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제로, 어떤 사람은 수도자로, 어떤 사람은 평신도로, 어떤 사람은 선교사로…그런데 각자가 다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이 사제가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수도자가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따르고 있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내 방식 많이 옳다고 주장해서도 안됩니다. 나도 하느님을 따르고 있지만, 그  사람도 하느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 나를 어떻게 이끄시는지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제자(요한)의 운명에 관해서 묻습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대화의 주제로서만 언급될 뿐 대화의 장명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편집자의 의도가 들어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요한 사도는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편집자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20  베드로가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 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굽니까?” 하고 묻던 제자였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편집자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편집자는 예수님을 따르도록 촉구된(세번이나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다음에 ‘나를 따라라’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심) 베드로 사도와는 달리 요한 사도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강조되고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이것은 두 제자를 경쟁적인 시각에서만 본 인위적인 해석이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베드로 사도에게 촉구된 따름(추종)은 특별히 죽음의 추종을 뜻하고 현 문맥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따름이 배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사랑받던 제자에게는 어떤 특별한 것이 주어지겠느냐는 일종의 기대가 내포된 질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부여된 사목권(15-17절)과 촉구된 죽음의 추종(18-19절)에 비해서 “사랑받던 제자”와의 관계 및 그 제자의 특별한 역할이나 위치를 보증하고자 한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답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가 훌륭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과 믿는 이들이 예수님처럼 순교자로서 죽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순교자들은 죽음을 통해, 죽기까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철저하게 추종한 사람들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진정한 제자의 확실한 목표이자 승리의 월계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일생동안 따랐지만 순교하지 않고 자연사를 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또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일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으면서도 순교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명쾌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길 모두가 다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길이 모든사람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이끌어 가도록 내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22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재림) 살아 있는다고 한들 그것은 베드로 사도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진 몫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길, 곧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촉구하십니다. 또한 이 말씀 안에는 사도 요한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거하면 요한사도가 에페소에서 활동하다가 고령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로가 에페소에 54년부터 57년까지 약 3년간 머물렀는데, 바울로에 앞서서 요한이 에페소에서 선교한 것이 아니니 틀림없이 바울로 다음에 요한 사도가 에페에 자리잡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톨릭 신자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나했는데, 이때 요한 사도도 성모님과 함께 에페소로 피난했다고 한다면 요한 사도는 빨라야 70년부터 에페소에 살았을 것입니다.


한편 에페소, 베르가모, 필라델피아 등지에는 비잔틴 시대에 요한성당이 세워진 반면 바오로 성당은 전혀 없습니다. 이는 아시아 지방에서 바오로 사도보다는 요한 사도의 영향력이 컸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23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다만 “설사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이 말씀 안에서 요한 사도를 따르는 공동체 안에서는 요한 사도가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생각들이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갈망은 요한 공동체에서도 생생했었습니다(참조: 1요한2,28;3,2).


사랑받는 제자가 늙어갈 수록 사람들은 이런 말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들 당대에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사도 요한이 죽으면서 오해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 뿐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게 되자, 요한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던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제 올바르게 정정하고자 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 시 까지 사랑하는 제자가 남아 있다는 말을 그 제자가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편집자는 사랑받던 제자가 요한의 공동체 가운데 정신적으로 머물러 계속 활동한다거나 또는 이 복음서 안에 정신적으로 머물러 선포하고 증언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안에서는 이미 사도 요한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집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사도 요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 안에는 서로의 권위를 인정해 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따르는 공동체로 하여금 베드로 사도의 권위만을 내세우지 말고 요한 사도의 동동체도 인정하고 이해하도록 이끌어 주고, 또한 요한 사도의 공동체로 하여금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공동체의 창설자요 스승인 요한사도의 명예를 존중하도록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24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1장은 원 복음서에 추가된 부록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복음서의 부록의 결말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21장은 복음사가의 후계자들 이른바 요한 학파가 복음서의 초종 편집 시 엮어서 첨가한 부록입니다. 이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이루어진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사화가 교회론적, 사목적인 관점에 중점을 두고서 전개되고(1-23절), 다른 하나는 일종의 결말로서 복음서에 기록된 증언 내용의 진실성이 강조. 언급되고 있습니다.


25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우리”가 “나”로 갑자기 바뀜으로써 문맥상으로 볼 때 25절은 후대에 덧붙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은 또한 이 복음서가 최종적으로 편집되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쳤다는 것도 시사해 줍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상대방을 인정해 주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 사도 요한의 삶에 대해서 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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