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로마 7,19-20)
1.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의미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졌고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런데 이 성서의 말씀을 듣고 혹자는 더 많은 회의와 불신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너무 동화 같고 사실 같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아담과 하와가 ‘지선악과’ 실과를 따먹었기로 인류 전체가 불행하게도 죽어야 될 운명에 놓이다니 하고 의아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무슨 죄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통속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성사가 이 말씀으로 계시해 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창조되어 이 세상에 살게 되면서부터 어떻게 하느님 앞에 존재해 왔는지, 그리고 인간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그 상태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간이라는 데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최초의 인간을 통해 모든 개별 인간을 생식으로 창조하실 것을 계획하시면서 모든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즉 아담은 하느님 앞에 한 개인이기보다 하느님을 대면한 인간으로서 후에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도 돌아갈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본성을 통해 전달될 은혜였다. 그러나 원조들은 하느님의 명을 거슬려 죄를 지었다. 따라서 그 죄 역시 아담 개인의 죄일 뿐 아니라 원조로서 자기를 통해 전달될 모든 인간의 운명을 그르친 죄인 것이다.
이렇게 아담고 하와의 범죄는 모든 인간과 직결되어 있는 죄이고 인간을 본성상 타락케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또 이후에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의 원인이 되고 있어 이를 원죄라 부르는 것이다.
이제 성서가 계시해 주고자 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의미를 조금은 이해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원죄라는 사실에 있다. 아담의 죄의 결과는 모든 인간에게 돌아갔다. 아담의 죄가 원죄라고 추인하는 성서 대목은 수없이 나온다.
2. 원죄의 결과
아담의 잘못으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는 인간 본성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다. 그것은 죄로 인해 원조에게 주어졌던 초성은혜와 과성은혜가 거두어졌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인간성이 죄에 대항할 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원죄는 마치 어떤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타락케 한다. 원조들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벌은 원죄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창세 3,17-24). 은총의 상실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파괴된 세상의 질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인간 본성 안에 심어 놓음으로써 인간을 죄의 지배 하에 살게 했다는 것이다.
3. 원죄의 전달
그러면 원죄가 어떻게 개개인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아담 안에 주어졌던 의로움 자체가 어떻게 그 후손에게 전달될 계획이었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번성하여 많게 하라”(창세 1,28)고 하셨다. 그리하여 생식을 통해 원조의 의로움이 유전에 의해 전달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원조에게 주어진 의로움은 아담의 개인적인 자질로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본성의 자질로서 하사된 선물(은혜)이었다. 그래서 만일 원조 아담이 결백성을 보존했다고 한다면 인간 존재의 자손 생식은 원초의 의로움을 갖춘 인간본성의 전달이 되었을 뻔했다. 그러나 아담은 이 의로움을 잃었다. 따라서 더 이상 후손들에게 전해 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아담과 그 후손들은 오직 원초의 의로움이 상실된 본성만을 전해 줄 수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색맹의 신체적 결함이 그 자식에게까지 결함된 상태로 전달되듯이 원죄도 인간 본성상으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원죄가 각 개인에게 본성상으로 전달됨으로써 이 세상은 완전히 악의 굴레에서 돌게 되었다. 이 악순환은 역사 안에서 현실적으로 지속된다. 죄로 기울어지는 나약성을 갖고 태어나는 어린 생명은 죄에 물든 사회 속에 태어남으로써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원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서의 이야기에 대해 또 하나의 통속적인 질문이 있다. 사람들은 가끔 말하기를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느님이 왜 낙원에다 ‘지선악수’를 두셨으며, 또 원조가 그것을 따먹을 때 못 먹게 말리지 못했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선악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따먹게 된 원이 무엇인지 이해치 못한 데서 나온 질문이다. ‘지선악수’란 인간의 조건을 잘 아시는 하느님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마련하신 법도이며,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금한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의미상으로 이것을 나무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표현방법이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명을 지킴으로써 ‘선’을 체험하고, 거스름으로써 ‘악’을 체험하게 되는 나무란 뜻이다. 하느님이 금한 ‘지선악수’는 운전사의 안전과 교통질서를 위해 세워 놓은 신호등과 비슷할 것이다. 운전사가 제 마음대로 신호등을 무시하고 차를 몰 때 따라오는 사고는 결코 신호등에 책임이 있거나 그것을 세워 놓은 입법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운전사의 무책임한 자유 남용에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가 ‘지선악수’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은 자유 남용으로 인한 하느님의 질서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운전사의 자유 남용을 그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느님은 원조에게 자유를 준 이상 강압적으로 그 남용을 막지는 않으셨다.
