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전쟁 Turkenkrieg

  터키 전쟁 ~戰爭  Türkenkrieg

  십자군 운동은 터키를 겨냥한 전쟁이었다. 십자군 운동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터키의 지배로부터 성지를 해방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전쟁을 ꡐ터키 전쟁ꡑ이라고도 한다. 터키 전쟁은 아콘(Akkon, 1291년)의 함락으로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ꡐ터키 전쟁ꡑ이라는 단어는 특히 터키에 의해 유럽 남부 지역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1361년 아드리아노플(Adrianopel)은 오스만 터키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 오스만 터키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리스의 교회는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잔틴의 황제들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황제들은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로마와 그리스 교회의 일치를 약속하였다. 하지만 황제들의 요청은 수용되지 못하였다. 1453년 5월 29일 터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이 점령을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서는 불행한 사건이라고 탄식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1453년 9월 30일 십자군 운동을 제창하였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교황이 비잔틴을 보호하기보다는 예술과 학문의 증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의 후임자 갈리스토 3세는 터키의 공격으로부터 발칸 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대 터키 전쟁을 수행하면서 헝가리아 알바니아를 지원하였고,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교황은 바티칸의 귀중한 예술품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황직에 즉위하면서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해방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을 서약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노력은 얼마간의 결실을 거두기도 하였다.


  1456년 7월 22일 벨그라드를 해방시켰고, 그 결과 터키는 퇴각하였다. 하지만 유럽 군주들의 불화로 이 승리를 효과 있게 활용하지 못하였다. 동시에 교황은 필요한 지지를 제대로 확보하지도 못하였다. 독일에서는 대 터키 전쟁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심지어 파리 대학은 1456년 교황에 반대하여 공의회를 개최하라는 요구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황 비오 2세의 선출 전, 새로운 교황은 터키 전쟁의 계속적인 수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선거 공약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새로 선출된 교황 비오 2세는 1458년 10월 12일 만토바(Mantua)에서 개최될 범 유럽 회의를 소집하였다. 교황 비오 2세는 터키 전쟁을 통해 야기된 어려운 처지를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로 이해하였다. 교황 비오 2세는, 유럽의 각 국가들은 적절한 대표들을 만토바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회의는 1459년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대 터키 전쟁의 수행이 결의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회의에는 단지 소수의 대표들만이 참석하였다.


  교황 비오 2세는 1461년 메흐메드(Mehmed) 2세 술탄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은 술탄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술탄이 세례를 받을 경우 교황은 술탄에게 제국의 왕관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1463년 10월 교황 비오 2세는 재차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교황은 십자군의 선두에 나설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1464년 십자군 운동의 출발지인 안코나(Ancona)에 지접 갈 준비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안코나를 향해 가던 도중 서거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황 비오 2세의 십자군 운동에 대한 열망은 무산되고 말았다.


