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몇몇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슬픔은 기쁨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의 한계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눈을 돌리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13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이 두 제자는 여자들이 돌아왔을 때 사도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부활하신 그 날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삼심리쯤 떨어진 곳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60스다지오(스타디온)이라고 했습니다. 1스다지오는 185미터이니 그들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에서 11키로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느 그리스말 고사본은 시나이 사본과 같이 60스다지오라고 하지 않고, 160 스다지오라고 썼다. 그러나 불가따 편이 비판적으로 옳다고 여겨진다. 160이라고 고친 것은 엠마오를 암와스 니코폴리스와 같은 곳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전설은 엠마오를 니코폴리스와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암와스 니코폴리스는 예루살렘에서 176스다지오의 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그 날 엠마오까지 갔다가 같은 날 밤, 아직 사도들이 깨어 있을 때에 돌아 올 수는 없다.


요세푸스가 예루살렘에서 약 60스다지오의 거리에 있는 어느 엠마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곳이 예루살렘에서 얏파에 이르는 지금의 고로니에였다고 하였으나 고로니에는 예루살렘에서 겨우 30 스다지오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루가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말하는 엠마오는 고르니에의 북서쪽에 있는 콘베이베, 혹은 길리에드 엘 아나프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60스다지오의 거리에 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이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스승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온 여자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것은 그 빈 무덤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 인도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빈 무덤 이야기를 듣고 부활을 믿게 되었다면 제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한 나그네를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십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 또한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지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알아 뵙지 못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성경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예수님께서는 늘 내 옆에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에 관해서. 그래서 옆에 동행이 있지만 그분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과 대화하면서 그들은 가슴 뜨거움을 느끼게 도딥니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화에 끼어드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멈추어 섰습니다. 생각 만해도 눈물이 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그들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클레오파스는 마리아의 남편(요한 19,25)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당황을 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사람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모를 수 있냐고…,”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무슨 일이냐?” 예수님께서는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듣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클레오파스는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도록 파견을 받은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신 일과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명하고도 남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받아들였지만 대사제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설명을 합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생각하고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게 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다는 것을 제자들은 고백합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그리스도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즉 강력한 힘을 가지고,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이스라엘 땅 안에서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실 분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세상적인 메시아로 생각하는 것을 걱정하셨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많은 교육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따르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것이 벌써 사흘째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클레오파스의 말투에서는 불신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여자들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빈 무덤을 보고도, 천사들의 말을 듣고도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시 살아나셨다면 왜 자신들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시는가?…이 두 사람은 희망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예언에 있어서 그들은 영광의 나라의 광채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었지, 그 참뜻과 가르침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적인 야망에 집착하여 소경이 되어 있던 그들은 이 세상의 구원사업을 하시는 메시아의 인격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받아야 할 수난은 섭리적인 계획에 따른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지금 그 계획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실현되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연결시켜서 당신에 관한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메시아의 수난, 치욕, 죽음이 그 영광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예전 공동체 성가에 나와 있던 “엠마우스”라는 성가가 생각납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우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오나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되었습니다.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가 되어 예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문득 제자들의 마음이 돋보입니다. 나보다 나은 신앙의 스승을 모시려는 마음, 자신들의 무지한 머리를 깨우쳐 주시는 분과 좀더 함께 있으려는 마음.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내 삶 안에서도 나보다 나은 스승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뵌 것입니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자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보통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빵을 떼어 주시는 모습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항상 하시던 동작을 보고서 그들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항상 듣던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알아 뵌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빵을 떼었기에 그 모습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눈앞에 앉아 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사라져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가끔은 말씀을 읽을 때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결코 뜨거움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말씀을 대해 보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전에는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살아 숨쉬기 때문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하십시오.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그들은 즉시 일어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밤길을 걸었습니다. 기쁨에 넘쳐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기쁨을 전해 주었습니다.


11킬로미터를 그 밤에 다시 돌아가는 제자들. 성당에 올 때 어떤 분들은 너무 멀어서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신앙은 즉시 움직이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돌아섰습니다. 다시 제자들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면, 나 또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11킬로미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2시간 반을 걸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기쁨이 내 안에서 흘러 넘치기 때문입니다.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보니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기쁨에…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엠마오에서 돌아온 제자들도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기쁨을 당신께 전합니다.”나 또한 그렇게 부활의 증인으로서 형제 자매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비신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2.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즉시 밤길을 달려 교회 공동체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까?


이 글은 카테고리: 지난 묵상 보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