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항검(아우구스띠노)

 



  1756년, 지체가 그다지 높지 않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은 덕망이 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또한 많은 재산으로 인하여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전주 고을 초남(현, 전주 서북의 조남)에서 살고 있던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그 교를 신봉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평판에 이끌려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양근의 권씨 집안을 찾아갔다. 이때 독실한 신자인 권일신(사베리오)이 유항검을 인도하여 천주교에 입교시켰다고 한다.


  그의 집안을 보면 전체적으로 순교자가 많았는데, 동생 유관검은 그와 같은 날인 1801년 10월 24일에, 장남 유중철(요한)과 차남 유문석(요한)은 1801년 11월 14일에, 그리고 부인 신 희와 조카 유중성(마태오),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등은 1801년 1월 31일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집안이 매우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그 자신의 신앙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구스띠노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유항검은 곧 성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 많은 가족들을 가르쳤으며, 또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에게도 이 훌륭한 교리를 전파하였댜. 그의 열성과 항구한 마음은 이후 그로 하여금 남쪽 지방에 있는 천주교회의 반석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여 주었다.


  1787년경 열심한 교우 권일신(사베이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 형제 등은 복음의 전파를 보다 쉽게 하고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자신들끼리 교계 제도를 설정하였다. 「조선 천주교회사」에서는 이 때를 일컬어 ꡒ임시 준성직 제도 시대ꡓ라고 한다. 유 아우구스띠노도 신부로 임명되어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임지로 내려간 그는 그 곳에서 설교하고 성세도 주고 고백성사와 견진성사도 주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준 성사가 무효였지만, 이러한 성직 수행으로 인하여 새로운 신앙의 전파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은 사실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 후 여러 가지 교회 서적을 정독한 결과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즉시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내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 신부들의 지시를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성사 집행의 부당성을 알게 된 후 그들은 평신도의 위치로 되돌아가 열심히 전교에 힘썼으며, 북경으로부터 주교의 회답이 전해지고 부터는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게 되었다.


  한편 또 다른 주교의 편지에 적혀 있는 미신과 조상 숭배에 대한 결정은 일부 조선 교우들에게 배교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유교에 젖어 있던 그들은 조상 숭배가 하느님 숭배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교리와, 한편으로 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국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두가지 문제 사이에서 고민했으며, 혹마음이 굳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의 교리를 저버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하여 복음의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윤지충과 가까이 지내면서 천주교 서적을 읽기도 하였다.


  1791년 신해교난을 겪고 난 후,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켜 다시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보좌하였다. 그러나 박해로부터 신부를 보호하려는 엄중한 비밀로 인하여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의 교우들은 그때 성사를 받을 수 없었다. 이렇게 비밀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의 박해는 교우들 사이에 계속 파고들었으며, 1801년 1월에 이르러 대왕대비 김씨는 새로운 윤음을 반포하고 신유교난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신해교난 이후 1801년까지 전라도는 매우 평온하였고 천주교인도 매우 많아졌다. 전라도 지방에 이렇게 빨리 복음이 전파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아우구스띠노였으며, 이에 그는 박해의 대상에 제일 먼저 오른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3월에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감영으로 끌려간 아우구스띠노는 먼저 감사의 준엄한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감사는 그를 다루기에 마음의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관할의 이름난 토호로 중앙에 출입이 잦은 사람을 그저 죄인으로 다루기에는 좀 곤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의 엄한 명령이 있어 감사는 위엄과 절차를 갖추어 첫 심문에 임하였다.


  ꡒ조정에서는 너를 중죄인으로 잡아 단단히 심문하고 이 기록을 속히 조정으로 보내라 했으니,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ꡓ


  ꡒ다른 죄야 있으리오만, 소인이 천주교를 믿으니까 혹시 그것을 죄라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ꡓ


  ꡒ사학을 믿는 것도 크게 국령을 거스리는 죄이겠지만, 네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들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어디 그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보라.ꡓ


  ꡒ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백성이 되어 제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가지고 조정의 중신들이 오해하거나 왜곡을 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ꡓ


