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말씀연구>


대림시기를 맞아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 그런데 너무 들어서인지 “그런가보다”하는 마음이 듭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때는 아마도 기원 후 27년인 듯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는 28년 1월 즈음이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버려진 곳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세푸스가 의롭고 자비로운 교사들의 목소리라고 인정했던 사람이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요한을 비정치적인 가르침을 준 義의 설교가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요한은 로마에 대한 봉기를 요구하지 않고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행동, 경건한 헌신을 촉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요한을 사형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요세푸스가 그린 요한의 초상은, 당시의 카리스마적 교사들 가운데는 비정치적인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당국자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 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것처럼,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세례자는 이전 시대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위대한 인물들이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광적인 묵시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적인 지혜교사들, 또는 바리사이적인 엄격주의자들, 랍비적인 전통주의자들, 그리고 왕국을 꿈꾸고 있던 열심당원들의 계열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계열에 속했다. 세례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에 봉사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의 일생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뿐만 아니라 생활의 개선, 마음의 개선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는 미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나라”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 나라”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쓴 말은 “하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 야훼 하느님의 뜻을 말하기 위하여 하늘의 이름, 하늘의 뜻, 하늘의 영광, 하늘의 선물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상대로 기록한 복음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느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실천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의 내 모습을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오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심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 말씀은 원래 유배지에서 귀환하던 사람들에게 건네졌던 메시지가 새롭게 해석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바빌론에서 구해 내어 고국으로 인도하시면서 앞장서서 행진하셨습니다. 그 길이 나 있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왕의 행차 길을 준비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그 선구자로서 사람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바로 잡아 줄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관습에 따르면 위대한 인물이 올 때에는 특별히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한 전령이 일행에 앞서서, 사막의 길을 닦고 작은 길을 평평하게 고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막에서 외치는 이는 전령이며, 바빌론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히브리인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 히브리인의 해방은 예수께서 사람을 악령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의 징조였습니다. 요한은 그 해방을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고하는 전령이며 사람의 마음을 회개하게 하고, 곧게 잡아 주는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세례자 요한. 그의 메시지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은 가난뱅이와 예언자의 옷이기도 했습니다(열왕기 하1,8; 즈가리야13,4; 히브리서 11,37). 그리고 그가 먹은 음식은 힘겨운 고행의 음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야 있겠습니까? 요한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씀을 미리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또한 한번 돌아볼 때가 아닐까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있는지를…,




그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팔레스티나의 수도 예루살렘은 어떤 형태로든 메시아 운동에 관련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선교에 대한 소문을 넓게 전파한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점점 온 유다로, 곧 팔레스티나의 남방으로 퍼져 갔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레위기의 규정에 따라서 유다인들은 세례를 깨끗이 씻어 주는 수단, 또는 고행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요르단 강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세례는 죄 고백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회개하겠다는 결심을 인정하는 표시였습니다. 동시에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보증하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다가올 심판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종말에 하느님의 새 백성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고 또 그 길을 잘 준비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와 함께 생활 태도도 참되게 바꾸는 것이 전제 되어어야 합니다.




요한의 활동무대는 요르단 강 일대로 국한되었는데 강의 남쪽 유역까지도 포함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설교하였습니다. 그곳은 좁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를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실 것이며, 그 뒤를 이어 사도들은 팔레스티나를 넘어 온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전파되는 지역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자였습니다(어흥…이건 호랑인가요?). 그는 주인보다 앞서 가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회개는 하나의 필수 요건입니다. 인간은 회개함으로써 하느님께 향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죄의 길에서 돌아서고 그 죄를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8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백성의 지도자이지만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부활이 없다고 믿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해 있으면서도 백성을 돌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가 필요하지만 단순한 표면적 의식이나 단순한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이 물음은 한 인간의 회개의 진실성 여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생활 태도를 바꾸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 주는 행동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고 가진 것을 나누는 데서 드러납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매순간순간에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군인이 되었든 세금징수원이 되었든, 법률가가 되었든 교황이 되었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머물며 활동하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9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필요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 순종 같은 덕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 사람, 바리사이파 사람일지라도 옳게 살지 못한다면 하늘 나라에서 배척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돌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막의 돌로서 아브라함의 후예를 일으키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은 상속자로 이방인을 세우시는 일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은 각각 다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주인의 마음을 외면했다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망각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을 현혹하여 열매맺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나무입니까?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팔레스티나에서는 타작이 끝나 타작마당에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섞여 있을 때 농부들이 키 등을 사용하여 무거운 알곡은 땅에 떨어지게 하고,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타작마당이 깨끗해질 뿐 아니라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져서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군중은 이 비유의 말씀을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키질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 보았기 때문입니다. 키질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알곡이지 쭉정이가 아닙니다.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고 키질하는 사람은 메시아이시고, 알곡은 올바른 사람, 쭉정이는 악인, 곳간은 하늘 나라, 꺼지지 않는 불은 지옥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인 동시에 최고 심판자이십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르치거나 속거나 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알곡이냐 쭉정이냐가 심판으로 가려지면 아버지의 영원한 곳간, 혹은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요? 곳간으로 갈까요? 아니면…,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2.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기 위해 내가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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