“이 몸은 죄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시편 51,5)라고 노래한 다윗왕의 이 시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에 물들고 죄 속에서 태어남을 암시한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악의 세력’ 이것이 원죄이다(로마 7,19-20). 온갖 교만과 탐욕, 이기심, 욕정 등은 원죄에 물든 결과다. 그에 따른 인간의 자연 상태는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에페 2,2-3). 따라서 모든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다. 날 때부터 벌써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창조된 인간의 타락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전히 당신 피조물로 남아 있는 우리를 엄하게 다스리시지 않고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 구원해 주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그를 믿고 돌아서는 자에게 의로움을 되찾게 해 주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며 이미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다. 교회는 그 구원을 선포하고 각자에게 전달해 준다. 이제 다음부터는 하느님의 구원이 이 역사 안에 어떻게 실현되는지 구세사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인간 본성에 뿌리 박은 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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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로마 7,19-20)
1.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의미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졌고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런데 이 성서의 말씀을 듣고 혹자는 더 많은 회의와 불신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너무 동화 같고 사실 같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아담과 하와가 ‘지선악과’ 실과를 따먹었기로 인류 전체가 불행하게도 죽어야 될 운명에 놓이다니 하고 의아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무슨 죄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통속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성사가 이 말씀으로 계시해 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창조되어 이 세상에 살게 되면서부터 어떻게 하느님 앞에 존재해 왔는지, 그리고 인간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그 상태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간이라는 데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최초의 인간을 통해 모든 개별 인간을 생식으로 창조하실 것을 계획하시면서 모든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즉 아담은 하느님 앞에 한 개인이기보다 하느님을 대면한 인간으로서 후에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도 돌아갈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본성을 통해 전달될 은혜였다. 그러나 원조들은 하느님의 명을 거슬려 죄를 지었다. 따라서 그 죄 역시 아담 개인의 죄일 뿐 아니라 원조로서 자기를 통해 전달될 모든 인간의 운명을 그르친 죄인 것이다.
이렇게 아담고 하와의 범죄는 모든 인간과 직결되어 있는 죄이고 인간을 본성상 타락케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또 이후에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의 원인이 되고 있어 이를 원죄라 부르는 것이다.
이제 성서가 계시해 주고자 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의미를 조금은 이해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원죄라는 사실에 있다. 아담의 죄의 결과는 모든 인간에게 돌아갔다. 아담의 죄가 원죄라고 추인하는 성서 대목은 수없이 나온다.
2. 원죄의 결과
아담의 잘못으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는 인간 본성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다. 그것은 죄로 인해 원조에게 주어졌던 초성은혜와 과성은혜가 거두어졌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인간성이 죄에 대항할 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원죄는 마치 어떤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타락케 한다. 원조들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벌은 원죄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창세 3,17-24). 은총의 상실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파괴된 세상의 질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인간 본성 안에 심어 놓음으로써 인간을 죄의 지배 하에 살게 했다는 것이다.
3. 원죄의 전달
그러면 원죄가 어떻게 개개인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아담 안에 주어졌던 의로움 자체가 어떻게 그 후손에게 전달될 계획이었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번성하여 많게 하라”(창세 1,28)고 하셨다. 그리하여 생식을 통해 원조의 의로움이 유전에 의해 전달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원조에게 주어진 의로움은 아담의 개인적인 자질로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본성의 자질로서 하사된 선물(은혜)이었다. 그래서 만일 원조 아담이 결백성을 보존했다고 한다면 인간 존재의 자손 생식은 원초의 의로움을 갖춘 인간본성의 전달이 되었을 뻔했다. 그러나 아담은 이 의로움을 잃었다. 따라서 더 이상 후손들에게 전해 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아담과 그 후손들은 오직 원초의 의로움이 상실된 본성만을 전해 줄 수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색맹의 신체적 결함이 그 자식에게까지 결함된 상태로 전달되듯이 원죄도 인간 본성상으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원죄가 각 개인에게 본성상으로 전달됨으로써 이 세상은 완전히 악의 굴레에서 돌게 되었다. 이 악순환은 역사 안에서 현실적으로 지속된다. 죄로 기울어지는 나약성을 갖고 태어나는 어린 생명은 죄에 물든 사회 속에 태어남으로써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원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서의 이야기에 대해 또 하나의 통속적인 질문이 있다. 사람들은 가끔 말하기를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느님이 왜 낙원에다 ‘지선악수’를 두셨으며, 또 원조가 그것을 따먹을 때 못 먹게 말리지 못했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선악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따먹게 된 원이 무엇인지 이해치 못한 데서 나온 질문이다. ‘지선악수’란 인간의 조건을 잘 아시는 하느님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마련하신 법도이며,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금한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의미상으로 이것을 나무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표현방법이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명을 지킴으로써 ‘선’을 체험하고, 거스름으로써 ‘악’을 체험하게 되는 나무란 뜻이다. 하느님이 금한 ‘지선악수’는 운전사의 안전과 교통질서를 위해 세워 놓은 신호등과 비슷할 것이다. 운전사가 제 마음대로 신호등을 무시하고 차를 몰 때 따라오는 사고는 결코 신호등에 책임이 있거나 그것을 세워 놓은 입법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운전사의 무책임한 자유 남용에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가 ‘지선악수’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은 자유 남용으로 인한 하느님의 질서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운전사의 자유 남용을 그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느님은 원조에게 자유를 준 이상 강압적으로 그 남용을 막지는 않으셨다.
“이 몸은 죄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시편 51,5)라고 노래한 다윗왕의 이 시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에 물들고 죄 속에서 태어남을 암시한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악의 세력’ 이것이 원죄이다(로마 7,19-20). 온갖 교만과 탐욕, 이기심, 욕정 등은 원죄에 물든 결과다. 그에 따른 인간의 자연 상태는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에페 2,2-3). 따라서 모든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다. 날 때부터 벌써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창조된 인간의 타락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전히 당신 피조물로 남아 있는 우리를 엄하게 다스리시지 않고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 구원해 주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그를 믿고 돌아서는 자에게 의로움을 되찾게 해 주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며 이미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다. 교회는 그 구원을 선포하고 각자에게 전달해 준다. 이제 다음부터는 하느님의 구원이 이 역사 안에 어떻게 실현되는지 구세사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