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주(마르셀리노)

 

  「여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최창주 마르셀리노는 경기도 여주(驪州) 고을에 사는 양반으로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열성적으로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훗날 그의 자녀들 중에 딸 최소사(崔召史) 바라라는 부친의 교훈을 받아 열성적으로 교리를 지키다가 1840년(憲宗 5) 1월 4일(陰, 1839년 11월 30일)에 전라도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1791년(正祖 15) 신해 교난(辛亥敎難) 때 광주에서 체포된 마르셀리노는 일시적으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할 작정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다.


  1800년(正祖 24) 초에 이르러 다시 교우들이 체포된다는 소문이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위험을 피하여 도망하기를 권하자, 마르셀리노는 ꡒ안심하시오. 내가 체포되어 없다고 하여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ꡓ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다시 모친이 간절히 피하도록 말하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나 서울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길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그는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여주의 관아에서 보낸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관아로 압송되어 갔을 때 관장은 마르셀리노에게 ꡒ누구에게서 천주교를 배웠으며, 또 지금의 공범자들은 누구냐?ꡓ고 질문하며 바른대로 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ꡒ천주교에서는 아무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저는 누구의 이름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ꡓ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한 다음 옥에 가두게 하였다. 당시 그 옥에는 이미 체포된 그의 사위 원경도(元景道) 요한과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정종호(鄭宗浩), 그리고 임희영(任喜永) 등의 교우들이 갇혀 있었다.


  6개월 이상이나 갇히어 있으면서 마르셀리노는 동료 교우들과 함께 여러 차례의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심이 흔들리는 말은 조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0월 경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감사 앞에서 신문을 받게 되었는데, 감사는 우선 배교의 말 한마디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하여 주겠노라고 부드러운 말로 유혹하였다. 이때 마르셀리노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ꡒ모든 사람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천주를 알고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들은 그분을 배반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분을 위하여 죽는 것을 원하렵니다ꡓ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감사는 이 말을 듣자 자신의 의도가 모두 쓸데없음을 알아차리고는 형벌을 가하도록 한 다음, 그들의 결안(結案)에 서명을 시키고 나서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들은 모두 이 선고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들의 순교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꿋꿋하게 견디어 나가기로 권면하며 모든 본분을 실천하는데 보다 열성적이었다.


  그후 마르셀리노와 동료 교우들은 감사의 권한에서 벗어나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지방 관아로부터 수차례의 보고를 들은 금부의 관리들은 곧 결안을 확정하고, 여주의 지방민들에게 위협을 주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 모두를 고향으로 다시 이송하여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마르셀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고향 여주의 성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 때가 1801년 4월 25일(陰, 3월 13일)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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