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토마스)

 

김범우는 영조 왕 27년 신미년(1751년) 4월 23일(음력)에 서울 명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사맹 벼슬을 하던 경주 김의시오, 어머니는 가신대부 벼슬을 하던 이명재의 딸 완산(完山) 이씨였다. 10남매 중 8형제의 맏이인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정지’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여 당시 매우 어려웠던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스물 두 살 때인 1773년에 국가 통역관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김범우의 집안에는 삼촌들과 형제들 중에 꽤 여러 사람들이 통역관으로 일하였다. 김범우는 당시 선비 대중의 존경과 추종을 한몸에 받고 있던 이벽(李檗)의 인품에 매혹되어 이 벽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따라서 이 벽의 천주학 강의에 처음부터 아무 의심 없이 심취하게 되었다.


  1784년 봄 이 벽에게서 성세를 받고 두미협에서 수표에 있던 이 벽의 집에 드나들면서 천주학 교리를 배우고, 또 교회 예절에 참례하였다. 양반의 집에 상인들이 출입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이 벽의 뜻을 깨닫자, 김범우는 즉시 자신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내놓고 사용하여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 벽은 이원의를 쾌히 받아들이고 즉시 김범우의 집을 임시 교회 집회장소로 쓰게 되었다. 이 곳이 바로 오늘의 명동 대성당이 자리잡은 근처이다.


  음력으로 정했던 임시 주일에 한국 최초의 신도들은 김범우의 집에 모여 교리 고우를 주로 하였고, 첨례와 기도를 바쳤다. 그당시 이 벽은 마재, 양근, 포천, 미리내 등지에까지 다니며 천주학 강의를 하였고, 서울 한복판에서는 이가환, 이기양 같은 원로 대학자들과 천주학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명례방에 정기적으로 모이던 일은 1784년 늦가을부터 음력으로 매월 초 하루․이레․열 나흘․스무 하루․스무 여드레 날이었다. 1785년 이른봄에 교회 예절을 거행하던 중 김범우는 마침내 초주 포리(逋吏)들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혹심한 매를 맞고 귀양가게 되니,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후 천주교 때문에 최초로 매를 맞은 사람이고, 최초로 귀양을 간 박해받은 사람이었다. 이에 대한 국내외의 기록을 보자.


  ꡒ복음이 조선에 들어온 지 겨우 1년 후인 을사년(1785년)초에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킬 만한 어떤 과감한 조처로 복음의 진전을 막고자 하였다. 천주교인들의 이름난 지도자들에게 감히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므로 그는 본명을 ‘토마스’라고 하는 김범우를 잡아 자기 법정에 끌어오게 하였다.


  김범우는 서울 태생으로 중요한 역관 집안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는 이 벽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1784년에 천주교를 배운 것도 이 벽을 통해서였다. 그는 은총의 부르심에 즉시 응하여 열심히 실천하기 시작하였고, 자기의 온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 계급에서 여러 사람들 가르쳐 입교시켰다.


  김범우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하라고 재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배교하기를 끈기 있게 거부하였다. 여러 가지 고문이 그에게 가해졌지만 그는 잠시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권일신(사베리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자기의 충실한 동교인을 버려 두는 것이 자기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여러 신자들과 함께 판서 앞에 나아가 용감하게 외쳤다.


  ‘우리는 모두가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대감이 그에게 내리는 운명을 우리도 같이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판서는 그렇듯 유력하고 유명한 인물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김범우를 박해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를 귀양보냈다.


  귀양간 곳에서 김범우는 계속하여 공공연하게 자기 종교를 신봉하였다. 그는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 그의 용기와 인내심은 잠시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상처의 악화로 귀양지에서 죽었다.ꡓ


  이 박해 사건에 관한 당시 천주교 박해자들이 기록한 국내 기록을 보자.


  ꡒ<을사년에 형조에서 적발한 사건> 을사년(1785) 봄에 이승훈이 정약전, 정약용 등과 더불어 설법 즉 교리 강의를 하였는데, 장소는 장례원 앞에 있는 중인 계급의 김범우 집이었다. 거기에는 이 벽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이는 이정형(李廷馨)의 후손이요. 병사 이 격의 동생이며, 동시에 병사 이 석의 형이었다.


