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론나 가문 Colona

  콜론나 가문 ~家門  Colona

  중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로마의 콜론나 가문으로부터 교회 역사상 비중을 차지하는 교황들이 배출되었다. 식스토 3세(Sixtus Ⅲ, 432~440년), 하드리아노 1세(Hadrian Ⅰ, 722~795년), 스테파노 4세(Stephan Ⅳ, 816~817년), 세르지오 2세(Sergius Ⅱ, 844~847년), 니콜라오 1세(Nikolaus Ⅰ, 856~967년), 하드리아노 2세(Hadrian Ⅱ, 867~872년) 그리고 하드리아노 3세(Hadrian Ⅲ, 884~885년) 등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13세기 말경 보니파시오(Bonifaz) 8세 재위 기간 중 콜론나 가문의 일부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교황권에 관여하였다. 베드로 콜론나와 야고보 콜론나 두 형제는 추기경이었으나 교황과는 적대 관계로 대립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재산을 둘러싼 다툼과 관련해서 두 추기경을 편들지 않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추기경 형제는 이교도들과 연계하여 모반을 시도했고, 마침내 1297년 현 교황이 – 두 형제는 교황의 즉위 초기에는 적법한 교황으로 선출되었음을 인정하였다 – 가짜 교황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별다른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두 형제 추기경은 직위를 박탈당하게 되었고, 교황은 그들의 요새 팔레스트리나(Palestrina)를 점령하여 황폐화시켰다. 두 형제 추기경은 각기 시칠리아와 프랑스로 도피하여 망명처를 구하였다. 1303년 9월 7일 베드로 콜론나의 동생 시아라(Sciarra) 콜론나가 약탈자들과 함께 아나니(Anagni)에 있던 교황의 저택에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했고, 교황을 감금하고 위협하였다. 9월 9일 교황은 아나니의 주민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하지만 교황의 힘은 약화되었다. 1303년 10월 11일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서거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서거 후에 있었던 새 교황의 선출에 콜론나의 두 형제 추기경은 참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추기경 직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1세는 두 형제 추기경의 재산을 부분적으로 되돌려주었다. 교황 베네딕토 11세의 후임 교황 클레멘스 5세 – 아비뇽에 유배된 첫 교황 – 는 프랑스 국왕들의 압력에 못 이겨 두 형제의 추기경 직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었다.


  콜론나 가문 출신인 오도(Odo) 콜론나는 1417년 마르티노(Martin) 5세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피사(Pisa)의 공의회를 준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교황으로 선출되고 난 후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를 주도했고, 1418년 4월 22일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폐막시켰다. 그리고 1423년 파비아(Pavia)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느 콘스탄츠를 떠나기 앞서 교황에 반대하여 공의회에 항소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매우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개인적으로는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교회 국가의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친인척 등용과 관련해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콜론나 가문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황직과 밀접하게 관련된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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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론나 가문 ~家門  Colona

      중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로마의 콜론나 가문으로부터 교회 역사상 비중을 차지하는 교황들이 배출되었다. 식스토 3세(Sixtus Ⅲ, 432~440년), 하드리아노 1세(Hadrian Ⅰ, 722~795년), 스테파노 4세(Stephan Ⅳ, 816~817년), 세르지오 2세(Sergius Ⅱ, 844~847년), 니콜라오 1세(Nikolaus Ⅰ, 856~967년), 하드리아노 2세(Hadrian Ⅱ, 867~872년) 그리고 하드리아노 3세(Hadrian Ⅲ, 884~885년) 등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13세기 말경 보니파시오(Bonifaz) 8세 재위 기간 중 콜론나 가문의 일부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교황권에 관여하였다. 베드로 콜론나와 야고보 콜론나 두 형제는 추기경이었으나 교황과는 적대 관계로 대립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재산을 둘러싼 다툼과 관련해서 두 추기경을 편들지 않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추기경 형제는 이교도들과 연계하여 모반을 시도했고, 마침내 1297년 현 교황이 – 두 형제는 교황의 즉위 초기에는 적법한 교황으로 선출되었음을 인정하였다 – 가짜 교황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별다른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두 형제 추기경은 직위를 박탈당하게 되었고, 교황은 그들의 요새 팔레스트리나(Palestrina)를 점령하여 황폐화시켰다. 두 형제 추기경은 각기 시칠리아와 프랑스로 도피하여 망명처를 구하였다. 1303년 9월 7일 베드로 콜론나의 동생 시아라(Sciarra) 콜론나가 약탈자들과 함께 아나니(Anagni)에 있던 교황의 저택에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했고, 교황을 감금하고 위협하였다. 9월 9일 교황은 아나니의 주민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하지만 교황의 힘은 약화되었다. 1303년 10월 11일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서거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서거 후에 있었던 새 교황의 선출에 콜론나의 두 형제 추기경은 참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추기경 직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1세는 두 형제 추기경의 재산을 부분적으로 되돌려주었다. 교황 베네딕토 11세의 후임 교황 클레멘스 5세 – 아비뇽에 유배된 첫 교황 – 는 프랑스 국왕들의 압력에 못 이겨 두 형제의 추기경 직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었다.

      콜론나 가문 출신인 오도(Odo) 콜론나는 1417년 마르티노(Martin) 5세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피사(Pisa)의 공의회를 준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교황으로 선출되고 난 후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를 주도했고, 1418년 4월 22일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폐막시켰다. 그리고 1423년 파비아(Pavia)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느 콘스탄츠를 떠나기 앞서 교황에 반대하여 공의회에 항소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매우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개인적으로는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교회 국가의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친인척 등용과 관련해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콜론나 가문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황직과 밀접하게 관련된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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