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 말씀연구


용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의 의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베드로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삐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일만 달란트의 거액은 비유의 청중에게 근동의 대제국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왕들을 연상시킵니다. (1데나리온 하루품삯: 3만원,1달란트: 1000데나리온)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왕은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노예로 팔고, 아내와 아이들도 노예로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신체포기각서라도 써야 하는 것일까요?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그에게 애원을 합니다.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애절한 청원입니까?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엎드려서 애원하는 동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는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자비를 입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롭지 못한 그의 모습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그들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왕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빚진 것을 다 갚게 했다는 것은 결국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어떻게 갚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할 수 있을 때 갚아야지, 시간이 지나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내 가 빚을 진만큼, 즉 죄 만큼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잘 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되겠지요.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엄과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지 않을 때 이 비유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종 왕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 왕은 군림만 하는 왕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이시고, 악한 종을 형리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바라봅시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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