들도 이것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리 안정이라는
사람도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약간 있는 자로서 여삼이와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가난하여 늘 안정에서
돈을 좀 돌려 주기를 바랐지만 안정은 그가 달라는 대로 다 들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삼은 늘 안정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갈고 있던 중 그는 안정이가 늘 성사를 받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만일 신부가 안정에게 재물을 내게 좀 나누어 주라고만 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테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는 그 말은 신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안정이가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자 이것은 신부가 안정에게서
부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트집을 잡아 이젠 그 분풀이를 신부께로 돌려 모략으로 해치고자 신부의 동정을 살펴 포도부장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五.六년동안나 수사를 해도 알아내지 못했던 신부의 정체가 알려지니 이 말을 들은 포도부장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너를 봉급이 많은 관직에 추천해 주겠다고 하며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부는 골롬바의 집에
있었는데 여삼이는 이것까지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부장더러 아무 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알려 주겠다 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삼이는 약속한 날이 이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집에 돌아 올 수 없게 되어 부장은 헛걸음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사정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안정더러 돈 수십냥 쯤 가지고 가서 여삼이와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삼의 원한과 분노는 잠시 누그러졌고 또 며칠 안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매 각 관청에선 일이 분주하여 사건은
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삼은 이미 신부를 밀고한 뒤요 또 자기로서도 이제는 어찌 할 수 없게 되어 늘 악질분자들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기어코 흉악한 짓을 끝까지 저지르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나라의 양반들은 二OO년 이래 당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복의 네 당파가 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또 두 파로 갈라져 그 한파는 리 가환 정 약용 리 승훈
홍 낙민 등 몇몇 사람들로서 이전엔 모두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을 아껴 배교한 자들입니다.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를 해치는
척 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믿음 속에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은 수가 적고 그 세력이 외롭고 위태로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은 홍 의호 목 만중 등 진짜로 성교를 해치는 자들인데 一O년 이래 양편은 서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노론도
또 갈라져 두 파가 되었는데 시파(時派)라는 것은 모두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선왕의 신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모두 당론을
고수하여 임금의 뜻을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같이 지났으나 당원이 많고 세력이 크므로 선왕도 두려워하였고 근래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리 기호나은 문장으로 세상을 뒤흔들었고 정 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누구보다도 뛰어 났으므로 을묘년 이전에는
선왕이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후로는 차차 멀어져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벽파에서는 이 두사람을 몹시 꺼려하여 기어코 해치려고
했습니다. 가환 등이 배교하고 성교를 해치는데도 벽파에서는 그를 사당으로 몰고 별 병 중상과 공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번번이
그들을 감싸주므로 벽파에서 마음대로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선왕이 돌아가시자 그 뒤를 이은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조모요 본래 벽파 출신으로 그의 친정이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 당했던 터이라 여래 해 동안 품었던
원한을 풀길이 없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벽파를 끼고 학정을 펴 경신년(一八OO) 十一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한쪽으로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 내 조정을 반이나 비게 하였습니다. 또 전부터 선교를 박해하던 악당들은 벽파와 계속 서로 연락을 취해
왔었는데 세태가 크게 변하자 요란스럽게 들고 일어나 큰일을 저지를 기세를 보였습니다. 경신년 四월에 여러 교우들이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신공을 부지런히 하고 회원 아닌 사람들은 움직여 자진하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는데 힘을 썼으므로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회두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는데 부녀자가 삼분의 이요 무식한 평민이 삼분의 일이고 양반집 남자들은 이 세상의 화가 무서워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습니다. 을묘년(一七九五)박해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공이 컸고 재능이 출중했으므로 신부는 모든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심히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들이 입교하는 예가 아주 많아 졌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이 역적이 아닌 이상은 양반의 집안 부녀자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부도 이점을 이용해서 선교를 널리 현양할 근거를 삼고자 하여 그네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매 교회안의 대세는 모두 부녀자 교우에게로
돌아 갔고 이러한 인연으로 선교의 소문이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책 문제로 되어 있으므로 새 임금이 즉위하면
반듯이 먼저 어떤 조처가 있을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것이 무었일지 몰라 신부는 더욱더 조심하고 교우들도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였습니다.
十二 월十七일 형조에서 포졸을 보내어 최 도마를 체포하여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미결중에 있었으므로 이번 체포된 일은
뜻밖의 일이 아니요 또한 그때는 성교를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 조정에서는 아직 금령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교우들은 경계는 했었지만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었습니다. 十九일 성모 자헌 첨례날 새벽 최 도마의 종제 최 베드루가 길가에 있는 약방의 안방에서
몇몇사람과 함께 경문을 통경하고 있었는데 마침 창문 밖에서 투전(투전이란 노름의 이름인데 부랑자들이 돈을 걸고 노름을 하므로 사법부가
이를 금지 하였음)을 단속하는 관원들이 지나가다가 창문안에서 가슴을 치는 소리가 나자 투전 던지는 장단소리로 생각하고 창문을 열어
제치고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투전을 발견하지 못하자 각자의 몸 수색을 하여 첨례표 한 장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몰라
이것이 무었인지 알수가 없자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 보였더니 그것이 곳 성교에 관계되는 그림임을 알려주어 그들은 다시 교우들을
잡으러 돌아왔었는데 그러나 이미 날이 밝아 다른 교우들은 다 흩어져 달아났고 최 베드루 와 오 스더왕만이 붙잡혀 관청으로 끌려가
도마와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포도부장들은 김 여삼이와 부랑배들을 끼고 그들을 정보원으로 삼아 아니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교우들을 찾아다니메 교중이 물결일 듯이 요란했으나 마침 세모가 되어 사태가 잠시 잠잠해 졌습니다. 그러나 정월 초아흐레
총회장 최 요왕이 잡히고 나서 부터는 부장들이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잡아간 사람들이 두 포도청(자포청 우포청이 있음)에
가득히 찼는데 모두들 무식하고 또 새로 입교한 사람들과 여염집 부녀자들이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十一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상교를 엄금하기를 선왕이 늘 말씀하시되 참다운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 하셨는데 이제 듣건데
사학이 여전히 수도로부터 경기와 충청지방에 이르기 까지 기세를 보인다 하니 어찌 소름이 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서울과 지방에
다섯집씩 통합한 통반제도를 엄격히 세워 그 통에 사학을 하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청에 고발하여 징계하게 하라 그래도 뉘우치지 아니하면
반역죄를 적용하여 모조리 사형에 처하여 씨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고 하니 각처가 소란하여 지고 환란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 교우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명도의 회장 정 아오스딩은 정 약용의 셋째 형으로 본시 양근서 살다가 경신년(一八OO) 五월 박해때에
온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벌써 사학자로 비방을 받아왔던지라 그해 여름에 한 악질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적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화를 면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사태가 이미 변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도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성물과 서적과 신부의 편지등을 농속에 넣어가지고 다른 집에다가 맡겨두다가
그집도 곧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 본집으로 도로 가져다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무서워서 임 도마라는 사람을
나무장사로 꾸며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가지고 十九일 해질녘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나무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한성부에 밀도살 감시원이 이것을 보고 몰래 잡은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이나(무허가 도살은
엄금하였음) 그사람을 관청으로 끌고가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서적과 상본과 신부의 편지였는지라 부윤(俯尹)이 크게 놀라
그농과 사람을 포청으로 압송하니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어 환란이 더욱 확대 되었습니다. 책과 농이 압수당하자 교우들은
놀라 조석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만 十O여일이 지나도록 잠잠하고 아무 동정이 없더니 二월초에 포도대장 리 유경이 정근되고 신임된
신 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했던 배교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최 도마형제와 최 요왕과 임 도마만을 석방하지 않았는데 이들을 때려 죽이려
한다고도 하고 멀리 귀향보내기로 방금 의논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검거가 잠시 그치니 교우들이 기뻐하며 이대로 계속해서 무사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때에 소북의 박 장설 노론의 이 석우 남인의 최 현중 등이 잇달아 성교를 몹시 헐뜯고 반역죄로 처벌하기를 청원하며
아울러 신 대현이 교우들을 가볍게 처리한 것을 죄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대비가 크게 노하여 대현을 잡아 가두고 이사람을 금부로 옯겼습니다.
