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연구>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이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 성자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강생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찬미가로 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세상 창조의 그 먼 순간,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벌써 말씀이 계셨습니다.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골로사이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1,17).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예수님은 절대적이고 아무런 하자도 없는 말씀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그 무엇도 존재하기 이전의 하느님의 신비 속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시작되고 있는 시발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인간의 역사가 처음부터 시종일관 하느님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귀결되어 왔으며, 현재도이 기쁜 소식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사가의 이러한 통찰은 창조 이야기의 재조명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그 찬란한 빛을 받으면서, 요한복음사가는 인간을 뛰어넘어 그 무엇도 생겨나기 이전으로 건너뛰어 말씀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은 만물에 앞서 존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하느님의 속성도 표현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독립적이며 대등한 차원에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로고스(말씀)는 1세기의 헬레니스트의 문화계에 일찍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그리이스 말입니다. 이 말을 전 우주의 활동적 신적 원인, 전 우주의 최고적 내재적 이유, 만물의 구성적 결합을 지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낼 수 있었던 그 말이, 같은 본성의 일치에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다 알맞고, 또 당시의 환경 속에서 보다 더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로고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유 명사로서 로고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의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밀접한 일치의 생명입니다. 함께 계셨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있다는 표현보다는 공동생활,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 알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직 말씀을 아버지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4절과 18절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말씀은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이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을 가지셨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느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도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영원성, 그분의 위격성, 그리고 신성을 요한 복음사가는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을 통하여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은 그분을 통하여 확대되어 완성에 이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을 주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생명 그 자체 이십니다.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빛은 어둠을 비추어 몰아내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미래도 어둠이 빛을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둠과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존재들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생명의 빛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제압하지도 못했습니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8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예수님은 빛 그 자체셨고 요한은 하나의 등불이었습니다. 이 등불은 아침 햇빛이 찬연히 하늘을 비출 때까지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면 등불은 필요가 없습니다.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이 세상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은 하느님을 충분히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사람은 피조물에게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였고 말씀의 빛을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은 세상에 당신이 오실 것을 오랫동안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리셨고, 마지막으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12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맞아 들였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온 그분의 계시를 굳게 지키고,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신비스러운 권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다는 것은 육체적 출산이 아니고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탄생입니다. 이 영적 탄생의 원인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어, 당신 본성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은 우리들 가운데 자신의 천막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법은 한 천막 아래 친밀하고 따뜻하게 모이는 유목민의 습관을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구약의 회상, 팔레스티나를 향한 40년간에 걸친 히브리인들이 천막 아래서 보냈던 사막의 생활, 거룩한 장막, 예루살렘 성전을 회상하게 하는 것입니다(출애25,8;열왕 상8,10;에제키엘37,27;즈가리야2,14;요엘4,17;하깨2,9).
거룩한 장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은 선택받은 백성에게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집이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는 하느님의 선물과 충실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강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은 신비스러운 은혜, 곧 전 그리스도교의 하늘로부터 온 계시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본질적 생명과 진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 라고 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뒤에 오실 그분이 메시아라고.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바로 영원히 존재하고 계시던 로고스, 즉 말씀이십니다.
16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은총 뒤에 은총이 덧붙여지는 것. 먼 거리를 걸어 갈 때 중간까지 누군가가 차를 태워줬습니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다른 사람이 또 태워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은총은 모두 로고스의 충만에서 용솟음쳐 쇠사슬의 고리처럼 이어지고, 언제나 끊임없이 인간의 협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17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사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진리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이었던 모세는 심히 불완전한 율법밖에는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율법은 피해야 할 악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그것을 피하게 하는 데에 필요한 힘을 충분히 줄 수 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율법은 그림자와 상징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낳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키지 못하니 당연히 죄의식만 쌓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규율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 버리셨습니다.
18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이 말씀은 아들을 아버지와 구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별과 일치가 동시에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로고스로 말미암아 진리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 알려 주셨습니다.
품 안에 계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얼마나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그래도 두 번만 더 읽어 봅시다.
2. 나에게 하느님을 알려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도 어떻게 알려주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