  교황 비오 2세의 후임자 바오로 2세 역시 선거 공약을 통해 대 터키 전쟁의 계속적인 수행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황은 십자군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였다. 교황 바오로 2세는 헝가리와 알바니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나, 1467년 터키는 알바니아를 점령하였고, 1470년에는 터키에 대항하던 마지막 보루였던 베네치아의 네그로폰테(Negroponte)마저도 점령하였다. 터키는 1480년에는 오트란토(Otranto)도 점령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교황 식스토 4세에게 피렌체의 메디치가와의 불화를 종식시켜야 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1481년 터키는 이탈리아를 떠났으나 교황은 터키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재임 기간 중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술탄 바야시드(Bajasid) 2세가 자국 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아무런 공격전을 수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다소간의 평정의 상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1495년 초부터 술탄은 다시금 대 유럽 침공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래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1498년 유럽의 군주들을 로마에서 개최될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이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대 터키 항전을 십자군 운동과 연계시키려는 교황의 노력도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교황 레오 10세 재임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터키의 위협은 다시금 매우 우려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레오 10세는 이러한 위협에 대응할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교황 레오 10세의 후임자 하드리아노 6세는 1522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 특사 프란체스코(Francesco Chieregati)를 파견하여 대 터키 항전에 필요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제국 의회는 신앙의 분열을 둘러싼 문제 해결에 열중한 나머지 터키의 공격에 대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유럽의 군주들로 하여금 대 터키 항전을 위한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도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지도 역할과 이탈리아 지배를 둘러싸고 노출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은 이러한 공감대의 형성을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후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교황 선출 후 행한 첫 번째의 담화에서 신앙의 분열 문제, 그리스도교 군주들의 일치 문제 그리고 터키의 침공으로부터의 방어 등 자신의 재임 중 해결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난제를 지적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군대가 로마 시를 점령하고 약탈한 일명, ꡒ로마의 약탈ꡓ(Sacco 야 Roma)로 종결된 당시 이탈리아 내의 지배권 다툼으로 인해서 교황에게 터키인의 침공 위협이라는 문제는 거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1526년 술탄 술리만(Suliman) 2세는 모아크(Mohacs) 전투에서 승리한 후 헝가리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529년에 있었던 비엔나 공격에서는 실패하였다. 1571년 터키는 키프로스(Zypern)를 점령하였다. 교황 비오 5세는 로만족을 대 터키 항전에 공동으로 참여할 동맹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코린토 만에 위치한 레판토(Lepanto)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돈 후안 다우스트리아(Don Juan d Austria)는 터키를 궤멸시켰다. 교황은 이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572년 ꡐ로사리오 모후ꡑ축일을 교회에 도입하였다(사실 이 축일은 이미 도미니코회와 예수회에서 기념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군주들을 대 터키 항전을 위한 동맹국으로 묶기 위한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미 비엔나를 공격하여 실패하였던 터키는 1664년 프랑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 역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대 터키 항전을 위한 중요한 방안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서거하기 얼마 전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과 다른 군주들에게 호소한 대 터키 항전에 필요한 협조 요청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1673년 11월 11일 대 터키 전에서 승리한 폴란드의 국왕 요한 소비에스키(Johann Sobieski)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1675년 소비에스키는 렘베르크(Lemberg) 방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터키 전쟁은 1683~1699년 사이에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1683년 터키는 재차 비엔나 공격에 나섰다. 스타렘베르크(Starhremberg)의 뤼디거(Rüdiger) 백작이 이 공격을 방어하였다. 이 방어전에는 로트링겐(Lothringen)의 칼 공작과 폴란드의 국왕 소비에스키의 구원군이 가담하였고, 1683년 9월 12일 칼렌베르게(Kahlenberge)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로트링겐의 칼 공작은 1686년 오펜(Ofen)을 공략하였고, 모아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689년과 1691년 바덴(Baden)의 빌헬름(Ludwig Wilhelm) 후작은 니쉬(Nisch)와 슬란카멘(Slankamen)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끝으로 사보이(Savoyen)의 왕태자 에우제니오(Eugen)는 1697년 젠타(Zenta)의 전투에서 술탄 무스타페(Mustafe Ⅱ)에게 승리하였다. 그 결과 터키는 헝가리 지역 – 테메스바르(Temesvar)의 보나트(Bonat) 지역을 제외하고 – 과 오스트리아의 지벤뷔르겐스(Siebenbürgens)로부터 퇴각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매우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아울러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화평을 중재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 터키 항전을 위한 동맹군을 이끌어 내는 데 있어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교황은 군대의 지원을 위해 일백오십만 굴덴(Gulden)을 지출하기도 하였다.


  계속해서 교황은 대 터키 항전을 위한 동맹군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외교적 활동을 위해 엄청난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715년 여름 터키는 다시금 유럽 침공을 감행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대 터키 항전을 위해 거액의 재정적인 지원을 시작하였다. 1716년 8월 5일 에우제니오 황태자는 페터바르다인(Peterwardein)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1717년 8월에는 벨그라드(Belgrad)를 되찾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계속되는 전투에서 1718년 이후 되찾았던 지역을 다시금 터키에 빼앗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