이나라 국법에 조정의 관리와 역적은 군부에서 처리하고 포도청에서는 도적들만 취급하고 평민의 범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평민이지만 포도청에 속하게 되어 도적으로 처단되어야 하는 데 금부로 옮긴 것은 역적으로 처벌하려고 한 것입니다. 二월 초아흐렛날
리 가환 정 약용 리 승훈 홍 낙민을 금부에 가두고 十一일에는 권 철신과 정 약종을 체포하고 포도청에 엄명을 내려 전에 석방한 사람들까지
재구속하게 하고 여주와 양근에 가둔 사람들을 금부에 올리도록 하니 경향에 이름있는 교우들은 한 사람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포졸들이 깔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밤낮 그치지 아니 하고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도 만원이 되어 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二四일에는 골롬바의 온가족이 체포되고 이어 양반집 부녀자들도 제법 많이 체포되었으나 상세한 것은 잘 듣지 못했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관가에 이르자 관원이 농 속에 든 책들에 대해 그 내력을 물으니 아오스딩은 다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원이 농 속의 편지를
내 놓고 하나하나 캐어 물었으나 아오스딩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이 사람을 그 가족에게 보내어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신부의 성명과 있는 곳만 알리면 절대로 죽을 리가 없는데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아니 하니 너희들 가족은 틀림 없이
알고 있을 터이니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 대로 말하라 고 하였으나 가족들도 한결 같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회의를 열어 대역부도 죄로 판결하고 二六일에는 아오스딩과 최 요왕 최 도마 홍 방지거 사베리오 홍 낙진 리 승훈 여섯 사람들을 목을
베어 죽이고 그 후 아홉 사람 역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그 중 여자 세사람이 있었지만 가운데 한 사람 골롬바를 제외하고는 다른 두
여자와 남자 여섯명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최 베드루 등이 아닌가 하지만 전해들은 말이 정확하지가 않아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여주와 양근에 갇혔던 사람들도 모두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일일이 아뢸 수가
없습니다. 총회장 최 요왕 창선이는 중간계급 출신으로 을묘년에 순교한 최 마디아의 조카이며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였고 몸가짐이 평화스럽고 언행이 공정하여 二O년을 하루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외모가
순수하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정의로와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곤란을 당하거나 혹은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할 때면 그의 얼굴만 한
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 그의 말은 두어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 졌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명백하여 재미가 있으므로 비록 듣기 좋게 말할 생각이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즐겨 들으며 싫증을 내지 아니하고 또한 그 말이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사람들이 받는 신익이 컸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나는 점도 없고 꼬집어낼 결점도 없었습니다. 그는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모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은 그를 관천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조 화진이 충청도를
수색할 때 관천이가 교우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할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최 요왕은 박해가 장차 커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에 피해 있다가 신유년(一八O一)정월 초닷새날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조섭하던 중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 여삼이 포도부장을 데리고 와서 집을 둘러싸고 체포하는 바람에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一O여일 후 치도곤으로 열 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는 동안에는 기절하여 죽어 엎드러진 것 같았으나 매질이 끝나고 관원이 그의 죄목을 셀 때면 그는 벌떡 일어서서
성교의 一O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관원의 말이 네가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는 잘 생각해
보시오 밤에 잠이 든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 하오 그렇거늘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니 관원도 대답을 못하고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더니 그 후
정 아오스딩과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四三세이었습니다. 정 아오스딩 약종은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고 상세하고
치밀함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선도(仙道)를 배워서 오래 살뜻이 있어 천지 개벽설을 그릇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다시 변하는 때는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짐을 면치 못할 터이니 이것 역시 결국 길이 사는 길이 아니니 배울 것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성교의 도리를 듣게 되어 독실히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그의 형제와 친구들은 모두 움츠려졌으나
그만은 유독히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속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리를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여 비록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괴로움은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도리의 한 끝이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과 음식의 흥미마저 잃은 듯 전심전력
연구하여 반드시 해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 하고 우몽한 자를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피로하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실증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 깨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무식한 교우들을 위하여 이 나라의 언문으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성교의 여러 책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 까지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의심나거나 모호한 대가 없었습니다. 이 책이 이 나라에서 목초나 땔나무 보다도 더 중요하다 하여 신부는 간행을
인준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의 학문 연구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어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나 하고 나서는 곧 도리 강론을
펴 놓고 날이 저물도록 계속해 다른 이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혹 자기가 모르던 도리 한두 가지를 알아 깨닫개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혹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 하면 딱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척척 풀어주어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 놓아도 가려내는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뀜이
없었으며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으며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소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덕망은 관천만 못하였으나 도리에 밝기는 그보다 훨씬 더 낳았습니다. 그는 또 천주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광범하고 방대하여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총론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가려 뽑아 부분별로 구별한 것을 한데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제명을 <성교전서>라 하여 후배들에게 남겨 주려고 하였으나 그 책의 초를 절반도 답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자 관원이 국왕의 명을 거스렸음을 문책하니 그는 성교의 진실한 도리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밝혀 말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크게 노하여 국왕의 명령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역죄를 선언하였습니다.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위에 올라 처형장에 갈 때에도 그는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은은 당연한
일이요 공심판 때 우리들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요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웃지들 마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이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를 본받아 이 후 이렇게 하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처형장에서 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었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은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엎더졌습니다. 최 도마와 함께 처형되었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四 二세 이었습니다. 최 도마는 병이 많았고 옥중에서
오래 시달려 지쳐서 수레에 오르자 곧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형장이 가까워 오자 비로소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나타났으며 그는 맨 먼저
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五六세 이었습니다. 홍 사베리오 교만이는 권 철신의 외숙으로 경기 포천현에 살았으며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만년에는 경학(經學)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이 입교하자 그도 따라 믿게 되어 관계(官界)에 나설 뜻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이웃 사람들을
권유하자 그들을 감화시켜 온 고을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이 아오스딩에게 시집을 가자 그로 인해 남들의 비방을 받게 되어 드디어
체포되어 치명하였습니다. 홍 바오로 낙민은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으로 젊어서 진사시헙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한 후 리 승훈 정
약종과 어울려 갑진년(一七八四)과 을사년(一七八五)사이에 성교를 믿고 봉행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하고 도리에 밝아 교중 사무를 잘
보아 칭찬을 받았으나 남의 이목을 거려 계속 과거를 보아 기유년(一七八九)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詞諫院)정언(正言)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는 선왕이 억지로 배교를 명하니 나쁜 표양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배교한 자들은 전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데 비해 바오로만은 신공 드리고 재지키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을유년(一七九五) 성사 볼 때가 이르러 보례하고
고해성사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판공때가 오기 전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성명이 한 영익이란 자의 고발에 들어 있어
선왕이 또 배교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외출했을 때는 세속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을미년(一七九九)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이르러선 열심히 약간 일어나 앞으로는 전심으로 주님께
귀화할 작정이었는데 이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옥 안의 사정은 엄격한 비밀에 붙어져 있으므로
자세히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죄목이 본래 큰 것이 아니었으니 만일 관청에 이르러 배교만 하였더라면 죽지는 않았을텐데 참수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가 성교에 어긋난 일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리 승훈 베드루는 이 가환의 생질이요 정 아오스딩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고 학문궁리를 좋아하여 선비 리 벽이 크게 기특히 여겼습니다. 그 때 리 벽이 성교의 서적의 비밀히
읽고 있었으나 승훈은 아직 이를 몰랐습니다. 계묘년(一七八三)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매 리 벽이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 서양 전교사들이 있었으니 찾아보고 신경 한부룰 얻은 후 동시에 성세 받기를 청하면 서양 선비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할 것이니 신기한 물건과 패물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고 빈 손으로는 돌아오지 말라 고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상세를 청하매 여러 신부들이 영세하기에 필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영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량
신부가 힘써 우겨 성세를 주고 또한 성서도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에 돌아오자 리 벽 등이 놀라 함께 전심전력으로 그 책을 읽어 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고는 가까운 친구들을 권유하여 당시 이름 난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훈을 추대하여 영수로
세웠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약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를 봉행하였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一七九O)가을에는 벼슬을 주어 평택 현령까지 지내게 하자 그는 신해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는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 받기를 준비했으나 며칠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매 승훈은 두려워 다시 움츠려들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성서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이 성교를 공격하고 배척할 때에는 반드시 승훈에게도 그 죄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왕은 그를 두호 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혹 옛 가까운 친구를 만나면 옛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다가 화를 당하였는데 그는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선종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가환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하매 풍채가 늠름하고 도량이 크고 문장으로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아니 읽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강하여 신과 같았습니다. 또 천문과 기하학에도 정통하였는데 일찍이 그는 탄식하기를 이 늙은 몸이 죽으면 이 나라에는 기하학의 씨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기학(理氣學)을 약간믿던 그는 천체를 둘러보며 마음 속으로 이처럼 웅대한 조직에 주재하는 이가
없다 하리요 하고 감탄한 적도 있었습니다. 三O세가 넘어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니 선왕이 그를 인물로 중히 여겼습니다. 갑진
을묘년(一七九四,一七九五)무렵에 리 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책하여 말하기를 나도 서양 서적 몇권을 읽어 보았는데(자기
집에<직방외기><서학범>등이 있었음) 기이한 글이요 궁벽한 저술에 지나지 않고 다만 내 식견을 넓히는데 그쳤는데 어찌 족히 인생을
안정시키고 인명을 확립시킬 수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리 벽이 이치를 따저가며 답변하니 가환이 그의 말에 굴복하여 드디어 책을 구해다
비밀히 읽었습니다. 리 벽은 그에게 초보 입문서 몇 권을 주었는데 그 때 (성년광익,聖年廣益.)한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영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 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가환이 기어코 싸우다시피하여 그 때 있던 성교 서적을 모두 가져다가 정신을 쏟아 거듭 읽고
또 읽어 믿기로 결심하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진리요 정도로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서적 가운데 쓰인 말은 전부 하늘을 모함한
것이요 하늘을 소홀히 여긴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서양 바다를 건너와 이렇게 전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벼락을 맞아 죽었으리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 저녁으로 리 벽 등과 비밀히 희합하여 열심히 대단하였습니다. 이
때 리 승훈 등이 망녕되게 함부로 성사를 집행하였는데 가환은 남에게 권하여 그 들에게서 성세를 받도록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자신은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서양 사람들에게 성세를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세태가 어려워지자
그는 마침내 모든 신공하기를 그쳤는데 그 때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환의 사돈과 일가 친척들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악한들이 항상 그를 불러 교주라고 규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신해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교우들을
많이 해침으로써 자기 변명의 계책을 삼았었는데 교우들에게 도둑 다스리는 형법을 맨 처음 적용한 이도 가환이었습니다. 신해년 이후
선왕이 남인을 많이 기용하자 가환은 그 세력을 타 여러 벼슬을 지내고 공조판서에까지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을묘년에 새 사람이 순교한
후 악한 무리들이 신부의 사정을 모르므로 그 죄를 리 승훈과 리 가환에게 뒤집어 씌어 잇달아 상소하고 공격하매 선왕도 할 수 없이
리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가환은 좌천시켜 충주 목사를 시켰습니다. 충주엔 마침 한 교우가 있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려 억지로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교우들에게 주리형을 처음 사용한 이도 가환이었는데 주리란
도둑을 다스리는 독특한 형벌입니다. 그는 또 관의 기생을 첩으로 삼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다 자기에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버림을 받아 다시는 등용되지 아니 하여 집에서 글이나 읽고 쓰면서 스스로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원래
신앙이 깊어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들을 권화하였는데 가끔 서책이 탄로가 나도 가환은 조사하거나 금하지 않았습니다. 가환은 무오(一七九八,一七九九)사이에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신념을 은밀히 말하기를 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것과 같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일어나는 것이니 상감이 아무리 금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아직도 자기는 염려 없다고 믿었으나 옥의 일을 보는 자들이 다 평소에 원수처럼 미워하던 자들이라 기어코 사지에 몰아 넣으려고 하여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자 변치 아니하여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다가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때 나이는 六O세였습니다.
