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대한 신학적 이해-악의 일종, 불의의 죄, 복음적 생활양식

 

가난에 대한 신학적 이해




근대에 들어와 교회는 가난에 대한 결핍으로서 생겨나는 많은 문제점들로 인해 ‘가난’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해방신학의 태동은 본격적으로 ‘가난’에 대한 연구를 낳게 했다. 여기서 살펴볼 문제는 과연 ‘가난’이 무엇인가이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해방신학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가난’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 볼 것이다.




   1. 악의 일종 : 수단의 결핍




이는 가장 직접적인 가난의 의미이다. 그것은 자력의 결핍 및 인간생활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용역 수단의 결핍을 의미한다. 즉, 물질적 혹은 실제적 가난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 구티에레즈는 “인간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인간적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경제적 재화들의 결핍”1)으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가난은 우선적으로는 경제 사회적 차원에서 고찰한 가난이며 나아가서 경제 사회적 가난과 상호연관된 사회정치적,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고찰된 가난이다. 물질적 가난은 운명적으로 필연적인 현실이 아니며, 우연한 선물도 아니다. 물질적 가난은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들에게 책임이 있는 자유행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경제, 사회적, 정치적 상황들과 구조들의 결과 혹은 산물이다. 따라서 물질적인 가난은 부정적인 것이며 비인간적인 것으로써 제도화 된 불의의 상황으로 간주될 만 하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시작되었으며, 생명의 성장을 돕는 물질적, 사회적 관계를 창조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이룩해 가야 하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이나 빈곤은 없고, 오히려 의인들과 하느님의 풍요를 누리는 형제들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난은 정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활하신 분의 영광에 역행하는 것이며, 세계가 부름 받은 운명에 역행하여 부정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2) 그렇다고 부유함을 추구해서만도 안된다. 그리스도교적 이상향은 가난 혹은 부유 그 어느 것에도 바탕을 두지 않는다. 이는 ‘소유’와 ‘존재’에 관한 문제로 외적 사물의 소유는 인간 생활의 유지와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다시말해서, 인간의 생존을 지탱시키는 것, 즉 생명을 보전하는 것에 소유의 제일 중요한 목적이 있기에, 인간 존재의 가치를 상실 않는 범위에서의 가난과 부유함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이상향으로 제시될 수 있다.3)




   2. 불의의 죄




신앙적, 성서적 신학적 견지에서 먼저 살펴본 물질적 가난은 악의 표징을 드러내 주는 상태, 견디어 주어서는 안되는 상태, 싸워서 타파해야 할 악으로 간주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과 배치되는 한에서 “사회적 범죄”로 간주된다.


보프는 불의의 결과로서의 그 가난의 실재에 우리가 네 가지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 연관된 차원들에서부터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4)  


– 직접적 차원 :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


                 서 악의 모순으로써… 가장 파괴적이고 비참하게 만드는 채찍질


                 로서 파악된다.


– 분석적 차원 : 가난의 상황이 분석된다. 그 분석은 보다 복잡한 이론적 도구들


                 의 이용을 전제로 한다. 그 분석결과, 가난의 상황은 우연히 발


                 생한 것이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일정한 상황들과


                 구조들의 산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 윤리적 차원 : 불의의 상황으로서 일반화된 가난은 단죄되고 배격되고 타파되


                 어 마땅하다. 따라서 그런 가난은 무죄한 상황이 아니라, 착취의


                 과정에 의하여 산출된 상황인 것이다.


– 신학적 차원 : 교회는 사회적 범죄의 상황을 분간해 낸다… 따라서 사회적 범죄


                 의 상황은 비단 사회적 관계들의 단절(불의)안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단절을 가리킨다.5)


이러한 가난의 반대는 정의(正義)이다. 즉 사회정의를 의미한다. 이는 소수인에 의해 재화가 축적되고 대다수의 노동이 착취당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체제와 빈곤,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와 평등에 기초한 생산 구조를 창출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를 선택함을 의미한다.6)


따라서 ‘불의의 죄’로서의 가난은 하느님 자신에게 또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전하는 것으로서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연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3. 복음적 생활 양식 : 온몸을 바침




인간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 따라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어떠한 것도 우리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바와 존재 전체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그들을 섬기는 데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섬기는 데에 온전히 내어놓아야 한다. 마태오 복음 5장 3절(“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에서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그 가난은 스바니아서로부터 출발하여 그렇게 이해된 주님 앞에서의 전적인 순응으로서의 가난인 것이다.7)


구약성서와 마태오 복음서의 정식화에 기초를 두고서, 구티에레즈는 영성적인 어린이다움이라는 가난의 일차적인 실제적 결핍과 관계되지 않는 가난이 있다고 결론짓는다.8)


보프에 있어, 영적가난은 복음적인 인간으로 되는 방법이며 전적인 순종으로서, 영성적 어린이다움의 길, 하느님과 형제들인 인간들에게 전적으로 순응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넘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영적가난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행복선언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9)


에야꾸리아의 입장은 물질적 가난을 견디어 내고 하느님 나라의 고유한 활력 안에서, 다시 말해서 해방적 투신 안에서 자발적으로 물질적 가난을 받아들이고 취함으로써 그 가난을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상태에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영성화”로 표현하고 있다.10)


‘마음의 가난’ 이라는 표현을 에야꾸리아와 동일한 범위의 의미로 사용하는 소브리노에게 있어선, 영성적 어린이다움 혹은 겸허함을 역시 가난(마음의 가난, 혹은 신학적 가난)이라고 부르고 있지만11), 그런 가난은 분명히 물질적인 재화들을 포기하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으며,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 및 운명에 동참하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다.         




   4. 수덕적 미덕 : 청빈




가난은 하나의 덕성이요, 수덕이다. 이런 의미의 가난은 재화들을 근검 절약하여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영성 생활의 대가들은 모든 소유 본능과 물질적 재화를 즐기려는 욕구로부터 인간 정신을 해방시키는 수덕적인 방법으로 청빈의 생활을 실천하였고 설교하였다.


수덕으로서의 가난이 그리스도교적인 특성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추종에 입각하여 이해되고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해방 신학자들은 주장한다.12)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예수와 만나는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개 주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데 있다”고 본다.


하지만 수덕으로서의 가난은 그리스도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는 물질적 재화에 대한 애착과 그에 대한 멸시 사이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은 것으로, 재화를 절제 있고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수덕으로서의 가난은 “생활의 지혜”를 의미한다. 수덕으로서의 가난은 자연과 문화의 재화를 책임 있게 관리하며, 견실하고 반소비적주의적인 생활을 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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