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말씀연구>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네에서 평이 안좋은 아이랑 둘이 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꾹 참고서 집에서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왜 그렇게 좋지 않은 그 녀석과 놀고 있는 거냐? 그 애가 얼마나 버릇이 없는 애 인줄 알고 있어? 다시는 그 녀석과 놀지마…”


그러자 아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건 나도 알고 있는데 내가 안 놀아 주면 그 애는 놀 친구가 하나도 없어…”




사랑밖에 모르시는 예수님! 이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구약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있었으나 이웃이란 유다인에게 있어서 오직 유다인들 만을 가리켰습니다.  한 사람의 유다인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방인을 보고 그를 도와 줄 의무가 있냐고 물었을 때, 율법학자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 원수를 미워하여라…”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말렉 사람(출애17,14)과 암몬 사람과 모압사람(신명23,4-6)을 적으로 보라는 말이 있으므로, 율법학자들은 그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느님에 대한 흠숭을 우상숭배로 타락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한 이 명령이 이방인을 미워하는 구실의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한 이스라엘인은 이방인에 대해서라면 정의를 행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그들을 속여도, 그들로부터 물건을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유다인들은 그렇게 무차별하게 보복을 하고, 자기 민족 외에는 박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십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미워한다는 본능적인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람에게서나 자연히 솟아나는 이 무서운 욕망의 흐름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수련을 해야만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를 박해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의 악에 대해서 우리는 기도로써, 사랑으로써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필요하다면 물질적으로도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마태25,35-45). 곧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구별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 있어서 너무 힘든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46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우리에게는 벗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는 원수를 사랑하는 의무보다도 앞선 것이고 또한 큰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가 우정을 우정으로 갚는 것으로 그친다면, 초자연적 샘으로 말미암아 덕을 길러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실 보수, 곧 영원한 생명을 받을 가치는 없습니다. 제 친구를 사랑하는 것만으로써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사랑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7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당연한 것을 했다고 해서 칭찬받을 것은 없습니다. 가끔은 평화의 인사를 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 아는 사람에게만 하는 인사,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밖에 나오면 아는 체도 안하는 나의 모습. 어찌 보면 이 말씀은 성당에서 내가 아는 사람과만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내가 아는 사람과만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사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을 교회에서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공동체는 소가 닭은 쳐다보듯이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는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서로에게 관심 없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 교회 공동체, 사제들이 그렇게 하고, 수도자들이 그렇게 하고, 열심한 신자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은 너무도 한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상처받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몇 명 안 되니까 좀더 잘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내가 원수를 용서해야 하는 것만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원수졌을 때 용서받는 것을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께 원수졌을 때, 용서받을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용서를 하면 분명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나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좀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는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노력할 때 나 또한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있지 않을까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원수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얼마나 기도해야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노력한다면 그에 대한 모든 감정을 포기하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아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그런 경우가 있다면 함께 나눠 주세요.




2. 혹시 누구에게 원수진 일은 없습니까? 나의 잘못으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혹시 그와 화해하려고 했던 노력들, 그가 받아주지 않아서 마음 아팠던 기억들을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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