여섯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 권 철신도 역시 매를 맞고 순교하였는데 그가 착하게 잘 죽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사오니 탐지하여
알려 드릴때까지 기다려 주시옵소서 최 베드루는 필제는 (字)가 자순이요 도마의 종제로서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 약종상을 하여
생활을 했는데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 모두 그를 신용하였습니다. 진실하고 충직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바라다 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어진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도마는 의지가 굳고 성품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베드루를 항상 우러러 보고 어렵게 대해 비록 나이로는
아우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문의한 다음에야 행하였고 자기 나름대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도마에게는 친 아우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교를
훼방하고 배척하고 교우들이 라면 모두 비난하면서도 베드루만은 감히 비방하지 못하고 천주교 안에는 자순이 한 사람밖에 없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 고 늘 자순을 칭찬하였습니다. 신부가 일치기 베드루를 기특히 여겨 칭찬하기를 부부간에 정덕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상공하는 이가 적은데 자순 부부는 결심이 굳고 고신극기를 갈수록 부지런히 하니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루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아들이 체포되매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들어 죽게 되자 천주교를 믿고 세를 받았습니다. 베드루는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에 출감을 청하니 관은 집에 돌아가 장례 지낼 것을 허락하고 또 은근한 말로 훈수를 주어 달아나 피하라고
했지만 베드루는 그 말대로 하지 아니 하고 장례를 치른 뒤 기일 안에 감옥에 돌아와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였습니다. 나이는 三二세
이었습니다. 일찍이 베드루는 몇몇이 친구들과 함께 서로 자신의 소원을 말할 때 그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소원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베드루가 매를 이기지 못해 배교하였는데도 관가에서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성교를 설명하고 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확실한 바가 없고 아직은 의문일 뿐입니다. 김 요사팟 건순은 노론 대가의 자손이요 집이
경기도 여주에 있었습니다. 그의 선조 상헌이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웠기 떄문에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받아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요사팟은 어릴 떄부터 특이한 데가 있어 아홉 살 때에 선도를 배울 생각이 나 서당에서 훈장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할 것이라는 대문에 와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진대 멀리 함은 옳지 않은 일이요 마땅히 멀리 해야 할진대 공경함은 옳지
않은 일이거늘 공경하고 멀리 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전부터 (기인 십 편<畸人十篇)이라는
책이 있어 요사팟은 그책 읽기를 좋아했고 一O여세에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밝혔고 더 자라면서부터는
문학에 널리 통달하여 <경사자집> (經史子集)과 의서(醫書)와 지리에도 통달하고 불교와 노자와 병서(兵書)에 까지도 정통하지 아니
한 것이 없었습니다. 열 여덟 살 때 양부의 상을 당했는데 이 나라와 상복은 송나라의 제도를 본 딴것이라 옛날 법과 틀린 데가 많았으므로
이것을 다시 뜯어 고쳤습니다. 그러자 민간의 선비들이 크게 놀라 들고 일어나 글을 보내 힐책하였더니 요사팟이 글을 지어 이에 응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증거가 넓고도 많고 문장이 아름다워 리 가환이 읽어 보고 나는 감히 바라다 보지도 못한다 고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집안에서는
충직하고 신의가 높으며 독실하고 효성스러워 그 명성이 인근 이웃에 널리 알려 졌습니다. 본래 가산이 부유하여 재물을 나누어 희사하면서도
자기가 먹고 입은 것은 검소하기가 가난한 사람과 같아 그 명성이 대단해서 서울에 나들이 갈 때마다 가마와 말을 타고 모여 들었는데
그를 한번 만나 보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리 말딩등 五.六명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강절(江浙)을 거쳐 북경에 이르러 서양 선비들과 만나 잘 사는 방법을 많이 배워 가지고 본국에 돌아와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실현치 못하였고 이 五.六명이 모두가 천주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때 성교를 봉행하는 사람은 모두 남인이었고 노론
측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요사팟은 성교를 몹시 부러워하고 사모하였으나 들어갈 길이 없다가 우연히 한 시골 교우를 통해 미카엘
대천신 상본을 얻어 보고 성교가 술법과 서로 통한다고 오해를 하고는 강 이천 등과 함께 술법(術法)에 종사하였습니다. 강 이천이란
자는 소북의 명사로 심술이 단정치 못하여 이 나라가 필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나라안이 소란해지면 이 술법을 익혀 시기를
보아 집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것을 모르고 그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신부가 요사팟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글을
보내 그를 권유하였는데 그는 크게 감복하여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진심으로 천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떄 나이 二二세였습니다.
그와 함께 가까운 친구들이 입교하였는데 오직 이천만이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안되어 이천의 진상이 탄로나 결국 입건이
되었는데 사실 진술에 요사팟이 관련되어 있었으나 선왕이 전부터 그의 재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력 두호하여 화를 면케 하였습니다.
