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인 타티아누스
타티아누스의 생애에 관한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생애는 그와 관계를 맺은 유스티누스의 생애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유스티누스의 호교서에 나오는 자전적 진술에 따르면, 그는 “아시리아 사람의 땅”, 곧 메소포타미아 또는 시리아에서 태어났으나 그리스 교육을 받았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철학과 밀교에서 진리를 추구한 뒤, 그는 (유스티누스와 같이) 성서에서 진리를 찾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개종한 뒤 스승 유스티누스와 함께 얼마동안 로마에 머물렀으며, 스승과 함께 크레센스와 논쟁을 벌였다. 유스티누스가 죽은(165년) 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극단적 금욕주의파인 엔크라테이아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엔크라테이아파는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엄격주의에 뿌리를 둔 이단이다. 이들은 세상과 육체를 적대시하는 그릇된 윤리관 때문에 엄격한 금욕, 특히 육류, 술, 성생활의 절제를 그리스도교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에피파니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타티아누스는 성찬례 때 술 대신에 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때문에 그는 172년경 로마에서 파문되어 그의 사상을 이단으로 여기지 않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시리아, 킬리키아, 피시디아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2.3.1. 「그리스인들에 대한 연설」
155-170년 사이에 저술된 타티아누스의 호교서는 4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인, 곧 헬레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 그곳의 제신, 철학, 문화를 비난한다. 헬레니즘 세계는 모든 “미개한 것”에 대해서 자기들 문화가 우월하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타티아누스는 서론에서 그리스인이 자랑하는 모든 위대한 업적이 미개인으로부터 넘겨받았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이 환상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본보기로 그는 페니키아인의 문자, 이집트인의 역사 편찬, 마르시아인의 피리 연주 등을 제시하였다. 그밖에 그리스인의 수사학, 시문학, 철학은 어떤 숭고한 것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4-8장에서는 하느님과 그의 창조를, 9-16장에서는 악마론, 영론, 심리학, 구원론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17-28장에서는 그리스인의 제신, 의학, 연극, 정치, 도덕의 무의미함과 비윤리성을 입증한다. 두 장에 걸쳐 자신에 관해 저술한 뒤에 타티아누스는 31-41장에서 모세가 호메로스와 모든 그리스 저술가보다 더 오래된 인물이며, 이로써 유다교에서 유래된 그리스도교도 본원적인 진리 자체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오래됨”에 관한 논증을 전개한다. 그는 늘 토론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며 작품을 끝맺는다.
이 작품의 구조는 여러 논점들이 마치 각주처럼 더 상세히 설명하려는 의도로 되풀이되어 본론에서 긴 여론으로 벗어난다. 이때문에 논점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타티아누스의 신학도 정통신앙적 사상과 이단적 사상을 가려내기 어렵게 뒤섞여 있다. 그는 구약성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라 악한 데미우르구스의 작품으로 여겨 배척하였으며, 바울로의 편지도 일부 인정하지 않았다.
2.3.2. 「디아테사론」
우리에게 알려wu 있는 타티아누스의 두번째 작품 「디아테사론」은, 네 경전 복음서를 합친 복음서이다. 「디아테사론」이 이렇게 씌어진 최초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러하 유형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뛰어나며, 동방교회에서는 5세기까지 전례에 사용하였다. 작품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전승에 기초하여 전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중요한 사료는 아르메니아어 번역본으로 남아 있는 시리아인 에프렘의 「디아테사론 주석」이다. 그밖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라틴어 번역본들, 아르메니아어와 게오르기아어 복음서의 본문과 여러 교부의 인용이 보조 역할을 한다.
「디아테사론」의 많은 문제점은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짧은 단편만 남아 있는 이 작품의 제목은 원본이 그리스어로 씌었음을 암시하지만, 전승사는 오히려 시리아어로 씌었음을 나타낸다. 저술 장소도 저술 연도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하튼 「디아테사론」은 이미 네 복음서를 명백히 경전으로 여기는 시기에 저술되었으나, 경전이 확정적으로 결정된 시기에 저술된 것은 아니다. 타티아누스가 「디아테사론」을 어느 정도까지 “마르치온의 복음서에 반대하여 저술하였고, 또 그의 가르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야 한다.
