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청년의 예수님 따르기

 

부자청년의 예수님 따르기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물로는 채울 수 있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말입니다.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예수님 발치에 엎드렸지만 나름대로의 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그들 병에 대한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영생의 방법을 얻고 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 청년은 예수님께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도 꿇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예수님께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들어왔고 또 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시는 그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호칭을 거부하십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잠깐 웃어볼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이랑 고스돕 치시면 매번 지셨나 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라고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호칭을 거부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선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청년이 말하는 선하다는 개념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모르는 젊은 청년에게는 예수님께서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선하다”고 불리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참된 완전 자체이신 하느님에게만 들어맞는 말씀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 영광을 모두 돌리시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젊은 청년은 예수님께로부터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 규정의 뜻을 권위 있는 설명으로 듣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 생활과 비교하여 율법이 무엇을 명하는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을 보면 율법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하느님께 대한 의무보다는 이웃에 대한 계명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런데 이런 계명들 중에서 부자 청년이 지키기 어려웠던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가 부자라고 설명되어 있기에 살인이나 도둑질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큰 유혹은 그가 부리고 있는 일꾼들에게 과중한 노동이나 임금의 체불, 노동에 알맞지 않은 임금의 지불 등의 부정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 청년은 뜻밖에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청년의 대답은 자신에 대한 자랑은 아닌 듯 합니다. 그의 성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인 듯 합니다. 참으로 자기가 하느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있다는 의식은 열심한 히브리인의 마음 안에는 있었습니다. 성실한 랍비들은 항상 율법의 전부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랍비들 가운데에는 인간의 윤리적 능력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경건한 사람까지도 자기의 죄 때문에 그의 의로움 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족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청년을 예수님께서는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완전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히브리인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남에게 적선을 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보화를 얻는 것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은 한 평생 적선을 베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재산을 적선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신 하늘의 보화를 약속하십니다.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 가난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푸는 일, 모든 자연적인 청빈보다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모든 것을 버리면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결정을 할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참으로 솔찍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닌 척 하지도 않고, 거짓으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라기 보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고 가는 사람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친구들끼리 복권을 사서 당첨되면 나눠 갖자고 다짐을 해도 막상 당첨이 되면 대부분 마음이 변할 것입니다. 우정도 중요하지만 마음 안에서 솟아나는 이기심을 우정이 100%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재물이 사람 마음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도 슬퍼집니다. 의인이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부자 청년. 그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성당에도 잘 나가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막상 문제가 발생하면 그 신앙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게 부자청년처럼 돌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고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를 달지 말고, 솔찍하게, “저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가 없는데요….저는 그것만큼은 어려운데요….”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큰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사도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구원받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해서 당연하게 구원을 요구하겠습니까? 그분께서 주시면 좋고 안주시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안주실 리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 될 도리를 다하고 마지막에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비결 아니겠습니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부자청년의 늘어진 어깨를 바라보면서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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