그는 영세한 후 열심히 불같이 일어나매 부형들이 알고 엄히 말리게 되어 三 . 四년간은 집안 박해가 없을 때가 없었고 따라서 비방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의 체포된 경위와 환을 당할 때의 태도에 대하여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만 들리는 말로는 그가 처형될
때에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 헛되고 거짓된 것이로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이 헛되고 거짓되므로 포기하였노라 오직 천주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하므로 이를 위하여는 죽음을 사양치 않노니 그대들은 이 뜻을
자세히 생각할지니라 말하고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二六세라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 김 백순은 서울
사람이요 건순의 일가 형으로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명을 구할 생각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선조 성용은 벼슬이 나라의 재상이라
숭덕 병자년(一六三六)에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상용은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당과 정문이 세워졌고 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 전의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과 승정 두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국왕이
병자란에 죽은 이의 자손들을 데려다 전배(展拜)의 예를 드리고 예식이 끝난면 과거를 베풀어 제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이것을 충량과(忠良科)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은 이제사에 출석하지 아니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나라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 성실하지 못한 것이기에 나는 참여하지 않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처음 몇 해 동안은 남을 따라
덩달아 성교를 비방하며 과거 공부에 힘쓰더니 세태가 위험함을 보고는 관계에 투신할 마음을 버리고 송나라 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드디어 노자와 장자의 서적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죽어서도 멀치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워 친구들에게 강의하였더니 친구들은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로운 것이니 반드시 서양의 교를 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이 듣고 의심하기를 내가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고
하니 서교에는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라 하여 마침내 교우들과 상종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토론한 결과 굳게 믿고 따라
계명과 법규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입교하여 열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 자기 남편이
높은 벼슬에 올라 유명하게 되기를 바라다가 하루 아침에 장래 끊어지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온갖 욕을 퍼부으며 일가 친척과
친구들까지 헐뜯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외숙이 그를 설복시키려 하였으나 설복 당하지 않자
외숙은 네가 내 말을 듣지도 아니 하면 너와 절교하겠다 고까지 했지만 백순은 차라리 외숙과는절교할지언정 주님과는 절교 못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모두 절교 통고문을 보냈고 종중 모임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축출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는 늘 내가 천주를 믿고 나자 내 마음이 산과 같아 요동하지 않는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건순이와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 三二세요 입교한지가 오래되지 않아 상세를 받지 못해 본명이 없었습니다. 리 희영 루가는 요사팟의 아주
가까운 친구로 여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한 사람인데 본래 화공(畵工)으로 성인들의 상본을 잘 그렸습니다. 그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홍 비리버 필주는 골롬바의 전실 아들로 성품이 선량하여 어머니를 따라 교에 나왔으나 처음엔 별로 부지런하거나 열심하지 않더니 신부를
모신지 一년만에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모두 놀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집에 있으면서도 늘 미사에 복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매 관원이 신부의 동정을 물으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비리버는 고통을 참아 견디며 긑내 실토하지 아니 하여
마침내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나이 二八세 이었습니다. 강 골롬바는 한 이름 있는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언변이 있고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생각과 취미가 고상하여 어려서 방안에 앉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성녀가 될 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나아갈 길을 몰라 남을 따라 염불을
읊었는데 지식이 약간 열린 一O여세가 되자 그것이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됨을 알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라서 덕산 홍 지영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남편이 옹졸하여 마음에 맞지 않아서 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충청도에 처음 성교가 들어갔을
떄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 글자를 듣고 혼자서의 짐작에 천주라 함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교의 이름이 옳으니 도리도 틀림 없을 것이라
하여 책을 구해 한 번 읽어보자 마음이 기울어져 믿고 따랐습니다. 그의 총명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하고 열심한 극기는 아주 뛰어나 아무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온 집안을 권유하여 귀화시키고 이웃 동리까지 전했는데 오직 남편 지영이만은 주견이 전연 없어 아내가 권유하면
옳다 옳다 하며 쫓다가는 악한 무리가 할뜯으면 그래 그래하고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믈을 흘리며 참회하다가도
나쁜 친구가 오면 금시 전과 같이 되었습니다. 골롬바가 아무리 힘을 써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신해년
박해에 자기 고향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남편에게 농토를 맡기고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사바의 북경 왕래를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을묘년에 영세를 했는데 신부는 그를 심히 기뻐하며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을 맡겼습니다. 五월 박해에 그는 피신할
계획을 먼저 주장하고 혼자 주선하여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미리 막아 보호함으로써 포졸들이 체포하러 문앞까지 왔다가도
그냥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박해가 지난 후에도 신부는 그의 집을 거처로 정하였으며 골롬바는 六 년이나 교회의 모든 요긴한 사무를
도와 신부의 총애와 신임은 누구도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롬바는 안으로는 신부를 받들어 거처와 의식을 모두 알뜰하게
보살피고 밖으로는 교회 사무를 처리하여 경영과 수응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그는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쳤고 그것이 끝나면
각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도록 하고 자신도 역시 두루 다니며 전교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여
편히 잠자는 시간이 없었으며 도리가 밝고 구변이 좋아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귀화시켰고 일처리를 과감하게 하고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다 두려워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자 관원이 신부의 거처를 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 하매 양쪽에 늘어섰던 형리들이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나이는 四一세이었습니다.
선왕에게는 서형(庶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반역죄로 죽은 뒤 선왕이 그를 강화도로 추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그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본래 살던 궁에 그대로 살게 하였습니다.
신해 임자녀(一七九一, 一七九二)무렵 한 여교우가 있어 그를 가련히 여겨 권유하여 감화시켰더니 사람들이 모두 우환의 근거가 이런
데 있을 것이라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렸지마는 골롬바는 꺼림낌이 없이 주선하여 이미 성사를 받게 하고 명도회에 입회시켰는데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우울하고 금심해 했습니다. 결국 발각되어 극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고 강화도의 죄인도 성교는 믿지 않았으나
공범으로 몰아 역시 극약을 내려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두 부인의 성과 본명도 모르고 최 베드루 이하 여러 교우들의 순교한 날짜도
모릅니다. 조 베드루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가 홀아비로 빈궁하여 힘써 농사를 지어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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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의 백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죄인 도마 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하옵니다. 지난 봄에 그 곳에 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와 주교님께서 안녕하시다는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 후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이미 해가 저물게 된 이 때도 기체 만안하신지 살피지 못했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교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주님의 넓으신 은혜를 충만히 받으사 덕화가 날로 높아지실 것이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여 마지
    아니 하옵니다. 죄인 등은 죄악이 많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의노를 범하고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 아래로는 사람들과 의논조차 못한
    채 박해만 크게 일어나게 하여 그 화가 신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리고 죄인 등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도 스승과 함께 목숨을 버려
    주님께 보답하지도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감히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리이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교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여 있고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는 고통을 겪고 있으나 어지신 아버지를 이미 잃은지라 그를 붙들고 부르짖을 길이 없고 진실한 형제들은 사방에
    흩어져 서로 의논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주교님께서는 온정 깊은 부모를 겸하시고 사목의 책임을 지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 우리들은 다른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제 박해의 전말을 대강 아뢰고자 하오나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또 그 실마리가 하도 복잡하여 한꺼번에 진술하기가 어려워 다음에 자세히 적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살펴 주옵소서. 현재 교회 사정은 말이 아니옵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죄인이
    요행화를 면하였고 요왕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라에 주님의 은총이 아주 끊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오호 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명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이 오나 재능이 적고 힘이 약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세명의 교우가 비밀리에 모여 당면한 문제들을 의논한 결과 그동안 속에 품었던 사정을 일일이 아뢰
    오기로 하였으니 읽어 보시고 이렇듯 외로운 자들을 가엾게 보시어 조속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기를 바라옵니다. 죄인 등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떠돌이가 되어 길에서 헤메면서도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체 흐느끼고 있습니다.
    실로 목이 메고 가슴이 쓰라리고 뼈가 저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주님의 전능과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들여 빌어주시고 자비의 정을 크세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물불속에서 건져 주시고 가족들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날 성교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그 성덕을 노래로 읊지 아니 하는 이 없고 그 영적 감화를 기뻐하며 흥겹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먼 끝에 사는 백성들이라고 해서 어찌 주님의 자식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지방이 멀고 궁벽하여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또 그들의 기질이 약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운데다 10년 동안이나 갖은 풍파로 눈물과 불안 속에 지냈기에 금년의 박해는 얼마나
    참혹한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처해질 수가 있습니까.
    이 난이 비록 끝 난다 하더라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쯤 미치고 보니 간장이 서늘합니다. 중국과 서양 교우들이 우리들의 이 위기와 고통을 듣는다면 어찌 동정하지 아니 하리이까. 감히
    바라옵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쓰셔서 세계 각국에 알려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은 성교회가
    그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어 죄인들을 간절한 희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죄인들은 가슴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려 울며
    이 어려운 사정을 피력하오며 목을 늘이고 발돋음을 하여 오직 반가운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립니다. 주교님께서는 죄인들이 드리고 싶은
    말씀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함을 가련히 여기소서. 을묘년(一七九五)에 주 문모 신부를 잡으려다 놓친 후부터 선왕의 의심과 두려움은
    날로 깊어져 남모르게 수사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신부의 잠적을 알아내지 못하자 조 화준이라는 자를 시켜 겉으로는 교우인 체 꾸며 충청도
    일대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드디어 기미년(一七九九)겨울 청주에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충청도의 열심한 교두들은 거의다 잡혀 죽었습니다.