  ꡒ유언비어라니? 나는 금시초문인데, 좀더 자세히 말해 보라.ꡓ


  ꡒ실은 선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아끼시어 국태 민안하였는데, 노론측에서 천주교를 사학이니 금수지도니 하여 교인들을 전부 없애려고 갖은 모략으로 상소를 올리며 임금님을 괴롭혔습니다. 이때 임금님께서는 천주교인을 다 죽이는 것보다 우리 동양의 정학, 즉 유학에 힘쓰면 사학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하시면서 그들의 극단적 반대를 무라하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애매한 백성을 다치지 않도록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정권이 그들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반대파의 인물들을 타도하는 구실로 사학을 신봉한다고 몰았고, 이제 와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역적으로 몰아 일거 양득의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저 같은 사람도 그런 무리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오판한 데서 이런 분부가 내려졌는가 합니다.ꡓ


  ꡒ지방의 감사로서 나는 그러한 당파나 사학의 진가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만 나라의 명령대로 직책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데 네가 서양인을 청해 오는 데 비용을 많이 부담하였으며, 몰래 외국인을 입국시켜 사도를 널리 전하게 하였고, 그 외국인을 너의 집으로 안내하여 여러 날 묵게 하면서 각지에서 모여든 교인들에게 사학을 가르쳤다는 것이 사실이냐?ꡓ


  ꡒ제가 비용을 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선비들 중에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의 서적을 연구하면서 농공상 모두를 진흥시켜 산업에 힘쓰고, 진보된 학문이나 기술을 배워 잘살아 가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신학풍에 가담하였었는바, 그 신학풍의 근본이 되고 있는 천주교를 또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천주학은 이론적인 학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경천 애인(敬天愛人)하고 권선 피악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이 말씀하신 ‘천(天)’과 ‘상제’를 철저히 연구한바, 상제가 곧 천주인 것을 알게 되고 그 상제와 우리 인간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는 삼강 오륜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지킬 윤리 도덕은 삼강오륜만 가지고는 부족하며, 이에 더 완전하고 실질적인 천주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국 제민의 지름길이 된다 생각하고 이를 전파하려고 한 것입니다. 천자국이니 사대주의니 대국이니 속국이니 하는 중국의 유학적 예법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정학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이 변해 감에 따라 다른 외국의 학문과 기술과 문물이 들어오는데, 거기에 바른 비판을 가해서 어느것이 구국 제민의 도가 되는지 알아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 학자들이 이 새로운 구국 제민의 도를 좀더 자세히 공부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함에, 저의 살림이 좀 넉넉하므로 많이 부담하였을 뿐입니다.ꡓ


  이렇게 대답한 다음, 계속하여 서양과의 교섭이 필요함을 설명하였다.


  ꡒ소위 서양의 선박을 초빙하여 통상을 맺으려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는 외세 의존이 아닙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한갓 사사로운 당파에만 급급하여 상대방을 타도하기에 골몰할 뿐, 학문이나 도의 진가를 판다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금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을 편히 살지 못하게 하는 위정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을 선도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우리나라 보다 앞선 나라와 교섭하여 나라를 부강케 해야 할 것입니다. 한때 우리 교인 중 몇몇이 북경에 있는 주교를 통하여 통상 사절단과 함께 외국의 선비, 기술자들을 대동하고 오도록 포르투갈 여왕에게 연락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일을 모역 행위라고 오인한 듯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저희들의 진의를 상세히 아뢴 것뿐이니, 그대로 기록하셔서 조정에 올리시길 바랍니다.ꡓ


  감사는 보통 죄인 같았으면 이런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억압하여 원하는 진술을 받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띠노의 위치를 만만히 보지 않고 자세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다만 감사의 직책상 그대로 아우구스띠노를 중앙으로 압송할 수 없어 30도의 곤장을 치고는, ꡒ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끝내 고집하겠느냐? 수천 냥의 자금을 부담한 것이 사실이냐? 그리고 연루된 도당은 누구냐?ꡓ는 등의 질문을 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곤장에 정신을 잃고 엉겁결에 성교는 구태여 고집하지 않겠지만, 서양 선박을 초빙할 때의 주장자는 황사영이었고, 그와 동조한 몇몇이 있었으나 지금 그 이름을 기억치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아우구스띠노를 심문한 후, 감사는 필시 연루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남은 가족들과 집안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을 잡아다 심문토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아우구스띠노를 주범이라 생각하고 중앙으로 압송하였다. 당시 전주의 감사가 함께 송달한 장계에는 ꡒ도내 사학 죄인 유항검은 요사 망탄하여 스스로 윤기를 끊고 무리를 번창케 하였습니다. 그는 주문모를 아비로 섬기고 그를 영접하여 여러날 머물게 했으며, 그의 서찰을 받아 북경 천주교에 보내어 상본과 성유를 가져왔다 합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모의하기를, 신부 한 사람으로는 그 세력의 확장이 어려우므로 서양의 큰 배를 들여와 천주교를 이 나라에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 교의 세력이 여러 군과 읍에 깊이 퍼져서 그 수가 매우 많으니 청하옵건대 이를 엄벌하옵소서ꡓ라고 적혀 있었다.


