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총론-구세사의 성사적 구조(그리스도.교회.개개의 성사)

 

3.3.   그리스도 – 교회 – 개개의 성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표징이고, 부활 이후에는 교회가 부활하여 더 이상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상징 행동 (식탁의 공동체, 안수, 도유, 세례등)을 통해서 교회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 – 교회 – 교회의 예식 행동은 각기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을 가르킨다는 점에서 상징성, 즉 성사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3.3.1.  예수 그리스도: 원성사(原聖事)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방식으로 선포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상징, 표징, 혹은 하느님의 성사라고 지칭할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의 성사라는 신앙적 확신은 내용적으로 신약성서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신약성서 후기 문헌에 나타난 그리스도 이해에서 예수의 이런 성사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는 예수를 서슴치 않고 하느님의 모상(ikon), 형상(2고린 4,4,; 골로 1,15), 혹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분(히브 1,1 이하; 1 요한 1,1; 요한 14,9)이라고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사”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바오로 서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비”(mysterion)라고 표현한 데에서 유래된다.1) 바오로는 자신은 “영광의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분”만을 선포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심오하고 감추어져 있던 지혜”(1고린 2,2.7.8), 즉 하느님의 신비라고 불렀다. 그래서 골로사이서는 단적으로 하느님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얘기한다(골로 2,2). 많은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노와 같이 영향력이 큰 교부도 예수를 “하느님의 신비”(mysterium Dei)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mysterium”을 옛 라틴어 성서 번역에서는 “sacramentum”으로 번역하였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sacramentum Dei”, 즉 하느님의 성사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의 도구로서 구원을 일으키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본 성사”2)로 이해하였다. 루터도 아우구스티노의 말3)을 받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서는 오직 하나의 성사만을 알고 있는데, 이는 주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4)


19세기에 교회의 신학을 혁신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성사성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성과의 관련을 좀 더 자세하게 숙고한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大 성사”라고 일컬었다. 20세기에는 이런 생각을 수용하여서 첫번째로 칼 펙케스(Carl Feckes, +1958)가 1934년에 예수 그리스도를 “원성사”(Ursakrament)라고 표현하면서, 교회와 개개의 성사의 “성사적 세계”는 이에 뿌리를 둔다고 보았다.5) 스킬러벡스(E. Schillebeeckx)는 토미즘을 혁신하고자 하는 의도와 만남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의 만남의 성사”라고 표현하였다.6)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원성사를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 안에서 바로 두 방향의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위로부터의” 은총의 개입과 “아래로부터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예식이 그것이다. 칼 라너(Karl Rahner)는 – 역시 공의회 전에 – 그의 그리스도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종말에 승리를 거둘 하느님의 자비가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실재 현존”한 형태로, 혹은 “인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성사적인 원말씀”으로 이해하였다.7) 현대의 가톨릭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원성사로 보는 견해가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3.3.2.  교회: 기본성사


신약성서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교회는 스스로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로써, 성령으로 충만되고 인도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는 공동체로 이해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자기이해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종속해 있으며,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을 나타내는 도구로써 형성되어 있다. 로마서, 고린토 전서는 지역교회는 여러 지체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일치로 인도된다고 증언하고, 에페소서와 필레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를 이룬다고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목자요, 신랑이고, 포도밭 주인, 건축자라는 얘기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종속과 의존 관계 때문에 교회는 이미 초창기부터 하느님의 도구로써 인간의 구원을 위한 봉사를, 말씀과 성사를 통한 봉사를 해야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성사적 구조가 드러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살아가는 가시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전달한다.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교회를 자신의 표지와 도구로 만들어서 세상을 새롭게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사용하신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예수의 구원사업을 계속하는 성사라고 해서 교회가 지상에 계시지 않는 예수와 동일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표지와 성사가 된다는 것은 오로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힘에 의한 것이다. 교회가 구원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안에서 교회의 위치는 처음부터 상대적이고 임시적이다. 교회는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교회는 자신이 이미 받은 것을 계속 전달할 뿐이다.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인류의 최종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사인 교회는 자주 인간의 죄와 나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였다. 신약성서는 초기부터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하는 자신의 사명을 그저 불완전하게 수행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신약성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신자들의 죄는 교회 자체를 손상한다(1고린 6,12-20; 11,17-34)는 것을 전하고 있다. 즉 교회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행세해서 자신을 선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고, 예수께서 밝히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과 같이 행동하고, 성령에 의한 공동체임을 잊고 자신의 전통에 고착하려는 유혹에 시달렸다.


교회는 그 역사 과정에서 교회 구성원의 죄와 나약으로 인해서 자신이 드러내야 할 내적인 실재인 그리스도를 어둡게하고 손상하였던 때도 많았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라는 것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라는 것은 구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성사”라는 같은 표현을 쓰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서 사용된 성사라는 개념을 교회에 사용할 때 이는 유비적(類比的, ananlogical) 의미, 말하자면 더 큰 차이점 안에서의 비슷함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찌기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은 유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해서 비슷함을 얘기할 때 둘 사이에 존재하는 더 큰 차이점을 포함하지 않고는 얘기할 수 없다”(DS 806).


