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순절에는 꼭 아침을 단식한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먹고 싶지만 단식을 하면서 그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과 함께한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런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느 가정에서 함께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요한이가 꾸벅꾸벅 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딸 마리아가 아빠를 톡톡 건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오빠 졸고 있어. 난 안 졸아!”


그러자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네가 차라리 졸았으면 좋겠구나!”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봐 주려는 노력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고 상대방은 상대방입니다. 상대방을 내 틀에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상대방은 참으로 힘든 날들을 보낼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을 접고서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능력을 축소시켜 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커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상대방을 낮춘다고 해서 내가 올라가는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와서 물었습니다.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모범을 따라 엄격한 참회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들 꿀과 메뚜기를 먹고 살았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면 그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규정을 넘어서서 스스로에게 특별한 계율을 부여한 점에 있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을 것입니다. 군중들에게는 높은 완덕을 가르치시면 서도 그분과 그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씀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분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 곧 10월 1일에 의무적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또 기근, 전쟁, 가뭄 같은 특별한 재난을 겪을 때, 슬픔과 고난의 표현으로써 특히 단식일을 정하고 지켰습니다. 또 모범적인 신앙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한 주일에 두 번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의 하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그것과 비슷한 관습을 지키고 있었는데, 아마 스승의 엄격한 생활을 본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40주야를 단식하셨습니다. 하지만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대중 앞에 드러내 놓고 하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의 내적인 의미는 슬픔이지만 지금은 기쁨의 때입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올 때 그들은 장례식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신랑은 이미 와 있으며 자기와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주위에 손님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기에 단식이란 여기서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지금은 기쁨과 환희의 때이기에 단식은 이 독특한 시간과 모순 되는 것입니다.




 보통 이렛 동안 계속되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그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여 한껏 신랑과 즐겨야 합니다. 그 때문에 초청을 받았고, 또 그것이 신랑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빼앗긴다는 말은 폭력에 의한 이별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최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다 문학에서도 <메시아의 날>을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때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 기쁨의 때가 앞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1세기 초대 교회에서는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2;14,23;27,9; 1고린7,5;2고린6,5에 그 증언들이 있습니다. 아마 그 단식일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세기 말엽에는 부활축일 전에 단식을 했습니다. 지금은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 단식을 하고 있고, 매 금요일 마다 금육을 지키고 있습니다. 단식과 금육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단식과 금육을 통해 절약한 것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눔에 있습니다. 실천함에 있는 것입니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복음의 정신 한 부분을 가져다 그것을 유다교 정신에 맞추려 하는 노력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정신도 그 핵심을 잃고, 유다이즘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물에 담근 일이 없는 새 천이 한 번 물에 들어가면 줄어들어서 낡은 천을 잡아 등겨 찢어지거나 구멍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임이 증명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바리사이적 유다이즘입니다. 그들이 율법에 덧붙여 놓은 번잡스럽고 다루기 어려운 규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때는 새로운 탄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의 회개와 완전한 마음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단지 옛것에 새로운 규정이나 의식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마스커를 향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0여년의 시간을 준비하게 됩니다. 회심 이후에 즉시 복음을 전했다면, 그래서 비록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는 행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가죽부대는 나귀나 낙타 등을 이용하여 실어 날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찰로 인하여 표피가 엷어지고 약해졌습니다. 더구나 새 포도주는 발효하여 그 부대를 터뜨리고 포도주가 쓸모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고 그릇된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헌 가죽부대입니다. 그 헌 부대에는 새 술인 복음을 넣을 수가 없습니다. 새 술은 편견을 버린 마음, 그것을 이해하고 맛볼 수 있는 순진한 새 마음이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은 유다이즘에 없는 이 새로운 정신을 인생에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그저 한치 앞만을 내다보면서 남을 판단하는 나. 나를 좀더 성숙시키고, 나를 좀더 말 못하게 하고, 나를 좀더 못 보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내 것 만을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의 것이 옳다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옹졸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어, 제가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은총 주소서. 아멘.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것을 고집하고, 내 틀에 상대방을 맞추려 하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애물이요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또 어떤 바리사이가 되어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습니까?




2.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낀 점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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