    최 도마 필공은 중인 계급의 사람으로서 성질이 곧고 의지가 굳세고 정의로운데다 재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이 대단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풍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유년(一七九一)박해때 불행히 유혹에 빠져 배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몹시 기뻐하여 그를 장가
    들게 하고 벼슬까지 주니 도마는 하는 수 없이 다 받아들이긴 했지만 근년에 와서는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과거의 잘못을 몹시 뉘우치며
    항상 몸을 받쳐 속죄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미년 八월에 선왕이 뜻밖에 그를 형조로 불러 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받드느냐 고
    물으시매 도마는 자기가 바랐던 대로 이제야 죽게 되었구나 하고 충효에 대한 성교의 도리와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솔직히 진술하였더니 그 말이 빛나게 밝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법관은 몹시 놀라고 분통이
    터져 진술사항을 그대로 임금께 보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내리지도 않고 아무런 판결도 없이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왕께 상소문을 올려 도마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여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리 말딩 중배는 소론의 一명(첩의 자식의 칭호)으로 경기도 여주에 살았는데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고 지조가 쾌활하였습니다. 원래 김 건순과 생사를 같이 하리만치 가깝게 사귀어 왔었는데 건순이 성교를 믿게 되자 말딩도 그를
    따라 믿고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불같이 뜨거웠고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대담하게 행동했으며 남들이 자기의 믿음을 눈치를 챌까봐
    무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신년(一八OO)부활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에 모여 앉아 높은 소리로 희락삼종(부활절에
    바치는 三종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또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는
    놀이를 날이 저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원수진 집의 밀고로 그는 한사람의 교우들과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이도 있었지만 말딩의 격려와 권면에 힘을 입어 혹독한 형벌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모두 한결같이 버티어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다들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말딩은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였는데 옥에 갇힌 후 혹시 병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런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여 주어 낫지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 멀고 가까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옥문 밖은 늘 장날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고을 군수도
    금할 도리가 없었고 자기도 병이 나면 와서 약 처방을 얻어 갔습니다. 이래서 옥중 살림이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김 건순은 사람들이
    혹시 말딩의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과하다 할까봐 열명중에 여덟 아홉 명은 고친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감옥의 관리가 의서를 좀 보여 달라고 하니까 그는 내게는 의서는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요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 싶거든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으로 배운단 말이요 하니 말딩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불타지 않는 책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계몽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에 족하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갇혀 있던 원 요왕에게는 한 늙은 여종이 있어 늘 옥에 찾아와 돌보아 주면서 집안의
    따분한 형편을 늘어 좋으며 배교하기를 꾀었었는데 요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할멈의 말이 하도 처참하고 간절하여
    요왕도 번민을 하며 마음의 동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을 알아 챈 말딩이 그 할멈을 노려 보았더니 할멈은 겁이 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물러가고는 다시는 옥에 찾아오지도 않고 후에 이생원의 눈빛이 하도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말딩은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설명하여 사람들을 권유하였는데 간수 한 사람도 감화되어 교를 믿었으며 나중엔 매우 열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 철신은 남인측 대가의 자손으로서 경기도 양근군(오늘의 양평군)에 살았는데 그는 평소에 경서와 예서로 세상에 이름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시 이름 난 집안이라 남들의 비방도 대단하였습니다.
    그 아우 일신이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계명을 터놓고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그를 원수같이 취급하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하여 을미년(一七九一)여름에는 드디어 그의 고향의 고약한 귀신 같은 놈들이 터무니 없는 죄를 꾸며 관청에 고발까지
    하게 되었고 이에 권씨 집안의 자체들도 맞서 대항하게 되었으므로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처리하여 싸움은 거기서 중재되었고 고발 내용이 사실 근거가 없다는 것도 판명되어 간교한 모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간교한 모략을 비밀리에 계속하여 서울에 있는 악질 관리들과 결탁하여 경신년 (一八OO)五월에는 선왕을 직접 뵙고 양근땅에는
    그 고을에 사학이 한창 성행해서 아니 배우는 사람이 없고 안 믿는 동리가 없는데도 군수란 자는 태평세월로 사찰조차 아니 하니 이
    군수를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 고 아뢰었습니다. 선왕이 그 보고를 듣고는 옳다고 판단하여 양근 군수를 인책 사임시키고 새 군수를 부임시키니
    그는 부임하자 곧 묵은 사건을 끄집어 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늙고 겁이 많은 철신은 서울로 올라가서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군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기어이 철신을 불러 들이려고 하여 사건은 오래도록 종결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선왕은 성교에 대하여 의심이 많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는 본래 무슨 사건이든 크게 확대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신부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관계되는 일이라
    만일 드러나면 그 처리가 매우 곤란하겠으므로 을묘년 후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금하라고 여러번 청하였으나 일체를 말단 관리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간섭하지 아니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지방의 박해는 비밀 지령이 아닌 것이 없었고 일부러 아니 한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놓고 몰래 신부를 체포하여 암암리에 결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미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 여삼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삼형제가 다 성세를 받고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 와 살고 있었는데 여삼은
    근년에 와서 냉담을 하고 배교까지 하더니 부랑자들과 어울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두 형들도 이것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리 안정이라는
    사람도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약간 있는 자로서 여삼이와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가난하여 늘 안정에서
    돈을 좀 돌려 주기를 바랐지만 안정은 그가 달라는 대로 다 들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삼은 늘 안정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갈고 있던 중 그는 안정이가 늘 성사를 받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만일 신부가 안정에게 재물을 내게 좀 나누어 주라고만 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테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는 그 말은 신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안정이가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자 이것은 신부가 안정에게서
    부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트집을 잡아 이젠 그 분풀이를 신부께로 돌려 모략으로 해치고자 신부의 동정을 살펴 포도부장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五.六년동안나 수사를 해도 알아내지 못했던 신부의 정체가 알려지니 이 말을 들은 포도부장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너를 봉급이 많은 관직에 추천해 주겠다고 하며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부는 골롬바의 집에
    있었는데 여삼이는 이것까지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부장더러 아무 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알려 주겠다 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삼이는 약속한 날이 이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집에 돌아 올 수 없게 되어 부장은 헛걸음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사정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안정더러 돈 수십냥 쯤 가지고 가서 여삼이와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삼의 원한과 분노는 잠시 누그러졌고 또 며칠 안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매 각 관청에선 일이 분주하여 사건은
    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삼은 이미 신부를 밀고한 뒤요 또 자기로서도 이제는 어찌 할 수 없게 되어 늘 악질분자들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기어코 흉악한 짓을 끝까지 저지르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나라의 양반들은 二OO년 이래 당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복의 네 당파가 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또 두 파로 갈라져 그 한파는 리 가환 정 약용 리 승훈
    홍 낙민 등 몇몇 사람들로서 이전엔 모두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을 아껴 배교한 자들입니다.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를 해치는
    척 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믿음 속에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은 수가 적고 그 세력이 외롭고 위태로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은 홍 의호 목 만중 등 진짜로 성교를 해치는 자들인데 一O년 이래 양편은 서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노론도
    또 갈라져 두 파가 되었는데 시파(時派)라는 것은 모두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선왕의 신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모두 당론을
    고수하여 임금의 뜻을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같이 지났으나 당원이 많고 세력이 크므로 선왕도 두려워하였고 근래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리 기호나은 문장으로 세상을 뒤흔들었고 정 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누구보다도 뛰어 났으므로 을묘년 이전에는
    선왕이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후로는 차차 멀어져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벽파에서는 이 두사람을 몹시 꺼려하여 기어코 해치려고
    했습니다. 가환 등이 배교하고 성교를 해치는데도 벽파에서는 그를 사당으로 몰고 별 병 중상과 공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번번이
    그들을 감싸주므로 벽파에서 마음대로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선왕이 돌아가시자 그 뒤를 이은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조모요 본래 벽파 출신으로 그의 친정이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 당했던 터이라 여래 해 동안 품었던
    원한을 풀길이 없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벽파를 끼고 학정을 펴 경신년(一八OO) 十一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한쪽으로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 내 조정을 반이나 비게 하였습니다. 또 전부터 선교를 박해하던 악당들은 벽파와 계속 서로 연락을 취해
    왔었는데 세태가 크게 변하자 요란스럽게 들고 일어나 큰일을 저지를 기세를 보였습니다. 경신년 四월에 여러 교우들이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신공을 부지런히 하고 회원 아닌 사람들은 움직여 자진하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는데 힘을 썼으므로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회두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는데 부녀자가 삼분의 이요 무식한 평민이 삼분의 일이고 양반집 남자들은 이 세상의 화가 무서워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습니다. 을묘년(一七九五)박해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공이 컸고 재능이 출중했으므로 신부는 모든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심히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들이 입교하는 예가 아주 많아 졌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이 역적이 아닌 이상은 양반의 집안 부녀자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부도 이점을 이용해서 선교를 널리 현양할 근거를 삼고자 하여 그네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매 교회안의 대세는 모두 부녀자 교우에게로
    돌아 갔고 이러한 인연으로 선교의 소문이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책 문제로 되어 있으므로 새 임금이 즉위하면
    반듯이 먼저 어떤 조처가 있을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것이 무었일지 몰라 신부는 더욱더 조심하고 교우들도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였습니다.
