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부활 제 4주간 화요일(5/9)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당신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양에 비유하십니다(복음).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2-30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신비로 저희 구원을 완성하시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파스카 신비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한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용기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바르나바 사도는 그 이름처럼 바오로 사도에게 용기와 위로를 준 사도였습니다. 그는 회심한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하여 마침내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되게 한 인물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였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그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바르나바’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훌륭한 사도가 될 회심자들이 언제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로와 용기가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체후 기도
    주님,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현세의 삶을 잘 살도록 도와주시고,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저녁노을(모니카)




♬ temple-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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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즈음…..
    한동안 말썽을 부리던 컴퓨터 때문에 복음묵상을 제대로 하지못해
    안타까웠는데 며칠동안 잘 되는가 싶더니 컴퓨터가 또 말썽을
    부려 묵상을 하지 못하게 되니 짜증도 나고 그동안은 하루하루 복음묵상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있었지만 컴퓨터로 인해 복음묵상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복음묵상을 하지 못하게 되니
    별의 별 잡생각들로 머릿 속이 복잡하였습니다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말씀에 가슴이 뜨금하면서도
    복음을 묵상하는 이 순간만은 저의 마음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도 든든하고………..
    상상도 해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헬레나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헬레나
    하느님의 자녀로써 그 분의 뜻을 헤아리려 노력하려고
    그 분께서 원하시는 복음묵상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성찰도 해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시간을 갖으며 울고 웃고 행복한 시간을
    갖는 저를 보면서 비록 아직도 그 분의 뜻대로 살지는못하지만
    그 분과 하나되는 그날을 위해 노력하는 헬레나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그 분의 자녀로써 그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을 한다면
    그 분과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의 자녀답게….
    그 분과 하나되는 그날을 위해….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묵상하며

  2. user#0 님의 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즈음…..
    한동안 말썽을 부리던 컴퓨터 때문에 복음묵상을 제대로 하지못해
    안타까웠는데 며칠동안 잘 되는가 싶더니 컴퓨터가 또 말썽을
    부려 묵상을 하지 못하게 되니 짜증도 나고 그동안은 하루하루 복음묵상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있었지만 컴퓨터로 인해 복음묵상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복음묵상을 하지 못하게 되니
    별의 별 잡생각들로 머릿 속이 복잡하였습니다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말씀에 가슴이 뜨금하면서도
    복음을 묵상하는 이 순간만은 저의 마음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도 든든하고………..
    상상도 해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헬레나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헬레나
    하느님의 자녀로써 그 분의 뜻을 헤아리려 노력하려고
    그 분께서 원하시는 복음묵상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성찰도 해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시간을 갖으며 울고 웃고 행복한 시간을
    갖는 저를 보면서 비록 아직도 그 분의 뜻대로 살지는못하지만
    그 분과 하나되는 그날을 위해 노력하는 헬레나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그 분의 자녀로써 그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을 한다면
    그 분과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의 자녀답게….
    그 분과 하나되는 그날을 위해….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묵상하며

  3. user#0 님의 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봉헌절은 하누카절, 혹은 빛의 명절이라고 알려진 명절입니다. 이 봉헌절은 안티오쿠스 4세가 유다인 박해를 감행할 때 그 여파로 생겨난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자신의 왕국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 찬 안티오쿠스 왕은 유다인을 포함한 모든 수하의 사람들이 희랍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압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 왕은 유다인들의 제자사와 할례를 금지키시고 기원전 167년에는 성전과 제단을 더럽히고 이교 제단으로 대치시켰습니다. 이것을 파멸의 우상 사건이라고 부릅니다(마카베오 상 1,54-59;다니엘9,27;11,31). 제우스 올림푸스신에게 바치는 첫 번째 제사는 기원전 167년 12월에 행하여졌습니다. 3년 뒤에 유다 마카베오가 승리하여 성전을 정화하여 새 제단을 세워 성전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였습니다(마카베오상 4,36-39). 봉헌절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연례 행사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겨울에 있었던 축제였습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성전 제일 끝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님과 유다인 지도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메시아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였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때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왕으로 흔희 상징되었는데, 그 왕은 주님의 도움으로 평화의 계약을 새롭게 맺어 온 세상을 통일시킬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되풀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맞지 않는 대답을 하는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유다인들을 실망시키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도사업에 방해될지 모르는 어떤 소문도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메시아 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상은 외국인 억압자들을 전복시킬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구세주의 상이였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메시아상은 유다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윤곽이 잡힙니다. 다윗 왕정시대 초기에는 기름 부음 받은 왕들은 하느님이 백성에게 보내 주신 구세주였습니다. 후에 가서 신통치 않은 왕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되자 다윗 왕 같은 왕이 오실 것을 열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배 이후에 다윗 가문이 더 이상 권좌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자,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하기 위해 보내신 가장 위대한 왕을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승리를 거두어 주셨던 것 같이 유다인 역사 안에서도 개입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을 고대하였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며 민주적인 색채를 띄우게 된 이러한 메시아의 개념은 항상 그들을 붙어 다녔으며, 이것이 유다인 사고방식 속에 발전되어 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개념이 예수님께서 생존하시던 시대에만 변질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개념의 참된 의미를 찾아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를 새롭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서,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맛보지 못하였던 새 세상을 소개하려고 몸부림치셨던 것입니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지 않는 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릅니다. 목자는 양들을 하나하나 다 식별하며, 양들도 목자의 음성과 모습을 알아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관계, 이것이 착한 목자와 양들의 관계인 것입니다.

