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성서적 근거(구약성서에 나타난 죄의 용서)

 

2.  성서적 근거




2.1.  구약성서에 나타난 죄의 용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거듭 죄를 범하고 심판을 받으면서 회개와 용서가 명시적이고 절박한 주제로 등장한다. 우선 예언자들은 죄와 그로 말미암은 불행한 운명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스라엘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호화스럽게 나날을 살고, 민족의 멸망을 염려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이제 유형을 가리라”(아모 6,7). 이스라엘은 “생수가 솟는 샘”인 자신의 하느님을 저버렸고, 이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판 갈라져 새기만하는 물 웅덩이를 갖게 됐다. “너희의 못된 짓이 너희 자신을 벌한다”(예레 2,13.19).


죄와 그로 인한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했다.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구약성서는 이에 대해서 두가지 행동을 언급한다. 첫째로는 말을 통한 실현이다. 즉 죄의 고백 (2 사무 12,13; 에즈라 9,6-10; 시편 51,5-6), 불행을 슬퍼하는 것 (에즈라 9,13; 느헤 9, 36-37; 요엘 1,5.8. 13-14) 그리고 자비의 간청 (요엘 1,14; 2,17), 더러움과 죄을 씻어 주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시편 51,4.9.12) 등이다. 두번째는 표징적 행동이다. 예를 들어서 공동체 전체의 모임 (에즈라 9,4; 10,1; 느헤 9,1; 요엘 1,14; 2,16-17), 단식 (느헤 9,1; 요엘 1,14), 참회의 옷을 입는 것 (느헤 9,1; 요엘 1,13), 잿 속에 앉아 있거나 그 속에서 뒹굴고, 머리 위에 재를 뿌리는 것 (예레 6,26; 에제 27,30; 요나 3,6), 번제물 (레위 16,1-19), 속죄양의 추방(레위 16,20-22), 정화수를 자신에게 끼얹게 하는 것(시편 51,9)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참회 예식이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은 않았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하느님의 안배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서 레위 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예식들이 더 이상 진정한 회개의 표시가 아니라 회개를 대신하는 수단이 될 때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자들에 의해서 격렬하게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서 아모 5,21-23; 이사 58,5). 왜냐하면 올바른 참회는 행동을 고치는 것,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분야에서 변화되는 것 (이사 58, 6-7; 아모 5,24)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예식과 이웃을 위한 행동이 서로 대치되는 경우, 두번째의 것이 우선권을 갖는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호세 6,6). 바로 이말을 예수께서는 마테오 복음서에서 안식일 계명의 준수와 자비의 실천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인용하신다 (마태 12,7; 9,13도 그와 유사함).


죄지은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하는데, 구약성서에서는 이 회개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예레 3,22).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예레 31,33).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 51,12).




2.2.  예수에게 나타난 죄의 용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전통 속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실질적인 회개 없는 겉치레의 예식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 서로간의 화해를 종교적 예식보다 우위에 둔다. 성전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마태 5,23-24 참조). 하지만 예수에게서 나타난 죄의 용서는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2.2.1. 용서의 구체적 실현


이스라엘 전통에 따르면 대제관이 화해의 날에 성전에서 하느님이 제정하신 참회 규정의 치밀한 세칙에 따라 백성 전체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직접 각 개인에게 사죄를 선언하였다. “아들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가 개별적으로 사죄를 선언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행동은 마르꼬 복음이 전하듯이 당시의 경건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예수께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사죄권을 스스로 행사한 것은 이스라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 고유의 권리에 대한 간섭과 침해로, 하느님의 이름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실상의 신성모독, 오만에서 나온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이러한 사죄권 행사는 율법에 충실한 이들의 격렬한 분개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예수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2.2. 선행조건 없는 용서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들로 간주된 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하고(루가 19,1-10),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마태 2,13-17 병행);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아 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가 7,36-50),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 수호자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었다(요한 7,53-8,11). 이 모든 것은 예수가 도발적일 만큼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연대를 취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낸다.