  이 벽은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쓰고, 어깨에까지 내리웠으며, 바람벽을 의지하여 앉았으며,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스스로 이 벽의 제자라고 칭하며, 책을 들고 둘러 모시고 앉았다. 이 벽이 설법하고 가르치며 꾸짖곤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유교에서 사제지간에 갖추는 예의에 비하여 훨씬 더 엄하였고, 날짜를 기약하여 모이기를 이미 수개월간이나 하였으며, 양반․중인 등 여러 선비들이 수십명씩이나 되었다.


  그런데 추조 포리가 그 모임을 술마시고 도박하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하여 들어가 본즉, 거의다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손가락으로 이상한 놀림을 하였다. 그 예수 그림과 책과 물건들을 압수하여 추조에 가져오니, 형조판서 김화진은 그 양반집 자제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 것을 애석히 여기고 잘 타일러서 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옥에 가두었다.


  권일신과 그 아들, 그리고 이윤하, 이총억, 정 섭 등 다섯 명은 곧바로 조정으로 들어가 성화상을 되돌려 달라고 청하였으며, 누누이 호소함에도 형조판서는 누구누구가 이러는지를 심문한 다음 크게 놀라 책망하고 타이른 뒤 다시 내어 보냈는데, 오직 김범우만은 귀양은 보내었다.


  이에 태학 이용서 등이 통문을 만들어서 사학을 엄히 배척하는 글을 돌렸는데, 누가 관연하였는지 그 성명은 열거하지 아니하였다.


  토마스 김범우는 귀양지에서 열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큰소리로 경문을 외우며 미신자들에게 천주를 알게 하고, 그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 무자비하게 맞은 매의 장독으로 계속 고생하다가, 2년 후인 1787년 정미년 음력 7월 16일에 천주를 부르며 거룩히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에서 신앙을 위하여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첫 번째 희생 제물이 되었다.


  김범우는 집안이 부유하였고, 동생들과 아들들이 있었는데, 특히 동생들인 적우․현우․관우 등은 열심한 신자로서 모두 김범우에게서 신앙을 받았다. 이 열심한 동생들은 김범우의 표양에 따라 신유박해 때 온갖 형벌을 부릅쓰고 용감히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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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토마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김범우는 영조 왕 27년 신미년(1751년) 4월 23일(음력)에 서울 명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사맹 벼슬을 하던 경주 김의시오, 어머니는 가신대부 벼슬을 하던 이명재의 딸 완산(完山) 이씨였다. 10남매 중 8형제의 맏이인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정지’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여 당시 매우 어려웠던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스물 두 살 때인 1773년에 국가 통역관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김범우의 집안에는 삼촌들과 형제들 중에 꽤 여러 사람들이 통역관으로 일하였다. 김범우는 당시 선비 대중의 존경과 추종을 한몸에 받고 있던 이벽(李檗)의 인품에 매혹되어 이 벽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따라서 이 벽의 천주학 강의에 처음부터 아무 의심 없이 심취하게 되었다.

      1784년 봄 이 벽에게서 성세를 받고 두미협에서 수표에 있던 이 벽의 집에 드나들면서 천주학 교리를 배우고, 또 교회 예절에 참례하였다. 양반의 집에 상인들이 출입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이 벽의 뜻을 깨닫자, 김범우는 즉시 자신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내놓고 사용하여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 벽은 이원의를 쾌히 받아들이고 즉시 김범우의 집을 임시 교회 집회장소로 쓰게 되었다. 이 곳이 바로 오늘의 명동 대성당이 자리잡은 근처이다.

      음력으로 정했던 임시 주일에 한국 최초의 신도들은 김범우의 집에 모여 교리 고우를 주로 하였고, 첨례와 기도를 바쳤다. 그당시 이 벽은 마재, 양근, 포천, 미리내 등지에까지 다니며 천주학 강의를 하였고, 서울 한복판에서는 이가환, 이기양 같은 원로 대학자들과 천주학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명례방에 정기적으로 모이던 일은 1784년 늦가을부터 음력으로 매월 초 하루․이레․열 나흘․스무 하루․스무 여드레 날이었다. 1785년 이른봄에 교회 예절을 거행하던 중 김범우는 마침내 초주 포리(逋吏)들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혹심한 매를 맞고 귀양가게 되니,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후 천주교 때문에 최초로 매를 맞은 사람이고, 최초로 귀양을 간 박해받은 사람이었다. 이에 대한 국내외의 기록을 보자.