    비가 와서 여러 목자가 한 동굴에 자기 양들을 데리고 들어가도 나올 때 한 목자가 먼저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그 목자의 양들만 따라 나옵니다. 어느  신부님이 그들과 함께 목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동지방의 “와디”는 평상시에는 메말라 있다가 비가 오면 커다란 강을 이룹니다. 그래서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동굴 속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동굴 속으로 피신을 하면 여러 목자의 양들이 섞이게 되는데 그 신부님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의 양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목자들은 웃었습니다.

    “비가 그치면 보십시오”

    비가 그치자 목자들이 하나 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자가 노래를 부르며 나가자 그 목자의 양들만 따라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하도 신기해서 그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가 노래를 부르고 나갔는데 돌아보니 한 마리도 안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또한 양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양들을 위해서 몸을 바쳐 희생하는 목자야말로 참 목자인 것입니다. 이 목자는 또 모든 양들이 안심하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이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반면 도둑은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며,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백성의 지도자들 즉, 대사제,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등이 목자로 불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목자 없는 양 떼로 바라보십니다. 목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목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의 율법은 600여개나 되고, 조상 전래의 규정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그것을 다알지도 못하고, 더구나 모조리 지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인 지도자들의 눈에는 일반 대중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부터 목자들과 대중 사이에 장벽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참된 목자가 있습니다. 자기 양들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수난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참된 목자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 우리 모두는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길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양 우리에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양들은 아들 안에 있는 동시에 아버지의 전능하신 손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양들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는 아들과 협력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아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어느 날, 번개와 벼락이 쳐 깻묵을 보관하고 있던 헛간에 불이 붙었다. 양떼들이 깻묵 타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달려와 빨갛게 불타고 있는 깻묵더미 앞으로 자꾸만 가려고 하였다. 이를 본 목자는 급히 달려가 양떼들을 불구덩이에서 떼어놓기 위하여 작대기를 휘둘러 댔다. 한 무리를 떼어 놓으면 다른 무리가 불을 향해서 달려들고, 이러는 가운데 다행히 불길이 잡혀 양떼들은 살긴 살았지만 뜨거운 불기운 때문에 얼마나 기진했던지 몇 주일을 빌빌대었다.


    한 사람이 물었다

    “양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갈 때 화나지 않으셨습니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목자는 대답을 했다.

    “양들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양들이 깻묵냄새에 취해서 불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막는 것 뿐이지요. 깻묵창고에 또 불이나면 양들은 또 불속으로 뛰어들려 할 것입니다.”

    깻묵냄새에 취해서 죽는 줄도 모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양들과 같이 나 또한 마찬가지로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뛰어듭니다. 나 죽는 줄도 모르고 뛰어듭니다. 하지만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나를 돌봐 주십니다. 비록 내가 지금 죄를 짓고 보잘것 없다 할지라도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사랑으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자이신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다면 그분께서는 언제나 나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 놓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유다인들에게 아버지와의 일치의 관계를 강조하시며 결론을 지으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생명을 주는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버지가 파견하신 분이십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심판하고, 생명을 주고, 가르치시는 모든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그대로 하실 뿐입니다. 두 분의 활동은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은 하나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와 예수님과는 어떻습니까? 서로 하나씩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 안에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서로가 하나씩은 아닙니까? 함께 예수님의 일을 하고, 함께 예수님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또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을 집어 들어서 치려고 합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2.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하면서 아직도 질문을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4. user#0 님의 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봉헌절은 하누카절, 혹은 빛의 명절이라고 알려진 명절입니다. 이 봉헌절은 안티오쿠스 4세가 유다인 박해를 감행할 때 그 여파로 생겨난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자신의 왕국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 찬 안티오쿠스 왕은 유다인을 포함한 모든 수하의 사람들이 희랍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압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 왕은 유다인들의 제자사와 할례를 금지키시고 기원전 167년에는 성전과 제단을 더럽히고 이교 제단으로 대치시켰습니다. 이것을 파멸의 우상 사건이라고 부릅니다(마카베오 상 1,54-59;다니엘9,27;11,31). 제우스 올림푸스신에게 바치는 첫 번째 제사는 기원전 167년 12월에 행하여졌습니다. 3년 뒤에 유다 마카베오가 승리하여 성전을 정화하여 새 제단을 세워 성전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였습니다(마카베오상 4,36-39). 봉헌절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연례 행사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겨울에 있었던 축제였습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성전 제일 끝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님과 유다인 지도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메시아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였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때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왕으로 흔희 상징되었는데, 그 왕은 주님의 도움으로 평화의 계약을 새롭게 맺어 온 세상을 통일시킬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되풀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맞지 않는 대답을 하는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유다인들을 실망시키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도사업에 방해될지 모르는 어떤 소문도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메시아 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상은 외국인 억압자들을 전복시킬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구세주의 상이였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메시아상은 유다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윤곽이 잡힙니다. 다윗 왕정시대 초기에는 기름 부음 받은 왕들은 하느님이 백성에게 보내 주신 구세주였습니다. 후에 가서 신통치 않은 왕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되자 다윗 왕 같은 왕이 오실 것을 열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배 이후에 다윗 가문이 더 이상 권좌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자,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하기 위해 보내신 가장 위대한 왕을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승리를 거두어 주셨던 것 같이 유다인 역사 안에서도 개입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을 고대하였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며 민주적인 색채를 띄우게 된 이러한 메시아의 개념은 항상 그들을 붙어 다녔으며, 이것이 유다인 사고방식 속에 발전되어 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개념이 예수님께서 생존하시던 시대에만 변질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개념의 참된 의미를 찾아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를 새롭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서,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맛보지 못하였던 새 세상을 소개하려고 몸부림치셨던 것입니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지 않는 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릅니다. 목자는 양들을 하나하나 다 식별하며, 양들도 목자의 음성과 모습을 알아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관계, 이것이 착한 목자와 양들의 관계인 것입니다.