교회를 성사라고 표현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2세기 중엽에 시리아에서 쓰여진 디다케인데, 거기에서는 교회를 “우주적인 신비(성사)”라고 일컬었다. 서방에서는 처음으로 치쁘리아노(+258)가 교회를 “일치의 성사”(sacramentum unitatis)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을 포함한 중요한 교부들은 성사적인 전체 구원 경륜을 서술하는 가운데 교회를 성사 혹은 신비라고 표현하였다.


12세기 중반에 협의적인 성사 개념이 확립되면서 교회 전체를 성사로 보는 시각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는 소위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의 외적이고 제도적인 면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었다. 19세기에 교회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면서 교회의 깊은 차원을 다시 발견하게 되면서 “성사”라는 개념을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중단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교부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교회론을 개혁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신학자 콩가르(Y.Congar)와 뤼박(H.d.Lubac)은 성사적이고 구원경륜적인 시각과 함께 교회를 “성사”로 이해하는 관점을 받아들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신학자 셈멜롯(O. Semmelroth)과 칼 라너는 “원성사”(Ursakrament)라는 개념을 교회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개념 상의 혼동을 피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질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원성사”로, 교회는 “근본 성사”(Wurzelsakrament) 혹은 “기본 성사”(Grundsakrament)라고 구분하여서 표현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런 관점을 받아들여서 교회를 “성사”라고 일컬었다. 공의회는 교회헌장 1 항에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와 비슷하다”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외에도 교회 9,48; 사목 42, 45;선교 1,5). 이에 대한 카스퍼(W. Kasper)의 논평은 공의회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간주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 개념이 교회에 적용되었는데, 이는 다른 개념들과 함께 개념적 도구로써 사용된 것이다. 그 목적은 교회의 승전주의, 성직자주의, 율법주의을 극복하고 가시적인 형태 속에 숨어있으며 오로지 신앙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교회의 신비를 강조하는 데에 있다. 또한 이 개념은 교회가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고 지속적으로 그와의 관련 속에 있는 한편, 표지와 도구로써 온전히 인간과 세상을 위한 봉사를 위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분명히 한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가시적인 구조와 영신적인 본질 사이의 관련과 구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적합한 개념이다”.8) 공의회의 성사적인 교회론은 교회를 관계의 맥락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의도, 말하자면 교회가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공의회는 인간의 구원이 결코 교회 자신에게 근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원성사”라는 개념을 교회에 적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를 단지 유비관계로 설명하였다.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성사로서의 교회는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봉사에 그 존립의 근거를 둔다. 그 봉사가 무엇인지를 공의회는 문헌을 통해서 분명히 표현한다: “증거” 혹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봉사(계시헌장, 선교교령), “전례”(전례헌장), “봉사” (사목헌장). 또한 공의회는 교회 자신이 완성을 향해 지상 여정 중에 있으며, 교회도 성사들과 함께 지나갈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 홀로 구원의 창시자요 완성자로 머무르신다(교회헌장 48).




3.3.3. 개개의 성사들: 교회의 자기 실현 행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듯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교회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사로서의 자기 모습을 실현하는가? 교회는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인 증거(martyria), 전례 (leiturgia), 봉사(diakonia)를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는데, 이 세 형태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볼 수 있게 드러난다. 그런데 교회가 가장 명확하게 자신을 실현하는 곳은 구체적인 전례 모임 안에서 개개의 성사 실천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개개의 성사를 통해서 기본성사로서의 교회가 실현되고, 현실화되고, 전개된다는 시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바로 직전에 가톨릭 교회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실상 이런 관점은 동방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항상 자리해 왔다. 동방교회에서는 교회가 특별히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곳을 성찬례 안에서 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신학자가 특별히 이런 관점에 영향을 주었다. 스킬러벡스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 하느님과의 만남의 성사”에서 개개의 성사를 “구원을 가져다 주는 조직체인 교회의 공적 행위”10)로서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신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 (은총의 부여)과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 (예배)을 교회적으로 표현”11)한다고 보았다. 칼 라너는 자신의 저서 “교회와 성사들”에서 교회의 여러가지 “현실화 단계”와 “자기 실현”에 대해 다루었다. 거기에서 개개의 성사는 교회가 공적, 사회적인 공개성 속에서 최고의 단계로 자기를 실현하는 행동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래서 라너는 개개의 성사를 “교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실현”하는 행위로서 규정하는데, 이 행위는 개개인의 중대한 구원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12)


이상의 것을 요약하여 독일 교구 공의회의 문헌(1975)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거를 둔다. 그리스도의 인성,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자애와 인간애’가 우리에게 나타났다(디도 3,4).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를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표지이다,  즉 그는 원성사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구원 능력과 함께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 성령에 의해 모여진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과 그분 사랑을 드러내는 지속적인 표지이다 […] 개개의 성사를 통해 교회의 이러한 성사적 본질이 인간 삶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실현된다. 인간 삶의 영역에서 취한 성사적 표지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만나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성사라는 보이는 표지를 통해서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자신을 선사하며, 인간에게 구원을 제시한다. 신앙인은 이 선물을 자유와 감사 안에서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인간이 은혜롭게 자신을 선사하는 하느님을 만나고 이를 통해서 구원된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는 원성사이고, 교회는 기본성사이며, 개개의 성사들은 그리스도 안에 근거를 두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행위로써, 이를 통해 교회는 기본성사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실현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칠성사는 성사적인 구조를 지닌 구세사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예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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