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 책을 딱 한권 읽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 책에서 봤어…” 그리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나… 오늘 복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책을 딱 한권 읽은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또는 “저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추수절, 또는 초막절은(판자집절, 천막절, 오두막절 등으로 번역될 수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민속적인 축제로서 가을에 추수절기 마지막에 가서 지냈다. 이 축제 동안에는 짚으로 초막을 지어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야영하던 일을 상기했다. 이 초막절은 오순절과 누룩 없는 빵은 먹는 명절(무교절)과 함께 유대인들의 가장 큰 순례 축제의 하나다.
이 시절에는 그 다음해에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 가장 적절한 시기였는데, 사람들은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였다. 초막절 동안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 예루살렘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전 언덕 남동쪽에 있는 기혼샘으로 행렬을 지어 나갔는데 이 기혼샘의 물은 실로암 못으로 흘러 들어갔다. 사제가 금으로 만든 물병을 기혼샘의 물로 가득 채운 다음 행렬은 알렐루야 노래를 부르며(시편113-118) 왼손에는 도금양 나무가지와 수양버들가지를 종려나무가지로 묶은 다발(lulab)을 들고 성전으로 돌아갔다. 이 lulab은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로부터 탈출한 다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오두막집을 지을 때 사용한 나무가지를 기념하는 것이다(레위기 23,43). 행렬이 성전 앞에 있는 희생제단까지 갔을 때 사제는 제단으로 가져온 물을 은깔대에다 부어 땅으로 떨어지게 하였다.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말씀하신다.
살아있는 물의 원천임을 자처하는 예수님의 말을 들은 군중은 즉시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생각하거나(모세는 광야에서 바위에서 물이 솟게 하여 백성들에게 물을 마시게 했지요)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성서에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군중들은 은연중에 메시아가 다윗가문에서, 베틀레헴에서 태어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나자렛이 아니다. 단지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웠을 뿐이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르다. 오늘 이 순간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 또한 서로 다르다.
이렇게 의견이 분열되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포해 오라고 성전경비병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빈손으로 와서 이렇게 고백한다.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유다인의 최고의회가 보낸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경비병들을 닥달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경비병들은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보고 느낀 것을 솔찍하게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솔찍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율법을 알고 있는 자기네 지식 계급에 속한 지도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주장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고 했는데, 성서에 대한 지식이 없는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을 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적어도 백성의 지도자인 그들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노력했어야 되지 않을까?
지도자는 자신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의 의견을 모으고, 백성의 뜻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당혹스럽게 만든다.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 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백성의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라. “저주받을 족속”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들이 먹고 살 수 이는 이유가 바로 그들이 저주하는 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으니…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주머니에서 생활비를 받고 살아간다. 결국 백성들의 고용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 주인을 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습은 절대로 아니다. 절대로. 교회의 지도자 또한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된다. 절대로..
하지만 그들 중에도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니고데모.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 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
진리 편에 선 니고데모의 한 마디 말!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표징을 보라고 느고데모는 충고한다.
가끔은 어떤 자리에서 남을 판단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상황이 곤란하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니면 동조하거나…
니고데모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그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는 최고의회 회원으로서(3,1), 율법의 박사로서(3,10)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그 강력한 적대행위와는 달리 그가 율법학자로서 예수님을 위해서 한 해명은 법률의 움직일 수 없는 원칙 위에 서 있었다. 정의의 원칙위에 말이다.
예수님께 대해 아무 편견이 없었다면 니고데모의 말에 수긍을 하였을 것이다. 고소된 사람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문제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벌한다는 것은 확실히 율법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전부터 별러왔었으니 들릴 리가 없으리
그들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모욕을 퍼 부었다.
“당신도 갈릴레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레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책을 한권밖에 읽지 못한 사람의 단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니고데모의 모습과 다른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분노하고 당황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내 뜻만을 주장하는 나. 분명 상대방의 말을 한번만이라도 더 깊게 듣는다면 오해를 풀고, 이해를 하고, 따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고집만을 부리고 있는 나.
다른이들의 말을 잘 들을 수 있고, 내 것만이 옳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하여 또 다른 책들을 읽어봐야 하겠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군중들의 입장, 성서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 그리고 나의 입장.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과 신앙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신앙의 잣대로 세상을 보지 않고, 신앙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신앙의 잣대 위에서 살아가기도 하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는 것. 그런데 그게 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것만을 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 들일 수 있을까요?
2.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참 멋지지 않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말인데, 당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디시: 저두,니고데모와 같은,순백의 투명한 맘으로,사물을 사람을,세상을 보구싶슴다..*^^*신부님,절대로,절대로,절대로,아니다..세번쓰셨슴다 [04/05-10: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