      ꡒ복음이 조선에 들어온 지 겨우 1년 후인 을사년(1785년)초에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킬 만한 어떤 과감한 조처로 복음의 진전을 막고자 하였다. 천주교인들의 이름난 지도자들에게 감히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므로 그는 본명을 ‘토마스’라고 하는 김범우를 잡아 자기 법정에 끌어오게 하였다.

      김범우는 서울 태생으로 중요한 역관 집안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는 이 벽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1784년에 천주교를 배운 것도 이 벽을 통해서였다. 그는 은총의 부르심에 즉시 응하여 열심히 실천하기 시작하였고, 자기의 온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 계급에서 여러 사람들 가르쳐 입교시켰다.

      김범우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하라고 재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배교하기를 끈기 있게 거부하였다. 여러 가지 고문이 그에게 가해졌지만 그는 잠시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권일신(사베리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자기의 충실한 동교인을 버려 두는 것이 자기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여러 신자들과 함께 판서 앞에 나아가 용감하게 외쳤다.

      ‘우리는 모두가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대감이 그에게 내리는 운명을 우리도 같이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판서는 그렇듯 유력하고 유명한 인물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김범우를 박해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를 귀양보냈다.

      귀양간 곳에서 김범우는 계속하여 공공연하게 자기 종교를 신봉하였다. 그는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 그의 용기와 인내심은 잠시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상처의 악화로 귀양지에서 죽었다.ꡓ

      이 박해 사건에 관한 당시 천주교 박해자들이 기록한 국내 기록을 보자.

      ꡒ<을사년에 형조에서 적발한 사건> 을사년(1785) 봄에 이승훈이 정약전, 정약용 등과 더불어 설법 즉 교리 강의를 하였는데, 장소는 장례원 앞에 있는 중인 계급의 김범우 집이었다. 거기에는 이 벽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이는 이정형(李廷馨)의 후손이요. 병사 이 격의 동생이며, 동시에 병사 이 석의 형이었다.

      이 벽은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쓰고, 어깨에까지 내리웠으며, 바람벽을 의지하여 앉았으며,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스스로 이 벽의 제자라고 칭하며, 책을 들고 둘러 모시고 앉았다. 이 벽이 설법하고 가르치며 꾸짖곤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유교에서 사제지간에 갖추는 예의에 비하여 훨씬 더 엄하였고, 날짜를 기약하여 모이기를 이미 수개월간이나 하였으며, 양반․중인 등 여러 선비들이 수십명씩이나 되었다.

      그런데 추조 포리가 그 모임을 술마시고 도박하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하여 들어가 본즉, 거의다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손가락으로 이상한 놀림을 하였다. 그 예수 그림과 책과 물건들을 압수하여 추조에 가져오니, 형조판서 김화진은 그 양반집 자제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 것을 애석히 여기고 잘 타일러서 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옥에 가두었다.

      권일신과 그 아들, 그리고 이윤하, 이총억, 정 섭 등 다섯 명은 곧바로 조정으로 들어가 성화상을 되돌려 달라고 청하였으며, 누누이 호소함에도 형조판서는 누구누구가 이러는지를 심문한 다음 크게 놀라 책망하고 타이른 뒤 다시 내어 보냈는데, 오직 김범우만은 귀양은 보내었다.

      이에 태학 이용서 등이 통문을 만들어서 사학을 엄히 배척하는 글을 돌렸는데, 누가 관연하였는지 그 성명은 열거하지 아니하였다.

      토마스 김범우는 귀양지에서 열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큰소리로 경문을 외우며 미신자들에게 천주를 알게 하고, 그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 무자비하게 맞은 매의 장독으로 계속 고생하다가, 2년 후인 1787년 정미년 음력 7월 16일에 천주를 부르며 거룩히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에서 신앙을 위하여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첫 번째 희생 제물이 되었다.

      김범우는 집안이 부유하였고, 동생들과 아들들이 있었는데, 특히 동생들인 적우․현우․관우 등은 열심한 신자로서 모두 김범우에게서 신앙을 받았다. 이 열심한 동생들은 김범우의 표양에 따라 신유박해 때 온갖 형벌을 부릅쓰고 용감히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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