    十二 월十七일 형조에서 포졸을 보내어 최 도마를 체포하여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미결중에 있었으므로 이번 체포된 일은
    뜻밖의 일이 아니요 또한 그때는 성교를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 조정에서는 아직 금령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교우들은 경계는 했었지만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었습니다. 十九일 성모 자헌 첨례날 새벽 최 도마의 종제 최 베드루가 길가에 있는 약방의 안방에서
    몇몇사람과 함께 경문을 통경하고 있었는데 마침 창문 밖에서 투전(투전이란 노름의 이름인데 부랑자들이 돈을 걸고 노름을 하므로 사법부가
    이를 금지 하였음)을 단속하는 관원들이 지나가다가 창문안에서 가슴을 치는 소리가 나자 투전 던지는 장단소리로 생각하고 창문을 열어
    제치고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투전을 발견하지 못하자 각자의 몸 수색을 하여 첨례표 한 장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몰라
    이것이 무었인지 알수가 없자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 보였더니 그것이 곳 성교에 관계되는 그림임을 알려주어 그들은 다시 교우들을
    잡으러 돌아왔었는데 그러나 이미 날이 밝아 다른 교우들은 다 흩어져 달아났고 최 베드루 와 오 스더왕만이 붙잡혀 관청으로 끌려가
    도마와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포도부장들은 김 여삼이와 부랑배들을 끼고 그들을 정보원으로 삼아 아니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교우들을 찾아다니메 교중이 물결일 듯이 요란했으나 마침 세모가 되어 사태가 잠시 잠잠해 졌습니다. 그러나 정월 초아흐레
    총회장 최 요왕이 잡히고 나서 부터는 부장들이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잡아간 사람들이 두 포도청(자포청 우포청이 있음)에
    가득히 찼는데 모두들 무식하고 또 새로 입교한 사람들과 여염집 부녀자들이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十一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상교를 엄금하기를 선왕이 늘 말씀하시되 참다운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 하셨는데 이제 듣건데
    사학이 여전히 수도로부터 경기와 충청지방에 이르기 까지 기세를 보인다 하니 어찌 소름이 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서울과 지방에
    다섯집씩 통합한 통반제도를 엄격히 세워 그 통에 사학을 하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청에 고발하여 징계하게 하라 그래도 뉘우치지 아니하면
    반역죄를 적용하여 모조리 사형에 처하여 씨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고 하니 각처가 소란하여 지고 환란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 교우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명도의 회장 정 아오스딩은 정 약용의 셋째 형으로 본시 양근서 살다가 경신년(一八OO) 五월 박해때에
    온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벌써 사학자로 비방을 받아왔던지라 그해 여름에 한 악질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적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화를 면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사태가 이미 변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도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성물과 서적과 신부의 편지등을 농속에 넣어가지고 다른 집에다가 맡겨두다가
    그집도 곧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 본집으로 도로 가져다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무서워서 임 도마라는 사람을
    나무장사로 꾸며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가지고 十九일 해질녘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나무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한성부에 밀도살 감시원이 이것을 보고 몰래 잡은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이나(무허가 도살은
    엄금하였음) 그사람을 관청으로 끌고가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서적과 상본과 신부의 편지였는지라 부윤(俯尹)이 크게 놀라
    그농과 사람을 포청으로 압송하니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어 환란이 더욱 확대 되었습니다. 책과 농이 압수당하자 교우들은
    놀라 조석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만 十O여일이 지나도록 잠잠하고 아무 동정이 없더니 二월초에 포도대장 리 유경이 정근되고 신임된
    신 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했던 배교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최 도마형제와 최 요왕과 임 도마만을 석방하지 않았는데 이들을 때려 죽이려
    한다고도 하고 멀리 귀향보내기로 방금 의논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검거가 잠시 그치니 교우들이 기뻐하며 이대로 계속해서 무사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때에 소북의 박 장설 노론의 이 석우 남인의 최 현중 등이 잇달아 성교를 몹시 헐뜯고 반역죄로 처벌하기를 청원하며
    아울러 신 대현이 교우들을 가볍게 처리한 것을 죄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대비가 크게 노하여 대현을 잡아 가두고 이사람을 금부로 옯겼습니다.
    이나라 국법에 조정의 관리와 역적은 군부에서 처리하고 포도청에서는 도적들만 취급하고 평민의 범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평민이지만 포도청에 속하게 되어 도적으로 처단되어야 하는 데 금부로 옮긴 것은 역적으로 처벌하려고 한 것입니다. 二월 초아흐렛날
    리 가환 정 약용 리 승훈 홍 낙민을 금부에 가두고 十一일에는 권 철신과 정 약종을 체포하고 포도청에 엄명을 내려 전에 석방한 사람들까지
    재구속하게 하고 여주와 양근에 가둔 사람들을 금부에 올리도록 하니 경향에 이름있는 교우들은 한 사람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포졸들이 깔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밤낮 그치지 아니 하고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도 만원이 되어 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二四일에는 골롬바의 온가족이 체포되고 이어 양반집 부녀자들도 제법 많이 체포되었으나 상세한 것은 잘 듣지 못했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관가에 이르자 관원이 농 속에 든 책들에 대해 그 내력을 물으니 아오스딩은 다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원이 농 속의 편지를
    내 놓고 하나하나 캐어 물었으나 아오스딩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이 사람을 그 가족에게 보내어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신부의 성명과 있는 곳만 알리면 절대로 죽을 리가 없는데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아니 하니 너희들 가족은 틀림 없이
    알고 있을 터이니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 대로 말하라 고 하였으나 가족들도 한결 같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회의를 열어 대역부도 죄로 판결하고 二六일에는 아오스딩과 최 요왕 최 도마 홍 방지거 사베리오 홍 낙진 리 승훈 여섯 사람들을 목을
    베어 죽이고 그 후 아홉 사람 역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그 중 여자 세사람이 있었지만 가운데 한 사람 골롬바를 제외하고는 다른 두
    여자와 남자 여섯명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최 베드루 등이 아닌가 하지만 전해들은 말이 정확하지가 않아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여주와 양근에 갇혔던 사람들도 모두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일일이 아뢸 수가
    없습니다. 총회장 최 요왕 창선이는 중간계급 출신으로 을묘년에 순교한 최 마디아의 조카이며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였고 몸가짐이 평화스럽고 언행이 공정하여 二O년을 하루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외모가
    순수하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정의로와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곤란을 당하거나 혹은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할 때면 그의 얼굴만 한
    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 그의 말은 두어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 졌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명백하여 재미가 있으므로 비록 듣기 좋게 말할 생각이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즐겨 들으며 싫증을 내지 아니하고 또한 그 말이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사람들이 받는 신익이 컸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나는 점도 없고 꼬집어낼 결점도 없었습니다. 그는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모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은 그를 관천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조 화진이 충청도를
    수색할 때 관천이가 교우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할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최 요왕은 박해가 장차 커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에 피해 있다가 신유년(一八O一)정월 초닷새날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조섭하던 중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 여삼이 포도부장을 데리고 와서 집을 둘러싸고 체포하는 바람에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一O여일 후 치도곤으로 열 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는 동안에는 기절하여 죽어 엎드러진 것 같았으나 매질이 끝나고 관원이 그의 죄목을 셀 때면 그는 벌떡 일어서서
    성교의 一O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관원의 말이 네가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는 잘 생각해
    보시오 밤에 잠이 든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 하오 그렇거늘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니 관원도 대답을 못하고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더니 그 후
    정 아오스딩과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四三세이었습니다. 정 아오스딩 약종은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고 상세하고
    치밀함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선도(仙道)를 배워서 오래 살뜻이 있어 천지 개벽설을 그릇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다시 변하는 때는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짐을 면치 못할 터이니 이것 역시 결국 길이 사는 길이 아니니 배울 것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성교의 도리를 듣게 되어 독실히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그의 형제와 친구들은 모두 움츠려졌으나
    그만은 유독히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속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리를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여 비록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괴로움은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도리의 한 끝이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과 음식의 흥미마저 잃은 듯 전심전력
    연구하여 반드시 해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 하고 우몽한 자를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피로하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실증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 깨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무식한 교우들을 위하여 이 나라의 언문으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성교의 여러 책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 까지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의심나거나 모호한 대가 없었습니다. 이 책이 이 나라에서 목초나 땔나무 보다도 더 중요하다 하여 신부는 간행을
    인준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의 학문 연구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어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나 하고 나서는 곧 도리 강론을