  서울로 압송된 아우구스띠노는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끝까지 ꡒ나라를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양 선박을 초청하려던 것이 아니고, 서양과 우리나라가 친교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아, 우리도 남과 같이 잘살아 갈 방도를 취하려고 한 것이며, 이렇게 되면 정부에서도 천주교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탄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때문입니다ꡓ라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완고하고 고루한 유학사상에 젖은 위정자들이 그러한 말을 곧이 들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정에서는 유 아우구스띠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그 판결문은, ꡒ죄인 유항검은 사학에 미혹하여 이를 강습하고, 주문모를 신부로 받들며, 신주를 묻고 제사를 폐하는 등 그 죄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등과 함께 외국에 비밀히 상통하여 큰 배를 청하고 우리나라를 위협하려 하였으니, 이는 만 번 죽어도 부족한 대역부도의 죄이라, 이에 그 죄로써 결안한다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 대비의 주장대로 호남인들이 천주교를 신봉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하여 전주 감영으로 다시 보내져, 전주성 내에서 참수되고 능지처참을 당하도록 하였다.


  다른 교우들과 함께 아우구스띠노는 다시 전주로 내려 보내졌고, 감사는 판결문대로 법을 집행하게 되었다. 한때 아우구스띠노가 곤장을 맞고 일시적으로 성교의 신봉을 구태여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간 참회할 시간도 많았고, 판결문에서도 천주교인으로서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단정하였으며, 평소 그가 교회를 위하여 이룩한 공로나 열심한 신앙,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가 순교하기 전에 그에 대한 은총의 기도가 있었으니, 누구도 그의 순교를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띠노는 자신의 피로 죄를 씻는 은총을 얻고, 10월 24일 전주의 성 안에서 능지처참되어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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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항검(아우구스띠노)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756년, 지체가 그다지 높지 않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은 덕망이 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또한 많은 재산으로 인하여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전주 고을 초남(현, 전주 서북의 조남)에서 살고 있던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그 교를 신봉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평판에 이끌려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양근의 권씨 집안을 찾아갔다. 이때 독실한 신자인 권일신(사베리오)이 유항검을 인도하여 천주교에 입교시켰다고 한다.

      그의 집안을 보면 전체적으로 순교자가 많았는데, 동생 유관검은 그와 같은 날인 1801년 10월 24일에, 장남 유중철(요한)과 차남 유문석(요한)은 1801년 11월 14일에, 그리고 부인 신 희와 조카 유중성(마태오),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등은 1801년 1월 31일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집안이 매우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그 자신의 신앙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구스띠노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유항검은 곧 성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 많은 가족들을 가르쳤으며, 또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에게도 이 훌륭한 교리를 전파하였댜. 그의 열성과 항구한 마음은 이후 그로 하여금 남쪽 지방에 있는 천주교회의 반석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여 주었다.

      1787년경 열심한 교우 권일신(사베이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 형제 등은 복음의 전파를 보다 쉽게 하고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자신들끼리 교계 제도를 설정하였다. 「조선 천주교회사」에서는 이 때를 일컬어 ꡒ임시 준성직 제도 시대ꡓ라고 한다. 유 아우구스띠노도 신부로 임명되어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임지로 내려간 그는 그 곳에서 설교하고 성세도 주고 고백성사와 견진성사도 주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준 성사가 무효였지만, 이러한 성직 수행으로 인하여 새로운 신앙의 전파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은 사실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 후 여러 가지 교회 서적을 정독한 결과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즉시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내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 신부들의 지시를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성사 집행의 부당성을 알게 된 후 그들은 평신도의 위치로 되돌아가 열심히 전교에 힘썼으며, 북경으로부터 주교의 회답이 전해지고 부터는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게 되었다.