예수가 당시에 경건한 이들이 멀리한 죄인들과 연대를 취하였던 것은 단지 사회적, 인도적인 차원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를 잘 표현하는 것이 죄인들과의 공동의 식사이다. 근동 사람들에게 식탁의 공동체란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이 사람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1) 이런 맥락에서 경건한 이들에게 도외시 된 죄인들과의 함께 하는 식사는 예수에게 단지 보다 자유로운 관용과 보다 인도적인 마음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의 사명과 그가 선포한 복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는 죄인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이를 하느님 품안에로 모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고(참조: 마태 23,37), 이를 위해서 식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는 식탁에 죄인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그들에게 선포하고 실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의 종교적 통념을 뒤흔드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조건 없이 죄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에게 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우선 회개와 보속, 그 다음에 용서’라는 전통적인 순서를 의문시한다. 구약에서 용서는 선업(율법 준수, 맹세, 희생, 자선)을 통해서 죄를 보속한 사람에게만, 즉 참회 규정을 완수해서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죄인은 심판과 벌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직 참회하지 않은 죄인에게 먼저 용서를 베푼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 있든, 회개의 준비가 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간에 하느님은 우선 전제나 조건 없이 용서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가장 깊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회개 개념, 즉 하느님이 인간을 회개하도록 이끌면서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에 의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죄스러운 과거가 선천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용서는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회개를 선행한다. 이는 – R. 불트만에 의거한다면 – 사실상 유다의 하느님 사상을 철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수는 동일한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그러나 이 하느님은 예수 이전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궁극적으로, 극단적으로 행동한다”.2)




2.2.3. 용서는 회개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선행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하지만 그들에게 용서에 대한 응답, 즉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요구하신다. 이런 점은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나타난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왕으로부터 많은 빛을 탕감받은 종이 얼마 안 되는 빛을 진 자신의 동료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자 왕은 그를 꾸짖는다.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는 그가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예수의 용서는 선행조건은 없지만, 회개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미 주어진 용서마저도 무효화될 위험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준비 자세와 연결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마태 6,12; 참조: 18,25-35).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끼리의 용서가 내적인 연관을 이룬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하느님에게 용서 받는다함은 죄인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의 운동에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참여할 때에만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 감싸고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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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2.  성서적 근거


    2.1.  구약성서에 나타난 죄의 용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거듭 죄를 범하고 심판을 받으면서 회개와 용서가 명시적이고 절박한 주제로 등장한다. 우선 예언자들은 죄와 그로 말미암은 불행한 운명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스라엘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호화스럽게 나날을 살고, 민족의 멸망을 염려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이제 유형을 가리라”(아모 6,7). 이스라엘은 “생수가 솟는 샘”인 자신의 하느님을 저버렸고, 이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판 갈라져 새기만하는 물 웅덩이를 갖게 됐다. “너희의 못된 짓이 너희 자신을 벌한다”(예레 2,13.19).

    죄와 그로 인한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했다.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구약성서는 이에 대해서 두가지 행동을 언급한다. 첫째로는 말을 통한 실현이다. 즉 죄의 고백 (2 사무 12,13; 에즈라 9,6-10; 시편 51,5-6), 불행을 슬퍼하는 것 (에즈라 9,13; 느헤 9, 36-37; 요엘 1,5.8. 13-14) 그리고 자비의 간청 (요엘 1,14; 2,17), 더러움과 죄을 씻어 주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시편 51,4.9.12) 등이다. 두번째는 표징적 행동이다. 예를 들어서 공동체 전체의 모임 (에즈라 9,4; 10,1; 느헤 9,1; 요엘 1,14; 2,16-17), 단식 (느헤 9,1; 요엘 1,14), 참회의 옷을 입는 것 (느헤 9,1; 요엘 1,13), 잿 속에 앉아 있거나 그 속에서 뒹굴고, 머리 위에 재를 뿌리는 것 (예레 6,26; 에제 27,30; 요나 3,6), 번제물 (레위 16,1-19), 속죄양의 추방(레위 16,20-22), 정화수를 자신에게 끼얹게 하는 것(시편 51,9)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참회 예식이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은 않았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하느님의 안배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서 레위 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예식들이 더 이상 진정한 회개의 표시가 아니라 회개를 대신하는 수단이 될 때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자들에 의해서 격렬하게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서 아모 5,21-23; 이사 58,5). 왜냐하면 올바른 참회는 행동을 고치는 것,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분야에서 변화되는 것 (이사 58, 6-7; 아모 5,24)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예식과 이웃을 위한 행동이 서로 대치되는 경우, 두번째의 것이 우선권을 갖는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호세 6,6). 바로 이말을 예수께서는 마테오 복음서에서 안식일 계명의 준수와 자비의 실천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인용하신다 (마태 12,7; 9,13도 그와 유사함).

