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유다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유다의 배반. 그리고 스승이신 예수님의 아픈 마음. 무엇으로 위로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변질된 그 마음의 원인을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하는지…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유다 이스카리옷이 수석 사제들에게 갑니다. 왜 갔을까요?“열 두 제자의 하나”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신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넘기려고 갔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중의 하나였기에 유다의 죄가 더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랑을 받은 이가 배신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가 대사제들에게 가서 돈을 요구합니다. 상품을 팔고 사는  그런 말투입니다. 얼마의 값을 받을 수 있냐는 유다의 말.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유다는 예수님 대신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받았습니다. 은전  서른 닢(30세겔)은 노예 한 사람의 목숨 값이었습니다. 세겔은 사제들이 쓰던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액수는 거느리는 종이 황소 뿔에 받혔을 때 그 주인에게 지불되는 배상금이기도 했습니다(탈출기 21,32) 하인 하녀가 사고로 죽었을 경우, 애도의 표시로 주는 돈으로 율법이 정하고 있던 금액이었습니다. 사제들은 노예 한 사람의 값으로 예수님을 샀던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값에 예수님을 넘기려는 유다. 유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보잘 것 없는 것과 예수님을 바꾸다니…, 그런데 문득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보잘 것 없는 것에 나 자신의 양심을 넘겨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화내는 내 모습을…, 유다는 30세겔이나 받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넘겨주고 있습니다. 유다의 모습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대사제들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노예 한 사람 값으로 여기는지. 그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았을 것입니다. 비록 받아들이기 싫고, 자기 자리를 잃기 싫어서 예수님께 죽음의 칼을 내밀었지만 적어도 자신들과는 다른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땅을 사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너무도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팔려고 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마지못해 그것을 팔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사정을 얘기해주자 사려고 했던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 가격에 이것을 사면 좋습니다. 그런데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당신을 위해서는 그것을 팔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땅을 팔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알려 주고 그곳을 떠나 왔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이렇게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다나 대사제들처럼 그렇게 양심 없는 사람들보다도 그렇게 양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불행합니다. 유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온통 머리 속에는 그것 밖에는 없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밀려오는 죄의식으로 가득 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신의 이유


배신자의 심리를 살려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유다는 다른 열 한 제자와 함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틀림없이 사도로서 합당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돈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요한12,6;13,29) 재정 책임을 맡을 만큼 신용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선교에 파견되고(마태10,5) 기적도 행하였을 것입니다(마르6,13).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을까요?


복음서의 기록을 읽어 보면 그의 마음에 차차 금전에 대한 집착과 탐욕이 깃든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수위권을 받고 요한이 특히 예수님께 사랑받는 것을 볼수록, 그의 마음에는 시샘이 싹텄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는 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유다도 회계 책임자로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믿음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복음서에 쓰여 있는 그의 결점은 탐욕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후에 일어난 일로 미루어 보아 전부터 어느 정도 의혹의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고, 곧 그가 맡은 직책을 이용하여 도둑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요한12,6).


그런데 우리가 알 수 있는 유다의 배신 동기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몸을 바쳐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을 접었고, 그러다보니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보상이나 퇴직금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탐욕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만일 어떤 원한을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다면 돈으로 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나 요한에게 원한이 있었다면 게쎄마니 동산에서 두 사람도 최고의회의 감옥에 가두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오만과 질투심을 복음서에서는 살펴 볼 수 없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금전 욕심만이 보일 뿐입니다.


좌우지간 그가 물질에 욕심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왜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왜 그토록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했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유다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다의 뒤를 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과월절과 무교절 축일은 같은 축일이 아니었습니다. 과월절은 닛산 14일 밤부터 15일 밤까지의 축일이었고, 무교절 축제는 니산 14일에서 21일까지 일주일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 두 가지 축일이 혼돈되었기에 이 일주일간을 과월절 또는 무교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무교절 첫날은 해방절 양을 잡는 날을 말합니다. 해방절은 유다교 월력으로 니산 달 15일입니다. 서산에 해가 지면서 하루가 시작되니, 해가 지면서 니산 15일 해방절 축제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우선 해방절 만찬부터 들었습니다. 이제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후 2-6시에 성전에서 가족마다 어린양 한 마리씩 잡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구가 적은 때는 몇 집이 어울러 어린양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해방절 준비일은 누룩 없는 빵만 먹는 무교절 축제 첫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부터 무교절 축제는 여드레 동안 계속됩니다. 따라서 해방절 준비일 겸 무교절 첫날에는 누룩 넣은 빵을 집 안에서 말끔히 없애고 누룩 없는 빵을 넉넉히 마련해야 합니다.


이 의식은 유다인들이 벌이는 다른 만찬과 대개 같지만, 여기서는 어린양의 고기가 주식을 이루며 모든 의식은 좀더 축제 분위기에 쌓입니다. 이 의식에는 여러 가지 순서가 있는데 그 사이에 가장이 이야기를 하고, 기도가 바쳐집니다.


이 저녁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그 밤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하나의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세운 것이며 그들의 구원을 위한 직접적인 개입으로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이 식사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해위를 해마다 되살려 기념하는 향연입니다.




과월절의 만찬은 적어도 열 명에서 스무 명까지 한 조가 되어 행하였고, 식사를 행하는 집주인이나 혹은 대표자가 그 주최자가 되었습니다. 알맞은 방을 마련하고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과  haroseth(소스의 일종)과 상치와 포도주를 준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물 항아리를 지고 당신들에게로 마주 올 것이니 그를 따라가시오.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데서 집주인에게 말하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준비하십니다.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마지막이라는 것, 언제나 슬프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성 밖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방을 빌려줄 사람의 이름을 밝히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었고, 이름을 밝히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지 않을까 염려해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밝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의 날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유다인에게 니산 14일 밤은 니산 15일의 시작이었습니다.


니산 14일밤(15일 시작)- 마지막 만찬과 게쎄마니에서의 체포(마태26,17-56)


니산 15일(금요일)- 무교절 축일의 시작, 예수님 재판, 판결, 십자가 처형, 오후 세시경 사망, 저녁 전에 매장(마태27,57-61)


니산16일(토요일 대안식일)-무덤을 지켜 달라고 유다인이 빌라도에게 요청함(마태27,62-66)


니산17일(주일)-이른 새벽, 부활, 부인들과 사도들에게 나타나심(28장)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막지는 않으십니다. 내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도 아시고, 내 마음에 잘못을 품고 있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싸워서 이기길 바라십니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제자들은 저마다 물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사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크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즉시 제자들이 유다를 축출해 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당시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으니 손으로 음식을 집어서 먹습니다. 빵과 고기 채소 등을 집어서 소스에 찍어(담가서) 먹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예수님과 함께 손을 넣었습니다. 유다의 어쩔 줄 모르는 눈빛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유다. 나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신앙인으로 영세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하지만 예수님과 결코 함께하지 않는 “나” 입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나입니다. 비록 이런 모습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저에게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다의 선택이 불행합니다.




그때 유다도 나서서 이런 말을 합니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유다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모두에게 폭로될까봐 두려워 다른 사람들이 말 한 후에 자신도 말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놈!”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용하게 말씀하셨을 것입니


다. 공동번역에서는 “그것은 네 말이다”


라고 번역했었습니다. 영문에서는 “You have said so.” 라고 번역되었고, 새 번역에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네 말이다.”라는 것이 더 극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제가 예수님 사랑하지요!”라고 여쭈었을 때 “그건 네 말이다.”라고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과월절과 무교절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는지 옆 사람에게 설명해 주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2. 유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서 유다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혹시 나도 매 순간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를 되풀이 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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