    펴 놓고 날이 저물도록 계속해 다른 이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혹 자기가 모르던 도리 한두 가지를 알아 깨닫개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혹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 하면 딱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척척 풀어주어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 놓아도 가려내는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뀜이
    없었으며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으며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소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덕망은 관천만 못하였으나 도리에 밝기는 그보다 훨씬 더 낳았습니다. 그는 또 천주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광범하고 방대하여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총론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가려 뽑아 부분별로 구별한 것을 한데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제명을 <성교전서>라 하여 후배들에게 남겨 주려고 하였으나 그 책의 초를 절반도 답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자 관원이 국왕의 명을 거스렸음을 문책하니 그는 성교의 진실한 도리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밝혀 말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크게 노하여 국왕의 명령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역죄를 선언하였습니다.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위에 올라 처형장에 갈 때에도 그는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은은 당연한
    일이요 공심판 때 우리들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요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웃지들 마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이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를 본받아 이 후 이렇게 하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처형장에서 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었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은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엎더졌습니다. 최 도마와 함께 처형되었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四 二세 이었습니다. 최 도마는 병이 많았고 옥중에서
    오래 시달려 지쳐서 수레에 오르자 곧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형장이 가까워 오자 비로소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나타났으며 그는 맨 먼저
    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五六세 이었습니다. 홍 사베리오 교만이는 권 철신의 외숙으로 경기 포천현에 살았으며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만년에는 경학(經學)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이 입교하자 그도 따라 믿게 되어 관계(官界)에 나설 뜻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이웃 사람들을
    권유하자 그들을 감화시켜 온 고을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이 아오스딩에게 시집을 가자 그로 인해 남들의 비방을 받게 되어 드디어
    체포되어 치명하였습니다. 홍 바오로 낙민은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으로 젊어서 진사시헙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한 후 리 승훈 정
    약종과 어울려 갑진년(一七八四)과 을사년(一七八五)사이에 성교를 믿고 봉행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하고 도리에 밝아 교중 사무를 잘
    보아 칭찬을 받았으나 남의 이목을 거려 계속 과거를 보아 기유년(一七八九)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詞諫院)정언(正言)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는 선왕이 억지로 배교를 명하니 나쁜 표양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배교한 자들은 전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데 비해 바오로만은 신공 드리고 재지키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을유년(一七九五) 성사 볼 때가 이르러 보례하고
    고해성사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판공때가 오기 전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성명이 한 영익이란 자의 고발에 들어 있어
    선왕이 또 배교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외출했을 때는 세속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을미년(一七九九)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이르러선 열심히 약간 일어나 앞으로는 전심으로 주님께
    귀화할 작정이었는데 이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옥 안의 사정은 엄격한 비밀에 붙어져 있으므로
    자세히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죄목이 본래 큰 것이 아니었으니 만일 관청에 이르러 배교만 하였더라면 죽지는 않았을텐데 참수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가 성교에 어긋난 일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리 승훈 베드루는 이 가환의 생질이요 정 아오스딩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고 학문궁리를 좋아하여 선비 리 벽이 크게 기특히 여겼습니다. 그 때 리 벽이 성교의 서적의 비밀히
    읽고 있었으나 승훈은 아직 이를 몰랐습니다. 계묘년(一七八三)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매 리 벽이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 서양 전교사들이 있었으니 찾아보고 신경 한부룰 얻은 후 동시에 성세 받기를 청하면 서양 선비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할 것이니 신기한 물건과 패물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고 빈 손으로는 돌아오지 말라 고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상세를 청하매 여러 신부들이 영세하기에 필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영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량
    신부가 힘써 우겨 성세를 주고 또한 성서도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에 돌아오자 리 벽 등이 놀라 함께 전심전력으로 그 책을 읽어 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고는 가까운 친구들을 권유하여 당시 이름 난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훈을 추대하여 영수로
    세웠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약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를 봉행하였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一七九O)가을에는 벼슬을 주어 평택 현령까지 지내게 하자 그는 신해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는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 받기를 준비했으나 며칠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매 승훈은 두려워 다시 움츠려들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성서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이 성교를 공격하고 배척할 때에는 반드시 승훈에게도 그 죄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왕은 그를 두호 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혹 옛 가까운 친구를 만나면 옛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다가 화를 당하였는데 그는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선종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가환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하매 풍채가 늠름하고 도량이 크고 문장으로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아니 읽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강하여 신과 같았습니다. 또 천문과 기하학에도 정통하였는데 일찍이 그는 탄식하기를 이 늙은 몸이 죽으면 이 나라에는 기하학의 씨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기학(理氣學)을 약간믿던 그는 천체를 둘러보며 마음 속으로 이처럼 웅대한 조직에 주재하는 이가
    없다 하리요 하고 감탄한 적도 있었습니다. 三O세가 넘어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니 선왕이 그를 인물로 중히 여겼습니다. 갑진
    을묘년(一七九四,一七九五)무렵에 리 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책하여 말하기를 나도 서양 서적 몇권을 읽어 보았는데(자기
    집에<직방외기><서학범>등이 있었음) 기이한 글이요 궁벽한 저술에 지나지 않고 다만 내 식견을 넓히는데 그쳤는데 어찌 족히 인생을
    안정시키고 인명을 확립시킬 수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리 벽이 이치를 따저가며 답변하니 가환이 그의 말에 굴복하여 드디어 책을 구해다
    비밀히 읽었습니다. 리 벽은 그에게 초보 입문서 몇 권을 주었는데 그 때 (성년광익,聖年廣益.)한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영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 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가환이 기어코 싸우다시피하여 그 때 있던 성교 서적을 모두 가져다가 정신을 쏟아 거듭 읽고
    또 읽어 믿기로 결심하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진리요 정도로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서적 가운데 쓰인 말은 전부 하늘을 모함한
    것이요 하늘을 소홀히 여긴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서양 바다를 건너와 이렇게 전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벼락을 맞아 죽었으리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 저녁으로 리 벽 등과 비밀히 희합하여 열심히 대단하였습니다. 이
    때 리 승훈 등이 망녕되게 함부로 성사를 집행하였는데 가환은 남에게 권하여 그 들에게서 성세를 받도록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자신은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서양 사람들에게 성세를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세태가 어려워지자
    그는 마침내 모든 신공하기를 그쳤는데 그 때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환의 사돈과 일가 친척들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악한들이 항상 그를 불러 교주라고 규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신해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교우들을
    많이 해침으로써 자기 변명의 계책을 삼았었는데 교우들에게 도둑 다스리는 형법을 맨 처음 적용한 이도 가환이었습니다. 신해년 이후
    선왕이 남인을 많이 기용하자 가환은 그 세력을 타 여러 벼슬을 지내고 공조판서에까지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을묘년에 새 사람이 순교한
    후 악한 무리들이 신부의 사정을 모르므로 그 죄를 리 승훈과 리 가환에게 뒤집어 씌어 잇달아 상소하고 공격하매 선왕도 할 수 없이
    리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가환은 좌천시켜 충주 목사를 시켰습니다. 충주엔 마침 한 교우가 있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려 억지로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교우들에게 주리형을 처음 사용한 이도 가환이었는데 주리란
    도둑을 다스리는 독특한 형벌입니다. 그는 또 관의 기생을 첩으로 삼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다 자기에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버림을 받아 다시는 등용되지 아니 하여 집에서 글이나 읽고 쓰면서 스스로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원래
    신앙이 깊어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들을 권화하였는데 가끔 서책이 탄로가 나도 가환은 조사하거나 금하지 않았습니다. 가환은 무오(一七九八,一七九九)사이에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신념을 은밀히 말하기를 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것과 같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일어나는 것이니 상감이 아무리 금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아직도 자기는 염려 없다고 믿었으나 옥의 일을 보는 자들이 다 평소에 원수처럼 미워하던 자들이라 기어코 사지에 몰아 넣으려고 하여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자 변치 아니하여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다가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때 나이는 六O세였습니다.