      한편 또 다른 주교의 편지에 적혀 있는 미신과 조상 숭배에 대한 결정은 일부 조선 교우들에게 배교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유교에 젖어 있던 그들은 조상 숭배가 하느님 숭배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교리와, 한편으로 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국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두가지 문제 사이에서 고민했으며, 혹마음이 굳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의 교리를 저버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하여 복음의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윤지충과 가까이 지내면서 천주교 서적을 읽기도 하였다.

      1791년 신해교난을 겪고 난 후,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켜 다시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보좌하였다. 그러나 박해로부터 신부를 보호하려는 엄중한 비밀로 인하여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의 교우들은 그때 성사를 받을 수 없었다. 이렇게 비밀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의 박해는 교우들 사이에 계속 파고들었으며, 1801년 1월에 이르러 대왕대비 김씨는 새로운 윤음을 반포하고 신유교난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신해교난 이후 1801년까지 전라도는 매우 평온하였고 천주교인도 매우 많아졌다. 전라도 지방에 이렇게 빨리 복음이 전파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아우구스띠노였으며, 이에 그는 박해의 대상에 제일 먼저 오른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3월에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감영으로 끌려간 아우구스띠노는 먼저 감사의 준엄한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감사는 그를 다루기에 마음의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관할의 이름난 토호로 중앙에 출입이 잦은 사람을 그저 죄인으로 다루기에는 좀 곤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의 엄한 명령이 있어 감사는 위엄과 절차를 갖추어 첫 심문에 임하였다.

      ꡒ조정에서는 너를 중죄인으로 잡아 단단히 심문하고 이 기록을 속히 조정으로 보내라 했으니,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ꡓ

      ꡒ다른 죄야 있으리오만, 소인이 천주교를 믿으니까 혹시 그것을 죄라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ꡓ

      ꡒ사학을 믿는 것도 크게 국령을 거스리는 죄이겠지만, 네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들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어디 그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보라.ꡓ

      ꡒ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백성이 되어 제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가지고 조정의 중신들이 오해하거나 왜곡을 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ꡓ

      ꡒ유언비어라니? 나는 금시초문인데, 좀더 자세히 말해 보라.ꡓ

      ꡒ실은 선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아끼시어 국태 민안하였는데, 노론측에서 천주교를 사학이니 금수지도니 하여 교인들을 전부 없애려고 갖은 모략으로 상소를 올리며 임금님을 괴롭혔습니다. 이때 임금님께서는 천주교인을 다 죽이는 것보다 우리 동양의 정학, 즉 유학에 힘쓰면 사학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하시면서 그들의 극단적 반대를 무라하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애매한 백성을 다치지 않도록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정권이 그들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반대파의 인물들을 타도하는 구실로 사학을 신봉한다고 몰았고, 이제 와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역적으로 몰아 일거 양득의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저 같은 사람도 그런 무리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오판한 데서 이런 분부가 내려졌는가 합니다.ꡓ

      ꡒ지방의 감사로서 나는 그러한 당파나 사학의 진가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만 나라의 명령대로 직책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데 네가 서양인을 청해 오는 데 비용을 많이 부담하였으며, 몰래 외국인을 입국시켜 사도를 널리 전하게 하였고, 그 외국인을 너의 집으로 안내하여 여러 날 묵게 하면서 각지에서 모여든 교인들에게 사학을 가르쳤다는 것이 사실이냐?ꡓ

      ꡒ제가 비용을 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선비들 중에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의 서적을 연구하면서 농공상 모두를 진흥시켜 산업에 힘쓰고, 진보된 학문이나 기술을 배워 잘살아 가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신학풍에 가담하였었는바, 그 신학풍의 근본이 되고 있는 천주교를 또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천주학은 이론적인 학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경천 애인(敬天愛人)하고 권선 피악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이 말씀하신 ‘천(天)’과 ‘상제’를 철저히 연구한바, 상제가 곧 천주인 것을 알게 되고 그 상제와 우리 인간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는 삼강 오륜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지킬 윤리 도덕은 삼강오륜만 가지고는 부족하며, 이에 더 완전하고 실질적인 천주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국 제민의 지름길이 된다 생각하고 이를 전파하려고 한 것입니다. 천자국이니 사대주의니 대국이니 속국이니 하는 중국의 유학적 예법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정학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이 변해 감에 따라 다른 외국의 학문과 기술과 문물이 들어오는데, 거기에 바른 비판을 가해서 어느것이 구국 제민의 도가 되는지 알아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 학자들이 이 새로운 구국 제민의 도를 좀더 자세히 공부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함에, 저의 살림이 좀 넉넉하므로 많이 부담하였을 뿐입니다.ꡓ

      이렇게 대답한 다음, 계속하여 서양과의 교섭이 필요함을 설명하였다.

