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과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삶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살아오던 그 과부에게 아들의 죽음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장례 행렬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례 행렬 안에서 당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슬픔에 처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11 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해 주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로 가셨습니다. 나인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다볼 산을 지나 에스드렐론 평야를 거쳐 사마리아로 가는 길가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곳은 아주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제자들도 군중들도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큰 행렬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인아라는 고을의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대, 장례행렬과 마주치게 도었습니다. 즉 그 동네의 성문에서 두 행렬이 마주친 것입니다. 한 행렬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 이끄는 행렬이었고, 다른 한 행렬은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외아들이었으며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요절을 죄의 벌로 간주했습니다. 일찍 죽은 것도 억울한데 그것이 죄의 결과로 여겨진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입니다. 좌우지간 남편을 잃고 유일한 삶의 희망으로 여겨온 아들까지도 잃게 된 이 과부는 눈물로 아들의 주검을 따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비통한 슬픔에 가슴 아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위로할 수는 있었지만 그녀를 도와 줄 수는 없었습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까지 잃은 과부를 가엾이 이기시어 그녀를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 또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울지 마라. 내가 있지 않느냐? 힘을 내거라! 내가 해결해 주마!”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죽은 과부의 아들의 시신은 아마포에 싸여 관 속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동작은 상여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이 죽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예수님의 부르심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돌려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십니다(로마4,17).




웃어 봅시다.


예비자 교리 시간에 수녀님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교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젊은이를 일으켜 주셨는데 그 이유를 아세요?” 그러자 한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 젊은이는 예의가 없었던 거야. 어른이 지나가시면 당연히 일어나서 인사해야지.”


“……”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그 젊은이는 생명을 회복하여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나 욕하는 사람 때문에 귀 간지러워서 죽을 뻔 했네..엄니! 엄니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자겠네유.)


죽은 자를 소생시킴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과 자비를 입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자비를 베푸는 데에 사용하셨습니다. 힘과 자비는 구원의 때의 상징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열왕기 상 17,23)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소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이를 살리지만, 엘리야는 기도와 정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죽은 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할 힘이 있습니다. 필요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힘을 가지고 필요 없는 곳에 사용하게 된다면 결코 그 끝이 평화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구경꾼들의 찬양은 두 가지 구원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과 더불어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가 기쁨의 노래로 예언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찬미하여라,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당신의 백성을 찾아와 해방시키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 있는 구세주를 당신 종 다윗의 가문에서 일으키셨다”(루가1,68-69).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군중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더 뛰어난 예언자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됩니다. 사실 나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일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이 기쁜 소식을, 놀라운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태풍 매미의 피해로 고통 중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들. 그들의 상처를 외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를 살려 주십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이 말씀은 죽어 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어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젊은이는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입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성당에서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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