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영

 

  임희영은 경기도 여주 지방의 점량리(占梁里)에 살고 있던 풍천(豊川) 임씨(任氏)라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형제들은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교리의 본분응ㄹ 지키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천주교라는 신앙을 믿는 일이 부친다는 핑계를 들어 외교인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다. 언제나 그는 ꡒ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과 귀, 그리고 어떠한 관능(官能)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ꡓ라는 말로 입교를 거부하였다. 그의 부친이 아무리 권고하고 나무래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임희영의 부친이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부친은 마지막으로 자식을 불러다 놓고, ꡒ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인이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여도 아무런 한이 없겠다ꡓ라 하면서 다시 한번 간절히 부탁하였다. 희영이 이 말에도 전혀 대답을 하지 않자 부친은 다시 ꡒ나는 내일쯤 죽게 될 것이다.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나에게도 할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네가 나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지금의 부탁을 들어서 상복도 입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아라. 만일 이를 어긴다면 죽어서도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ꡓ고 말하였다. 관례적인 제사를 금지시키고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행동하게 함으로써 자식의 입교를 유도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예법에서 보아 크게 윤리를 해치는 무서운 일이었다. 이틀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희영은 분명히 애통의 표시를 하고 상복을 입긴 하였지만, 관례적인 제사는 하나도 드리지 않았다. 이제 희영은 부친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어느 정도라도 그것을 실천하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모든 친척과 친지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불만과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1800년(正祖 24) 봄에 부친의 소상(小祥)이 돌아왔을 때, 희영은 이번에도 아무런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전부터 희영의 이러한 태도를 알고 있던 여주 목사(驪州牧使)는 또 다시 그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자, 곧 포졸들을 풀어서 그를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관아로 압송되어 온 희영을 보고 목사는 ꡒ나는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네가 돌아가신 부친의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 밖에 없겠다ꡓ라고 말하였지만, 희영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바로 부친의 뜻을 받들어 천주교의 교리를 행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희영은 이제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원경도(元景道) 요한 등이 갇혀 있던 옥으로 끌려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한편 이때 교우 두명이 희영의 집에서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조(趙) 제동과 그의 아들 조용삼 베드로였다. 이미 그들은 오래 전부터 희영의 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함께 교리를 행하던 터였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임희영은 다른 천주교인들처럼 한달에 두 번씩 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혹독한 형벌을 받는 중에도 그는 언제나 비명을 지르지 않고, 또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1800년 10월부터 그는 함께 있는 사람들과 감사 앞에 출두하여 또다른 형벌을 받게 되었다. 감사는 심한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는 그를 보고는 어이가 없어, ꡒ너는 천주교인도 아니니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제사를 드리겠다고만 약속하면 즉시 석방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한다면 너를 죽일 것이다ꡓ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이러한 감사의 유혹에도 희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감사의 신문이 있은 다음, 임희영과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은 그에게 ꡒ우리 천주를 숭배하지 않는 그대에게는 어떠한 형벌도 보람이 될 수가 없오. 굴복을 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ꡓ라고 말하였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ꡒ우리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시면서, 만일 네가 내 자식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 상복도 입지 말고 나를 위하여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셨오. 지금 내가 상복을 입고는 있으나 어떻게 나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오. 내가 죽는다고 하여도 부친의 마지막 유언까지 저버리면서 제사를 지낼 수는 없오ꡓ라고 하여 부친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을 나타냈다. 교우들은 그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는 그를 권고하여 교리를 가르치기에 힘썼다. 그들은 희영에게 그의 부친이 천주교인으로 죽으면서 하느님의 진실된 말을 좇아 제사를 그하도록 한 것임을 설명하고 나서, 부친과 같은 천주교인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효도의 길이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천국에서 다시 부친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됨을 이해시켜 주었다. 교우들의 이러한 말은 곧 희영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켜 그가 마음을 돌려 천주교의 교리를 진실로 이해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교우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임희영과 동료 교우들은 감사의 권한에서 벗어나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지방 관아로부터 수차례의 보고를 들은 금부의 관리들은 곧 결안을 확정하고, 여주의 지방민들에게 위협을 주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 모두를 고향으로 다시 이송하여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임희영은 동료들과 함께 고향 여주의 성 밖에서 참수 되어 순교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때는 1801년 4월 25일(陰, 3월 13일)이었다. 