    비가 와서 여러 목자가 한 동굴에 자기 양들을 데리고 들어가도 나올 때 한 목자가 먼저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그 목자의 양들만 따라 나옵니다. 어느  신부님이 그들과 함께 목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동지방의 “와디”는 평상시에는 메말라 있다가 비가 오면 커다란 강을 이룹니다. 그래서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동굴 속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동굴 속으로 피신을 하면 여러 목자의 양들이 섞이게 되는데 그 신부님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의 양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목자들은 웃었습니다.

    “비가 그치면 보십시오”

    비가 그치자 목자들이 하나 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자가 노래를 부르며 나가자 그 목자의 양들만 따라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하도 신기해서 그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가 노래를 부르고 나갔는데 돌아보니 한 마리도 안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또한 양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양들을 위해서 몸을 바쳐 희생하는 목자야말로 참 목자인 것입니다. 이 목자는 또 모든 양들이 안심하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이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반면 도둑은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며,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백성의 지도자들 즉, 대사제,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등이 목자로 불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목자 없는 양 떼로 바라보십니다. 목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목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의 율법은 600여개나 되고, 조상 전래의 규정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그것을 다알지도 못하고, 더구나 모조리 지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인 지도자들의 눈에는 일반 대중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부터 목자들과 대중 사이에 장벽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참된 목자가 있습니다. 자기 양들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수난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참된 목자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 우리 모두는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길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양 우리에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양들은 아들 안에 있는 동시에 아버지의 전능하신 손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양들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는 아들과 협력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아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어느 날, 번개와 벼락이 쳐 깻묵을 보관하고 있던 헛간에 불이 붙었다. 양떼들이 깻묵 타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달려와 빨갛게 불타고 있는 깻묵더미 앞으로 자꾸만 가려고 하였다. 이를 본 목자는 급히 달려가 양떼들을 불구덩이에서 떼어놓기 위하여 작대기를 휘둘러 댔다. 한 무리를 떼어 놓으면 다른 무리가 불을 향해서 달려들고, 이러는 가운데 다행히 불길이 잡혀 양떼들은 살긴 살았지만 뜨거운 불기운 때문에 얼마나 기진했던지 몇 주일을 빌빌대었다.


    한 사람이 물었다

    “양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갈 때 화나지 않으셨습니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목자는 대답을 했다.

    “양들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양들이 깻묵냄새에 취해서 불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막는 것 뿐이지요. 깻묵창고에 또 불이나면 양들은 또 불속으로 뛰어들려 할 것입니다.”

    깻묵냄새에 취해서 죽는 줄도 모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양들과 같이 나 또한 마찬가지로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뛰어듭니다. 나 죽는 줄도 모르고 뛰어듭니다. 하지만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나를 돌봐 주십니다. 비록 내가 지금 죄를 짓고 보잘것 없다 할지라도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사랑으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자이신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다면 그분께서는 언제나 나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 놓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유다인들에게 아버지와의 일치의 관계를 강조하시며 결론을 지으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생명을 주는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버지가 파견하신 분이십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심판하고, 생명을 주고, 가르치시는 모든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그대로 하실 뿐입니다. 두 분의 활동은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은 하나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와 예수님과는 어떻습니까? 서로 하나씩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 안에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서로가 하나씩은 아닙니까? 함께 예수님의 일을 하고, 함께 예수님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또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을 집어 들어서 치려고 합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2.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하면서 아직도 질문을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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