「디아테사론」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을 골자로 예수의 생애를 연속적이고 일관되게 서술하였다. 그밖에 네 복음서를 비교적 자유롭게 발췌하거나 복음서의 순서를 바꾸었으며, 더욱이 외경의 사료들에서 금욕주의적․반유다적․그리스도 가현설적 경향을 나타내는 내용을 보완하였다. 타티아누스의 저술 동기는 실천을 촉구하기 위한 성서의 양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성서의 많은 내용을 보완한다는 사실을 정당화한다. 엘제는 이 경우 타티아누스의 신학적 근본 개념이 하느님과 그리스도교는 나뉠 수 없는 진리로 서로 일치하는 원리였다고 말한다. 본문이 여러 필사본으로 전승되어 이에 관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 작품이 복음서 본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디아테사론」은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고대 영어, 고대 독일어로 씌어진 이러한 유형의 복음서와 독일의 신비가인 작센의 루돌프의 작품 「그리스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중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시리아인 타티아누스
타티아누스의 생애에 관한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생애는 그와 관계를 맺은 유스티누스의 생애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유스티누스의 호교서에 나오는 자전적 진술에 따르면, 그는 “아시리아 사람의 땅”, 곧 메소포타미아 또는 시리아에서 태어났으나 그리스 교육을 받았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철학과 밀교에서 진리를 추구한 뒤, 그는 (유스티누스와 같이) 성서에서 진리를 찾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개종한 뒤 스승 유스티누스와 함께 얼마동안 로마에 머물렀으며, 스승과 함께 크레센스와 논쟁을 벌였다. 유스티누스가 죽은(165년) 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극단적 금욕주의파인 엔크라테이아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엔크라테이아파는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엄격주의에 뿌리를 둔 이단이다. 이들은 세상과 육체를 적대시하는 그릇된 윤리관 때문에 엄격한 금욕, 특히 육류, 술, 성생활의 절제를 그리스도교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에피파니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타티아누스는 성찬례 때 술 대신에 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때문에 그는 172년경 로마에서 파문되어 그의 사상을 이단으로 여기지 않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시리아, 킬리키아, 피시디아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2.3.1. 「그리스인들에 대한 연설」
155-170년 사이에 저술된 타티아누스의 호교서는 4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인, 곧 헬레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 그곳의 제신, 철학, 문화를 비난한다. 헬레니즘 세계는 모든 “미개한 것”에 대해서 자기들 문화가 우월하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타티아누스는 서론에서 그리스인이 자랑하는 모든 위대한 업적이 미개인으로부터 넘겨받았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이 환상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본보기로 그는 페니키아인의 문자, 이집트인의 역사 편찬, 마르시아인의 피리 연주 등을 제시하였다. 그밖에 그리스인의 수사학, 시문학, 철학은 어떤 숭고한 것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4-8장에서는 하느님과 그의 창조를, 9-16장에서는 악마론, 영론, 심리학, 구원론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17-28장에서는 그리스인의 제신, 의학, 연극, 정치, 도덕의 무의미함과 비윤리성을 입증한다. 두 장에 걸쳐 자신에 관해 저술한 뒤에 타티아누스는 31-41장에서 모세가 호메로스와 모든 그리스 저술가보다 더 오래된 인물이며, 이로써 유다교에서 유래된 그리스도교도 본원적인 진리 자체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오래됨”에 관한 논증을 전개한다. 그는 늘 토론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며 작품을 끝맺는다.
이 작품의 구조는 여러 논점들이 마치 각주처럼 더 상세히 설명하려는 의도로 되풀이되어 본론에서 긴 여론으로 벗어난다. 이때문에 논점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타티아누스의 신학도 정통신앙적 사상과 이단적 사상을 가려내기 어렵게 뒤섞여 있다. 그는 구약성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라 악한 데미우르구스의 작품으로 여겨 배척하였으며, 바울로의 편지도 일부 인정하지 않았다.
2.3.2. 「디아테사론」
우리에게 알려wu 있는 타티아누스의 두번째 작품 「디아테사론」은, 네 경전 복음서를 합친 복음서이다. 「디아테사론」이 이렇게 씌어진 최초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러하 유형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뛰어나며, 동방교회에서는 5세기까지 전례에 사용하였다. 작품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전승에 기초하여 전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중요한 사료는 아르메니아어 번역본으로 남아 있는 시리아인 에프렘의 「디아테사론 주석」이다. 그밖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라틴어 번역본들, 아르메니아어와 게오르기아어 복음서의 본문과 여러 교부의 인용이 보조 역할을 한다.
「디아테사론」의 많은 문제점은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짧은 단편만 남아 있는 이 작품의 제목은 원본이 그리스어로 씌었음을 암시하지만, 전승사는 오히려 시리아어로 씌었음을 나타낸다. 저술 장소도 저술 연도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하튼 「디아테사론」은 이미 네 복음서를 명백히 경전으로 여기는 시기에 저술되었으나, 경전이 확정적으로 결정된 시기에 저술된 것은 아니다. 타티아누스가 「디아테사론」을 어느 정도까지 “마르치온의 복음서에 반대하여 저술하였고, 또 그의 가르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야 한다.
「디아테사론」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을 골자로 예수의 생애를 연속적이고 일관되게 서술하였다. 그밖에 네 복음서를 비교적 자유롭게 발췌하거나 복음서의 순서를 바꾸었으며, 더욱이 외경의 사료들에서 금욕주의적․반유다적․그리스도 가현설적 경향을 나타내는 내용을 보완하였다. 타티아누스의 저술 동기는 실천을 촉구하기 위한 성서의 양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성서의 많은 내용을 보완한다는 사실을 정당화한다. 엘제는 이 경우 타티아누스의 신학적 근본 개념이 하느님과 그리스도교는 나뉠 수 없는 진리로 서로 일치하는 원리였다고 말한다. 본문이 여러 필사본으로 전승되어 이에 관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 작품이 복음서 본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디아테사론」은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고대 영어, 고대 독일어로 씌어진 이러한 유형의 복음서와 독일의 신비가인 작센의 루돌프의 작품 「그리스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중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