      ꡒ소위 서양의 선박을 초빙하여 통상을 맺으려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는 외세 의존이 아닙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한갓 사사로운 당파에만 급급하여 상대방을 타도하기에 골몰할 뿐, 학문이나 도의 진가를 판다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금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을 편히 살지 못하게 하는 위정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을 선도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우리나라 보다 앞선 나라와 교섭하여 나라를 부강케 해야 할 것입니다. 한때 우리 교인 중 몇몇이 북경에 있는 주교를 통하여 통상 사절단과 함께 외국의 선비, 기술자들을 대동하고 오도록 포르투갈 여왕에게 연락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일을 모역 행위라고 오인한 듯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저희들의 진의를 상세히 아뢴 것뿐이니, 그대로 기록하셔서 조정에 올리시길 바랍니다.ꡓ

      감사는 보통 죄인 같았으면 이런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억압하여 원하는 진술을 받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띠노의 위치를 만만히 보지 않고 자세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다만 감사의 직책상 그대로 아우구스띠노를 중앙으로 압송할 수 없어 30도의 곤장을 치고는, ꡒ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끝내 고집하겠느냐? 수천 냥의 자금을 부담한 것이 사실이냐? 그리고 연루된 도당은 누구냐?ꡓ는 등의 질문을 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곤장에 정신을 잃고 엉겁결에 성교는 구태여 고집하지 않겠지만, 서양 선박을 초빙할 때의 주장자는 황사영이었고, 그와 동조한 몇몇이 있었으나 지금 그 이름을 기억치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아우구스띠노를 심문한 후, 감사는 필시 연루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남은 가족들과 집안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을 잡아다 심문토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아우구스띠노를 주범이라 생각하고 중앙으로 압송하였다. 당시 전주의 감사가 함께 송달한 장계에는 ꡒ도내 사학 죄인 유항검은 요사 망탄하여 스스로 윤기를 끊고 무리를 번창케 하였습니다. 그는 주문모를 아비로 섬기고 그를 영접하여 여러날 머물게 했으며, 그의 서찰을 받아 북경 천주교에 보내어 상본과 성유를 가져왔다 합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모의하기를, 신부 한 사람으로는 그 세력의 확장이 어려우므로 서양의 큰 배를 들여와 천주교를 이 나라에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 교의 세력이 여러 군과 읍에 깊이 퍼져서 그 수가 매우 많으니 청하옵건대 이를 엄벌하옵소서ꡓ라고 적혀 있었다.

      서울로 압송된 아우구스띠노는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끝까지 ꡒ나라를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양 선박을 초청하려던 것이 아니고, 서양과 우리나라가 친교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아, 우리도 남과 같이 잘살아 갈 방도를 취하려고 한 것이며, 이렇게 되면 정부에서도 천주교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탄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때문입니다ꡓ라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완고하고 고루한 유학사상에 젖은 위정자들이 그러한 말을 곧이 들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정에서는 유 아우구스띠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그 판결문은, ꡒ죄인 유항검은 사학에 미혹하여 이를 강습하고, 주문모를 신부로 받들며, 신주를 묻고 제사를 폐하는 등 그 죄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등과 함께 외국에 비밀히 상통하여 큰 배를 청하고 우리나라를 위협하려 하였으니, 이는 만 번 죽어도 부족한 대역부도의 죄이라, 이에 그 죄로써 결안한다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 대비의 주장대로 호남인들이 천주교를 신봉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하여 전주 감영으로 다시 보내져, 전주성 내에서 참수되고 능지처참을 당하도록 하였다.

      다른 교우들과 함께 아우구스띠노는 다시 전주로 내려 보내졌고, 감사는 판결문대로 법을 집행하게 되었다. 한때 아우구스띠노가 곤장을 맞고 일시적으로 성교의 신봉을 구태여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간 참회할 시간도 많았고, 판결문에서도 천주교인으로서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단정하였으며, 평소 그가 교회를 위하여 이룩한 공로나 열심한 신앙,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가 순교하기 전에 그에 대한 은총의 기도가 있었으니, 누구도 그의 순교를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띠노는 자신의 피로 죄를 씻는 은총을 얻고, 10월 24일 전주의 성 안에서 능지처참되어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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