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말씀연구>
가고 싶은 곳이 있고, 가기 싫은 곳이 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는 곳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단숨에 갈 수 있고, 나를 박해하고 환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가기가 싫습니다. 직장, 가정, 학교, 성당….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나를 대합니까? 아니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주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므로 유다지방으로는 다니고 싶지 않아서 갈릴레아 지방을 찾아 다니셨다. 그런데 초막절이 다가왔다. 추수절, 또는 초막절은(판자집절, 천막절, 오두막절 등으로 번역될 수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민속적인 축제로서 가을에 추수절기 마지막에 가서 지냈다. 이 축제 동안에는 짚으로 초막을 지어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야영하던 일을 상기했다. 이 초막절은 오순절과 누룩 없는 빵은 먹는 명절(무교절)과 함께 유대인들의 가장 큰 순례 축제의 하나다.
초막절
이 명절은 유다인이 하느님의 성전에 올라가야 하는 세 명절 중의 하나였다. 이 명절은 디스리(9,10월)의 15일부터 21일까지 이렛 동안 축제로 지냈다. 이 목적은 두 가지로서, 그 해의 수확을 위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출애34,18) 일과 에집트를 나와서 사막에서 보낸 히브리이의 오랜 체류를 기념하는(레위23,42) 것이었다. 이 명절동안 모든 사람은 뜰, 길, 혹은 집의 평평한지붕 위에 만들어 놓은 초막에서 살아야 했다(레위23,42;느헤미야8,14-17). 거기에다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에 참여해야만 했다. 제물의 제단 위에 붓는 물은 씨로에의 샘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것을 가지고 하느님께 가을의 풍부한 비를 간청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예식과 색체가 선명한 행사들은 이 명절의 대중적인 색깔을 주는 것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이 명절이 1년중에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또 이 경우에 소란이 일어나는 것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이 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당신이 행하시는 그 훌륭한 일들을 제자들에게 보이십시오. 널리 알려지려면 숨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훌륭한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권하였다.
만일 예수님께서 대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백성의 갈채를 받고 환영을 받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계셨다면 더 이상 좋은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알고 있었다. 허영심의 표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가?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서 나오는 것과, 일의 성과에 대한 유혹에서 나오는 것과는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아무 때나 상관없지만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서 올라 가서 명절을 지내라. 아직 나의 때가 되지 않았으니 나는 이번 명절에는 올라 가지 않겠다.”
예수님의 대답은 부정적이시다. 아직 때가 오지 않으신 것이다. 그 때는 바로 예수님의 수난의 때이다. 예수님은 처지가 다르신 분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신을 증오하고 죽이려 하는 유다인 지도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시고 올라 가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정식 모임을 조직하여 정식 순례에 참여하여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참가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님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다.
명절 동안에 유다인들은 “예수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며 찾아다녔다. 그리고 군중 사이에서는 예수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그는 좋은 분이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니오, 그는 군중을 속이고 있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예수에 관하여 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순례 단체 속에 안 계시므로 말들이 많았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많은 이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가 없을 경우 험담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중에 그의 좋은 점을 찾아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들이 하는 대로 그렇게 나쁜 것만을 바라보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는 좋은 분이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게 나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명절 중간쯤 해서 예수께서는 성전으로 올라 가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는 명절 축제가 중반 쯤에 들어섰을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유다인들은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듯 아는 것이 많을까?” 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어!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네!”…청중 속에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서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지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이다. 하느님이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면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인지 또는 내 생각에서 나온 가르침인지를 알 것이다.
제 생각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은 정직하며 그 속에 거짓이 없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하느님의 가르치심이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느냐? 아니냐로 알 수 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내게 들려오는 무수한 말씀들. 그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교만과 과시에서 벗어나 행동하셨는가를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만을 구하셨다.
결국 유다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매일 입에 올리면서도, 입만 열었다하면 율법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코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입만 열면 하느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코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 사람들. 그 사람이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곡을 찌르신다.
너희에게 율법을 제정해 준 이는 모세가 아니냐? 그런데도 너희 가운데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도대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그런데 유다인 지도자들의 마음을 모르는 군중들은 예수니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미치지 않았소?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혹시 당신 피해망상증에 걸린 것이 아니오?.. 공포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정상이 아닌 사람의 표시이다. 이 말씀을 “당신은 마귀들리지 않았는가”하고 번역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것은유다인이 정신병을마귀의 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말에는 답하지 않으시고 유다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안식일에 일을 한 가지 했다고 하여 너희는 모두 놀라고 있다. 모세가 할례법을 명령했다 하여 너희는 안식일에도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있다. – 사실 할례법은 모세가 정한 것이 아니라 옛 선조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 너희는 이렇게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베풀면서 내가 안식일에 사람 하나를 온전히 고쳐 주었다고 하여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냐?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라.”
유다인 지도자들이 베짜타의 못에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한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것을 가지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당시 “할례와 관계 있는 모든 일은 안식일오도 행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모세의 율법의 실정법보다 뛰어난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이라고. 유다인들은 어리석게도 율법의 깊은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문자 그대로 나타난 뜻에만 주의하여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서 더러는 “유다인들이 죽이려고 찾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저렇게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데도 말 한 마디 못하는 것을 보면 혹시 우리 지도자들이 그를 정말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것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 대한 지도자들의 태도를 알고 있던 군중은 예수님이 이처럼 대담하게 성전에 서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기회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 몰래 예수님을 잡아갈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참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의문이 터져 나온다. 메시아는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게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대중의 전통에는 메시아가 완전히 숨어서 존재하신 후에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든가, 혹은 그가 태어나실 곳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정말 알고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정녕 따로 계신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유다인을 비난하신 예수님의 그 선언은 유다인 지도자들을 다시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제 안식을 어긴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 하고 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기, 곧 반대자들의 손에 넘겨지도록 섭리된 그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을 향하여 노골적으로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나 자신을 향하여 노골적을 분노를 터뜨린 적도 있습니까? 오늘 유다인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혹시 그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2.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과 험담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혹시 당사자가 없을 때 그를 험담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반대의 경우, 그렇게 험담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당사자가 없을 때 그를 험담하기 보다 그를 칭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에디시: 요한복음에서는,유달리 말많으신?예수님..역시,뒷담화?많이하져..판단하구,험담하구,사실,판단의 전문가는,종교인듯함다.. [04/04-13:47]
에디시: 그럼,노골적인분노?검,하느님께 대한모독?에 대해,어케 대처하는것이 옳은지?? [04/04-13:48]
에디시: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서 나오는지,일의성과에 대한 유혹? 정말,어려운거 같아여..자신을 드러내려 하니깐,것두,하느님의 이름으로..하느님이름이 팔지?않았음 싶슴다^^;; [04/04-1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