    여섯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 권 철신도 역시 매를 맞고 순교하였는데 그가 착하게 잘 죽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사오니 탐지하여
    알려 드릴때까지 기다려 주시옵소서 최 베드루는 필제는 (字)가 자순이요 도마의 종제로서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 약종상을 하여
    생활을 했는데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 모두 그를 신용하였습니다. 진실하고 충직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바라다 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어진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도마는 의지가 굳고 성품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베드루를 항상 우러러 보고 어렵게 대해 비록 나이로는
    아우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문의한 다음에야 행하였고 자기 나름대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도마에게는 친 아우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교를
    훼방하고 배척하고 교우들이 라면 모두 비난하면서도 베드루만은 감히 비방하지 못하고 천주교 안에는 자순이 한 사람밖에 없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 고 늘 자순을 칭찬하였습니다. 신부가 일치기 베드루를 기특히 여겨 칭찬하기를 부부간에 정덕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상공하는 이가 적은데 자순 부부는 결심이 굳고 고신극기를 갈수록 부지런히 하니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루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아들이 체포되매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들어 죽게 되자 천주교를 믿고 세를 받았습니다. 베드루는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에 출감을 청하니 관은 집에 돌아가 장례 지낼 것을 허락하고 또 은근한 말로 훈수를 주어 달아나 피하라고
    했지만 베드루는 그 말대로 하지 아니 하고 장례를 치른 뒤 기일 안에 감옥에 돌아와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였습니다. 나이는 三二세
    이었습니다. 일찍이 베드루는 몇몇이 친구들과 함께 서로 자신의 소원을 말할 때 그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소원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베드루가 매를 이기지 못해 배교하였는데도 관가에서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성교를 설명하고 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확실한 바가 없고 아직은 의문일 뿐입니다. 김 요사팟 건순은 노론 대가의 자손이요 집이
    경기도 여주에 있었습니다. 그의 선조 상헌이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웠기 떄문에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받아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요사팟은 어릴 떄부터 특이한 데가 있어 아홉 살 때에 선도를 배울 생각이 나 서당에서 훈장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할 것이라는 대문에 와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진대 멀리 함은 옳지 않은 일이요 마땅히 멀리 해야 할진대 공경함은 옳지
    않은 일이거늘 공경하고 멀리 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전부터 (기인 십 편<畸人十篇)이라는 책이 있어 요사팟은 그책 읽기를 좋아했고 一O여세에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밝혔고 더 자라면서부터는 문학에 널리 통달하여 <경사자집> (經史子集)과 의서(醫書)와 지리에도 통달하고 불교와 노자와 병서(兵書)에 까지도 정통하지 아니
    한 것이 없었습니다. 열 여덟 살 때 양부의 상을 당했는데 이 나라와 상복은 송나라의 제도를 본 딴것이라 옛날 법과 틀린 데가 많았으므로
    이것을 다시 뜯어 고쳤습니다. 그러자 민간의 선비들이 크게 놀라 들고 일어나 글을 보내 힐책하였더니 요사팟이 글을 지어 이에 응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증거가 넓고도 많고 문장이 아름다워 리 가환이 읽어 보고 나는 감히 바라다 보지도 못한다 고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집안에서는
    충직하고 신의가 높으며 독실하고 효성스러워 그 명성이 인근 이웃에 널리 알려 졌습니다. 본래 가산이 부유하여 재물을 나누어 희사하면서도
    자기가 먹고 입은 것은 검소하기가 가난한 사람과 같아 그 명성이 대단해서 서울에 나들이 갈 때마다 가마와 말을 타고 모여 들었는데
    그를 한번 만나 보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리 말딩등 五.六명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강절(江浙)을 거쳐 북경에 이르러 서양 선비들과 만나 잘 사는 방법을 많이 배워 가지고 본국에 돌아와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실현치 못하였고 이 五.六명이 모두가 천주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때 성교를 봉행하는 사람은 모두 남인이었고 노론
    측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요사팟은 성교를 몹시 부러워하고 사모하였으나 들어갈 길이 없다가 우연히 한 시골 교우를 통해 미카엘
    대천신 상본을 얻어 보고 성교가 술법과 서로 통한다고 오해를 하고는 강 이천 등과 함께 술법(術法)에 종사하였습니다. 강 이천이란
    자는 소북의 명사로 심술이 단정치 못하여 이 나라가 필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나라안이 소란해지면 이 술법을 익혀 시기를
    보아 집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것을 모르고 그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신부가 요사팟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글을
    보내 그를 권유하였는데 그는 크게 감복하여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진심으로 천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떄 나이 二二세였습니다.
    그와 함께 가까운 친구들이 입교하였는데 오직 이천만이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안되어 이천의 진상이 탄로나 결국 입건이
    되었는데 사실 진술에 요사팟이 관련되어 있었으나 선왕이 전부터 그의 재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력 두호하여 화를 면케 하였습니다.
    그는 영세한 후 열심히 불같이 일어나매 부형들이 알고 엄히 말리게 되어 三 . 四년간은 집안 박해가 없을 때가 없었고 따라서 비방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의 체포된 경위와 환을 당할 때의 태도에 대하여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만 들리는 말로는 그가 처형될
    때에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 헛되고 거짓된 것이로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이 헛되고 거짓되므로 포기하였노라 오직 천주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하므로 이를 위하여는 죽음을 사양치 않노니 그대들은 이 뜻을
    자세히 생각할지니라 말하고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二六세라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 김 백순은 서울
    사람이요 건순의 일가 형으로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명을 구할 생각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선조 성용은 벼슬이 나라의 재상이라
    숭덕 병자년(一六三六)에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상용은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당과 정문이 세워졌고 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 전의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과 승정 두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국왕이
    병자란에 죽은 이의 자손들을 데려다 전배(展拜)의 예를 드리고 예식이 끝난면 과거를 베풀어 제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이것을 충량과(忠良科)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은 이제사에 출석하지 아니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나라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 성실하지 못한 것이기에 나는 참여하지 않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처음 몇 해 동안은 남을 따라
    덩달아 성교를 비방하며 과거 공부에 힘쓰더니 세태가 위험함을 보고는 관계에 투신할 마음을 버리고 송나라 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드디어 노자와 장자의 서적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죽어서도 멀치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워 친구들에게 강의하였더니 친구들은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로운 것이니 반드시 서양의 교를 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이 듣고 의심하기를 내가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고
    하니 서교에는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라 하여 마침내 교우들과 상종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토론한 결과 굳게 믿고 따라
    계명과 법규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입교하여 열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 자기 남편이
    높은 벼슬에 올라 유명하게 되기를 바라다가 하루 아침에 장래 끊어지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온갖 욕을 퍼부으며 일가 친척과
    친구들까지 헐뜯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외숙이 그를 설복시키려 하였으나 설복 당하지 않자
    외숙은 네가 내 말을 듣지도 아니 하면 너와 절교하겠다 고까지 했지만 백순은 차라리 외숙과는절교할지언정 주님과는 절교 못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모두 절교 통고문을 보냈고 종중 모임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축출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는 늘 내가 천주를 믿고 나자 내 마음이 산과 같아 요동하지 않는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건순이와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 三二세요 입교한지가 오래되지 않아 상세를 받지 못해 본명이 없었습니다. 리 희영 루가는 요사팟의 아주
    가까운 친구로 여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한 사람인데 본래 화공(畵工)으로 성인들의 상본을 잘 그렸습니다. 그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홍 비리버 필주는 골롬바의 전실 아들로 성품이 선량하여 어머니를 따라 교에 나왔으나 처음엔 별로 부지런하거나 열심하지 않더니 신부를
    모신지 一년만에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모두 놀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집에 있으면서도 늘 미사에 복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매 관원이 신부의 동정을 물으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비리버는 고통을 참아 견디며 긑내 실토하지 아니 하여
    마침내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나이 二八세 이었습니다. 강 골롬바는 한 이름 있는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언변이 있고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생각과 취미가 고상하여 어려서 방안에 앉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성녀가 될 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나아갈 길을 몰라 남을 따라 염불을
    읊었는데 지식이 약간 열린 一O여세가 되자 그것이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됨을 알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라서 덕산 홍 지영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남편이 옹졸하여 마음에 맞지 않아서 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충청도에 처음 성교가 들어갔을
    떄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 글자를 듣고 혼자서의 짐작에 천주라 함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교의 이름이 옳으니 도리도 틀림 없을 것이라
    하여 책을 구해 한 번 읽어보자 마음이 기울어져 믿고 따랐습니다. 그의 총명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하고 열심한 극기는 아주 뛰어나 아무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온 집안을 권유하여 귀화시키고 이웃 동리까지 전했는데 오직 남편 지영이만은 주견이 전연 없어 아내가 권유하면
    옳다 옳다 하며 쫓다가는 악한 무리가 할뜯으면 그래 그래하고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믈을 흘리며 참회하다가도
    나쁜 친구가 오면 금시 전과 같이 되었습니다. 골롬바가 아무리 힘을 써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신해년
    박해에 자기 고향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남편에게 농토를 맡기고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사바의 북경 왕래를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을묘년에 영세를 했는데 신부는 그를 심히 기뻐하며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을 맡겼습니다. 五월 박해에 그는 피신할
    계획을 먼저 주장하고 혼자 주선하여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미리 막아 보호함으로써 포졸들이 체포하러 문앞까지 왔다가도
    그냥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박해가 지난 후에도 신부는 그의 집을 거처로 정하였으며 골롬바는 六 년이나 교회의 모든 요긴한 사무를
    도와 신부의 총애와 신임은 누구도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롬바는 안으로는 신부를 받들어 거처와 의식을 모두 알뜰하게
    보살피고 밖으로는 교회 사무를 처리하여 경영과 수응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그는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쳤고 그것이 끝나면
    각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도록 하고 자신도 역시 두루 다니며 전교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여
    편히 잠자는 시간이 없었으며 도리가 밝고 구변이 좋아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귀화시켰고 일처리를 과감하게 하고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다 두려워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자 관원이 신부의 거처를 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 하매 양쪽에 늘어섰던 형리들이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나이는 四一세이었습니다.
    선왕에게는 서형(庶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반역죄로 죽은 뒤 선왕이 그를 강화도로 추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그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본래 살던 궁에 그대로 살게 하였습니다.
    신해 임자녀(一七九一, 一七九二)무렵 한 여교우가 있어 그를 가련히 여겨 권유하여 감화시켰더니 사람들이 모두 우환의 근거가 이런
    데 있을 것이라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렸지마는 골롬바는 꺼림낌이 없이 주선하여 이미 성사를 받게 하고 명도회에 입회시켰는데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우울하고 금심해 했습니다. 결국 발각되어 극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고 강화도의 죄인도 성교는 믿지 않았으나
    공범으로 몰아 역시 극약을 내려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두 부인의 성과 본명도 모르고 최 베드루 이하 여러 교우들의 순교한 날짜도
    모릅니다. 조 베드루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가 홀아비로 빈궁하여 힘써 농사를 지어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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