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말씀연구>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예수님, 유다의 배반과 배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토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나갈 때 일어나는 두려운 마음,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이런 저런 경우를 언제나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좀 믿어 달라고. 내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요, 그 답을 풀 수 있는 진리요, 평온함을 주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엄마 장에 갔다 올게”


“엄마 가지마. 무섭단 말야”


“엄마가 갔다 오다가 맛있는 것 사다줄게. 엄마 장에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


“알았어 엄마! 빨리 와야 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의 일치된 공동체를 시사하십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셔야만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가리키시지만 그 전에 예수님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죽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천상세계에서 거처할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하늘에서의 자리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과 나의 함께 함은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마 사도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는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제자들의 길입니다. 이것이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길도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그 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라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지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때문에 길이십니다.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길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내가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기에 나는 그분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의 목적지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7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아들에 대한 인식은 아버지께 대한 인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정말 멋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의 부모님은 누구일까? 어떻게 자녀를 저렇게 아름답게 성장시켰을까?…자녀를 보면 그 안에서 부모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또한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도 알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벌써 아버지를 보았다고 확신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필립보 사도가 봉창을 두드립니다.


8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이었고,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아버지를 보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형제 자매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내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9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필립보의 청은 아직도 그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필립보의 믿음은 확실했지만 충분치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답답하십니다(내 말이 너무 어려웠나?(내게그가 너무 어렵나…)….)


하지만 필립보 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지금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셨던 것을 회상시키십니다. 자신이 말씀하실 때는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또 행하실 때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즉 아버지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들어서 믿게 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을…그래도 못 믿겠다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을 하십니다.


12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게 이루어 주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안 들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만사가 순조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바란다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잘 기도한다면 그것은 훨씬 순조롭게 되어 갈 것이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님 안에서 길을 찾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길에 서 있습니까?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고, 어떤 생명을 원하고 있습니까?




2. 필립보의 청은 우리 모두의 청일 것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들을대신해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형제 자매의 모습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모습을 외면하고, 내가 보여 주어야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워 놓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220.89.237.122 그린이: 봉창남?필립보사도!이백데나리온어치?그랫두,귀엽지않아여?? [05/04-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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