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성사-교의사적인 전개(초기의 제국교회)

 

3.2. 초기의 제국교회: 그리스도 신비에의  참여로써의 세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용인한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고, 본격적으로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가 391년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은 후에 교회와 로마 제국의 제도적인 연결이 성립되는데, 이로 인해서 교회와 사회 전체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교들은 황제의 관리가 되고, 황제 스스로 세례 받은 신자가 되어서1) 교회는 정치적 지배에 대해 대립적 위치를 청산하고 그와 共生관계로 접어들었다. 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지만, 세례를 받음으로써 근본적인 자신의 삶을 전환해야 한다는 세례 이해로 인해서 세례를 죽기 전까지 미루는 경우가 흔히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그리스도교 생활을 몸에 익히면서 세례를 철저히 준비하는 기간이었던 예비자 시기가 일생동안 지속되는 상태로 변화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상황이 바뀜에 따라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고, 그와 함께 세례신학에서도 역점이 달리 놓이게 되었다.


종말론적-성령론적인 관점보다는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이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로마 6,1-11이 세례 교육의 기본적인 텍스트로 된 것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의 참여를 의미하다. 이제는 고대교회로부터 전래된 세례성사 전례의 모든 구체적인 요소들이 이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져 근처에 위치한 무덤에로 옮겨진 것처럼 여러분들은 신적인 세례의 거룩한 목욕에도 이끌려 왔다”. 세번의 침수는 (계속 사용된 삼위일체적인 해석과 병행해서) 그리스도께서 “땅 속에서 보냈던” 삼일 낮과 밤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세례통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상징하고, 세례통에로 내려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땅에 묻힘을 본받는 것이다: 세례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 “그 거룩한 물은 여러분에게 무덤인 동시에 어머니가 되었다.”2)


이제는 삶의 전환이라는 윤리적 측면보다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로 성장한다는 신비적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 4세기경의 세례 교리교육은3) 세례를 받은 후에 행하여졌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심리적-교육적인 이유가 있었다: 신비는 해석되기 전에 우선 체험되어야 한다. 체험 이전에 설명을 하게 되면 세례자가 신비 사건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과 신비를 체험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암부로시오가 얼마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중요시 하였는지는 세례에 곧 이어서 세족례를 거행하던 밀라노의 관습을 고수하고자 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암부로시오는 세례 후의 세족례를 알지 못하는 로마에 대해서 온 힘을 다해 밀라노의 관습을 정당화하였다: “나는 모든 점에서 로마 교회를 따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우리도 건전한 인간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이유에서,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정당한 이유에서 지키고 있는 것을 계속 보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참여라는 주제이다. “‘내가 당신을 씻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몫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요한 13,8)하고 주께서 설명하신다.”4)


아우구스티노도 로마 6,1-11에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죄의 사한다는 측면을 더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세례”는 “그리스도 죽음의 모상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시금 죄 사함의 모상이다. 그리스도에게 진정으로 죽음이 닥쳤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진정으로 우리 죄의 사함이 따른다.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부활이 따른 것처럼 우리에게도 실제로 의화가 따른다.”5)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통한 죄의 사함을 그가 전개한 원죄론과 연결시킨다. 그 당시에는 세례를 죽기 전까지나, 적어도 “위험하지 않은 나이”까지 미루는 관습 외에 신자 부모의 어린이들이 세례 받는 것이 당연한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뻴라지우스(+ 418 이후)와의 대결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원죄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아세례의 관습을 논거로 삼는다. <세례는 죄의 사함을 위해서 받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아세례도 죄사함을 위한 것이므로 어린아이가 죄인으로 태어나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스스로 죄를 지을 수 없으므로 물려받은 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논거는 뒤바뀌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미 관습으로 실천해 온 유아세례에서 원죄를 추론해냈지만, 나중에는 원죄론이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위한 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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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성사-교의사적인 전개(초기의 제국교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2. 초기의 제국교회: 그리스도 신비에의  참여로써의 세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용인한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고, 본격적으로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가 391년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은 후에 교회와 로마 제국의 제도적인 연결이 성립되는데, 이로 인해서 교회와 사회 전체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교들은 황제의 관리가 되고, 황제 스스로 세례 받은 신자가 되어서1) 교회는 정치적 지배에 대해 대립적 위치를 청산하고 그와 共生관계로 접어들었다. 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지만, 세례를 받음으로써 근본적인 자신의 삶을 전환해야 한다는 세례 이해로 인해서 세례를 죽기 전까지 미루는 경우가 흔히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그리스도교 생활을 몸에 익히면서 세례를 철저히 준비하는 기간이었던 예비자 시기가 일생동안 지속되는 상태로 변화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상황이 바뀜에 따라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고, 그와 함께 세례신학에서도 역점이 달리 놓이게 되었다.

    종말론적-성령론적인 관점보다는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이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로마 6,1-11이 세례 교육의 기본적인 텍스트로 된 것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의 참여를 의미하다. 이제는 고대교회로부터 전래된 세례성사 전례의 모든 구체적인 요소들이 이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져 근처에 위치한 무덤에로 옮겨진 것처럼 여러분들은 신적인 세례의 거룩한 목욕에도 이끌려 왔다”. 세번의 침수는 (계속 사용된 삼위일체적인 해석과 병행해서) 그리스도께서 “땅 속에서 보냈던” 삼일 낮과 밤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세례통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상징하고, 세례통에로 내려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땅에 묻힘을 본받는 것이다: 세례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 “그 거룩한 물은 여러분에게 무덤인 동시에 어머니가 되었다.”2)

    이제는 삶의 전환이라는 윤리적 측면보다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로 성장한다는 신비적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 4세기경의 세례 교리교육은3) 세례를 받은 후에 행하여졌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심리적-교육적인 이유가 있었다: 신비는 해석되기 전에 우선 체험되어야 한다. 체험 이전에 설명을 하게 되면 세례자가 신비 사건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과 신비를 체험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암부로시오가 얼마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중요시 하였는지는 세례에 곧 이어서 세족례를 거행하던 밀라노의 관습을 고수하고자 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암부로시오는 세례 후의 세족례를 알지 못하는 로마에 대해서 온 힘을 다해 밀라노의 관습을 정당화하였다: “나는 모든 점에서 로마 교회를 따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우리도 건전한 인간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이유에서,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정당한 이유에서 지키고 있는 것을 계속 보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참여라는 주제이다. “‘내가 당신을 씻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몫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요한 13,8)하고 주께서 설명하신다.”4)

    아우구스티노도 로마 6,1-11에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죄의 사한다는 측면을 더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세례”는 “그리스도 죽음의 모상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시금 죄 사함의 모상이다. 그리스도에게 진정으로 죽음이 닥쳤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진정으로 우리 죄의 사함이 따른다.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부활이 따른 것처럼 우리에게도 실제로 의화가 따른다.”5)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통한 죄의 사함을 그가 전개한 원죄론과 연결시킨다. 그 당시에는 세례를 죽기 전까지나, 적어도 “위험하지 않은 나이”까지 미루는 관습 외에 신자 부모의 어린이들이 세례 받는 것이 당연한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뻴라지우스(+ 418 이후)와의 대결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원죄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아세례의 관습을 논거로 삼는다. <세례는 죄의 사함을 위해서 받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아세례도 죄사함을 위한 것이므로 어린아이가 죄인으로 태어나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스스로 죄를 지을 수 없으므로 물려받은 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논거는 뒤바뀌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미 관습으로 실천해 온 유아세례에서 원죄를 추론해냈지만, 나중에는 원죄론이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위한 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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