그의 나이와 교명은 기록상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다만 결안에서는 그가 천주교인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인륜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옥중생활에서 보아 그는 옥중의 교우들로부터 성세(聖洗)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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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영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임희영은 경기도 여주 지방의 점량리(占梁里)에 살고 있던 풍천(豊川) 임씨(任氏)라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형제들은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교리의 본분응ㄹ 지키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천주교라는 신앙을 믿는 일이 부친다는 핑계를 들어 외교인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다. 언제나 그는 ꡒ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과 귀, 그리고 어떠한 관능(官能)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ꡓ라는 말로 입교를 거부하였다. 그의 부친이 아무리 권고하고 나무래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임희영의 부친이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부친은 마지막으로 자식을 불러다 놓고, ꡒ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인이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여도 아무런 한이 없겠다ꡓ라 하면서 다시 한번 간절히 부탁하였다. 희영이 이 말에도 전혀 대답을 하지 않자 부친은 다시 ꡒ나는 내일쯤 죽게 될 것이다.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나에게도 할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네가 나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지금의 부탁을 들어서 상복도 입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아라. 만일 이를 어긴다면 죽어서도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ꡓ고 말하였다. 관례적인 제사를 금지시키고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행동하게 함으로써 자식의 입교를 유도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예법에서 보아 크게 윤리를 해치는 무서운 일이었다. 이틀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희영은 분명히 애통의 표시를 하고 상복을 입긴 하였지만, 관례적인 제사는 하나도 드리지 않았다. 이제 희영은 부친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어느 정도라도 그것을 실천하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모든 친척과 친지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불만과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1800년(正祖 24) 봄에 부친의 소상(小祥)이 돌아왔을 때, 희영은 이번에도 아무런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전부터 희영의 이러한 태도를 알고 있던 여주 목사(驪州牧使)는 또 다시 그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자, 곧 포졸들을 풀어서 그를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관아로 압송되어 온 희영을 보고 목사는 ꡒ나는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네가 돌아가신 부친의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 밖에 없겠다ꡓ라고 말하였지만, 희영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바로 부친의 뜻을 받들어 천주교의 교리를 행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희영은 이제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원경도(元景道) 요한 등이 갇혀 있던 옥으로 끌려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한편 이때 교우 두명이 희영의 집에서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조(趙) 제동과 그의 아들 조용삼 베드로였다. 이미 그들은 오래 전부터 희영의 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함께 교리를 행하던 터였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임희영은 다른 천주교인들처럼 한달에 두 번씩 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혹독한 형벌을 받는 중에도 그는 언제나 비명을 지르지 않고, 또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1800년 10월부터 그는 함께 있는 사람들과 감사 앞에 출두하여 또다른 형벌을 받게 되었다. 감사는 심한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는 그를 보고는 어이가 없어, ꡒ너는 천주교인도 아니니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제사를 드리겠다고만 약속하면 즉시 석방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한다면 너를 죽일 것이다ꡓ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이러한 감사의 유혹에도 희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감사의 신문이 있은 다음, 임희영과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은 그에게 ꡒ우리 천주를 숭배하지 않는 그대에게는 어떠한 형벌도 보람이 될 수가 없오. 굴복을 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ꡓ라고 말하였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ꡒ우리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시면서, 만일 네가 내 자식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 상복도 입지 말고 나를 위하여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셨오. 지금 내가 상복을 입고는 있으나 어떻게 나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오. 내가 죽는다고 하여도 부친의 마지막 유언까지 저버리면서 제사를 지낼 수는 없오ꡓ라고 하여 부친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을 나타냈다. 교우들은 그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는 그를 권고하여 교리를 가르치기에 힘썼다. 그들은 희영에게 그의 부친이 천주교인으로 죽으면서 하느님의 진실된 말을 좇아 제사를 그하도록 한 것임을 설명하고 나서, 부친과 같은 천주교인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효도의 길이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천국에서 다시 부친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됨을 이해시켜 주었다. 교우들의 이러한 말은 곧 희영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켜 그가 마음을 돌려 천주교의 교리를 진실로 이해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교우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임희영과 동료 교우들은 감사의 권한에서 벗어나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지방 관아로부터 수차례의 보고를 들은 금부의 관리들은 곧 결안을 확정하고, 여주의 지방민들에게 위협을 주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 모두를 고향으로 다시 이송하여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임희영은 동료들과 함께 고향 여주의 성 밖에서 참수 되어 순교함에 이르렀던 것이니, 때는 1801년 4월 25일(陰, 3월 13일)이었다. 그의 나이와 교명은 기록상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다만 결안에서는 그가 천주교인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인륜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옥중생활에서 보아 그는 옥중의 교우들로부터 성세(聖洗)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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