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말씀연구>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옳은가? 아닌가를 가지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궁지로 몰려고 하다가 오히려 손해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정치적인 동시에 하나의 종파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름은 솔로몬 시대(열왕기 상 2,35)의 대사제 사독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들 거의가 사제의 집안 출신인데 반하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회의 온갖 계급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명예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재산이 많았던 그들은, 현존하는 질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너무나 민주적이었고, 열혈당원들은 너무나 혁명적이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지도를 받고 있던 유다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리스 사상은 대부분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고,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유다인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그들은 천사와 영의 내세의 생명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은 믿고 있었지만 그 섭리를 믿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꺼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카이사르의 세금에 대하여 자기들과 같은 해결을 하신 예수님께서 만일 부활이란 점에 대해서도 자기들과 같은 의견이라면 바리사이파에게 사두가이파의 멋진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9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자녀가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자기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5장 5절 – 10 절에서는 수혼제라는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가족을 계승시키는, 곧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은 남자에게 남자의 후계자를 얻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맞아 들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20  그런데 전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21  둘째가 형수를 자기 아내로 맞았지만 그도 또한 자식 없이 죽고 세째도 그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하여 그 일곱 형제가 다 자식 없이 죽고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3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에 그들이 다시 살아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 내 놓은 문제는 사두가이파들이 부활의 교리를 비웃기 위해 생각해 낸 것 중의 하나입니다. 탈무드에도 수혼제에 관한 열 세 형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 열 둘이 아이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러한 비열한 이치만을 내세우는 이야기를 끌어 냄으로써 바리사이파와 유다인 거의가 믿고 있는 부활의 비합리성을 증명할 작정이었습니다.




2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몹시 온유하십니다. 흔히 랍비들이 하듯이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짐으로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그리하여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5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내세는 물질과 지상적 조건에 따르지 않는 완전히 영적인 생활입니다.




26  너희는 모세의 책에 있는 가시덤불 대목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그래서 그 선조들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임에 틀림없고 언젠가는 충만한 삶, 즉 부활에 이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유다인들은 좀 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조들의 하느님이시라고 천명하시는 것은 그분이 조상들과 맺은 계약과 그분 친히 그들에게 해주신 약속에 신실하다는 것으로, 그리고 그분의 항구함과 충실함을 드러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27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하느님이 몇  세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선조들의 하느님이라고 언제나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느님 앞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내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이 글은 카테고리: 지난 묵상 보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