    죄지은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하는데, 구약성서에서는 이 회개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예레 3,22).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예레 31,33).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 51,12).


    2.2.  예수에게 나타난 죄의 용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전통 속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실질적인 회개 없는 겉치레의 예식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 서로간의 화해를 종교적 예식보다 우위에 둔다. 성전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마태 5,23-24 참조). 하지만 예수에게서 나타난 죄의 용서는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2.2.1. 용서의 구체적 실현

    이스라엘 전통에 따르면 대제관이 화해의 날에 성전에서 하느님이 제정하신 참회 규정의 치밀한 세칙에 따라 백성 전체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직접 각 개인에게 사죄를 선언하였다. “아들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가 개별적으로 사죄를 선언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행동은 마르꼬 복음이 전하듯이 당시의 경건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예수께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사죄권을 스스로 행사한 것은 이스라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 고유의 권리에 대한 간섭과 침해로, 하느님의 이름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실상의 신성모독, 오만에서 나온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이러한 사죄권 행사는 율법에 충실한 이들의 격렬한 분개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예수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2.2. 선행조건 없는 용서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들로 간주된 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하고(루가 19,1-10),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마태 2,13-17 병행);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아 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가 7,36-50),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 수호자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었다(요한 7,53-8,11). 이 모든 것은 예수가 도발적일 만큼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연대를 취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낸다.

    예수가 당시에 경건한 이들이 멀리한 죄인들과 연대를 취하였던 것은 단지 사회적, 인도적인 차원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를 잘 표현하는 것이 죄인들과의 공동의 식사이다. 근동 사람들에게 식탁의 공동체란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이 사람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1) 이런 맥락에서 경건한 이들에게 도외시 된 죄인들과의 함께 하는 식사는 예수에게 단지 보다 자유로운 관용과 보다 인도적인 마음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의 사명과 그가 선포한 복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는 죄인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이를 하느님 품안에로 모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고(참조: 마태 23,37), 이를 위해서 식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는 식탁에 죄인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그들에게 선포하고 실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의 종교적 통념을 뒤흔드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조건 없이 죄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에게 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우선 회개와 보속, 그 다음에 용서’라는 전통적인 순서를 의문시한다. 구약에서 용서는 선업(율법 준수, 맹세, 희생, 자선)을 통해서 죄를 보속한 사람에게만, 즉 참회 규정을 완수해서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죄인은 심판과 벌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직 참회하지 않은 죄인에게 먼저 용서를 베푼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 있든, 회개의 준비가 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간에 하느님은 우선 전제나 조건 없이 용서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가장 깊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회개 개념, 즉 하느님이 인간을 회개하도록 이끌면서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에 의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죄스러운 과거가 선천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용서는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회개를 선행한다. 이는 – R. 불트만에 의거한다면 – 사실상 유다의 하느님 사상을 철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수는 동일한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그러나 이 하느님은 예수 이전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궁극적으로, 극단적으로 행동한다”.2)


    2.2.3. 용서는 회개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선행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하지만 그들에게 용서에 대한 응답, 즉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요구하신다. 이런 점은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나타난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왕으로부터 많은 빛을 탕감받은 종이 얼마 안 되는 빛을 진 자신의 동료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자 왕은 그를 꾸짖는다.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는 그가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예수의 용서는 선행조건은 없지만, 회개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미 주어진 용서마저도 무효화될 위험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준비 자세와 연결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마태 6,12; 참조: 18,25-35).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끼리의 용서가 내적인 연관을 이룬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하느님에게 용서 받는다함은 죄인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의 운동에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참여할 때에만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 감싸고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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