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리우스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교회역사에서 아리우스이단 만큼 그리스도교 자체를 뒤흔들어 놓고, 오래 동안 물의를 일으켰던 이단은 없다. 사실 니체아 공의회가 이 이단 때문에 개최되었으며, 4-5세기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이 이단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33.1. 아리우스의 생애와 저서
아리우스(Arius: 256-336년)는 리비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에 가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루치아누스를 창시자로 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사제품을 받고 바우칼리스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318년부터 그는 성부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이시며,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요지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장은 교회의 전통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그의 설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주장을 철회하고 정통신앙을 고백하도록 여러 차례 권고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델은 318년에 이집트 지역의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100여명의 주교들과 함께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안티오키아의 동료들 중에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자기 주장을 계속 펼쳐나갔다. 그의 동조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니꼬데미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가 있었는데, 니꼬데미아는 당시 황제가 거처하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에우세비우스 주교의 영향력은 컸었다. 아리우스는 자기에게 내려진 단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니꼬데미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보낸 서간>을 318년에 쓴 다음 니꼬데미아로 피신하였다. 또 320년에는 니꼬데미아에서 자기 주장을 항변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에게 보낸 서간>을 썼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부르기 쉬운 노래와 시들로 만들어 <향연>(饗宴: Thalia)이란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아리우스이단 논쟁은 점차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콘스탄띠누스 황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지역적인 대립이 제국의 분렬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 나머지,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통일안을 마련하도록 촉구하였다. 교회역사에서 최초로 개최된 니체아 공의회에는 300여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으며,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를 파문하였다. 콘스탄띠누스 황제는 325년에 아리우스를 일리리꿈으로 귀양보냈다가 328년에 해제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콘스탄띠누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자신의 신앙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는 336년 화해절차를 밟도록 정해진 전날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결국 파문을 풀지 못하고 죽었다.

33. 아리우스이단과 니체아 공의회
교회역사에서 아리우스이단 만큼 그리스도교 자체를 뒤흔들어 놓고, 오래 동안 물의를 일으켰던 이단은 없다. 사실 니체아 공의회가 이 이단 때문에 개최되었으며, 4-5세기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이 이단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33.1. 아리우스의 생애와 저서
아리우스(Arius: 256-336년)는 리비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에 가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루치아누스를 창시자로 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사제품을 받고 바우칼리스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318년부터 그는 성부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이시며,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요지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장은 교회의 전통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그의 설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주장을 철회하고 정통신앙을 고백하도록 여러 차례 권고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델은 318년에 이집트 지역의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100여명의 주교들과 함께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안티오키아의 동료들 중에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자기 주장을 계속 펼쳐나갔다. 그의 동조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니꼬데미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가 있었는데, 니꼬데미아는 당시 황제가 거처하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에우세비우스 주교의 영향력은 컸었다. 아리우스는 자기에게 내려진 단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니꼬데미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보낸 서간>을 318년에 쓴 다음 니꼬데미아로 피신하였다. 또 320년에는 니꼬데미아에서 자기 주장을 항변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에게 보낸 서간>을 썼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부르기 쉬운 노래와 시들로 만들어 <향연>(饗宴: Thalia)이란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아리우스이단 논쟁은 점차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콘스탄띠누스 황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지역적인 대립이 제국의 분렬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 나머지,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통일안을 마련하도록 촉구하였다. 교회역사에서 최초로 개최된 니체아 공의회에는 300여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으며,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를 파문하였다. 콘스탄띠누스 황제는 325년에 아리우스를 일리리꿈으로 귀양보냈다가 328년에 해제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콘스탄띠누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자신의 신앙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는 336년 화해절차를 밟도록 정해진 전날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결국 파문을 풀지 못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