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용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20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의 의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베드로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삐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2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3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거액은 비유의 청중에게 근동의 대제국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왕들을 연상시킵니다. (1데나리온 하루품삯: 3만원,1달란트: 1000데나리온)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4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25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6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7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고 호통을 쳤다. 28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29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30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그들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1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2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3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왕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4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엄과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지 않을 때 이 비유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종 왕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 왕은 군림만 하는 왕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이시고, 악한 종을 형리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바라봅시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