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첫째가는 계명과 둘째가는 계명-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할 때야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의 경우는 분명 그렇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가족을 사랑하느냐? 내가 얼마만큼 배우자를 사랑하느냐? 그것은 분명 실천으로 들어날 것입니다.
또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아까워하지 않고 봉헌을 할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교무금을 봉헌할 수 있는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것은 무척 아까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은 나눔과 봉헌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느 것이 첫째 계명이냐고…,이 학자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궁금한 것을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즉 성실한 마음과 착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세상에는 궁금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모르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나 어른을 만났을 때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게 됩니다. 많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지만 오늘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보다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유다교의 계명에는 613개가 있었습니다. 248개는 명령이고 365개는 금령입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어떤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유대 종교는 점진적으로 하나의 율법 체계를 발전시켜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 즉 “시나이 산에서의 모세의 율법”을 자기네가 받았다는 것을 큰 긍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들의 전체 삶을 규정해 놓은 법으로서 잘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어떻게 하면 그 수많은 규정을 일상생활 속에서 잘 준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늘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이 율법학자도 그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쾌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른이 된 남자 유다인이 매일 아침 외우던 중대한 기도의 시작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히브리 사람들의 심리학에서 지혜가 담긴 자리였습니다. 목숨을 다하고는 정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물리적인 모든 열정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내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느냐가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느냐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뒤집에서 생각해 보면 이웃 사랑의 척도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가 내가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하느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기쁨이 따라오고 기쁨이 열매 맺으면 평화는 당연히 열매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열매 맺으면 이웃 사랑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 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좋을 때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더 나아가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내가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로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율법학자는 이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둘째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친구들, 동료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안과 이방인 그리고 유다인, 세리와 죄인 그리고 생활이 문란한 여인과 의인이라고 보여 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친구, 적 모두가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개념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런 구별 없이, 종교, 지위, 남녀노소 등을 떠나 모든 이가 이웃이고, 우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필요한 경우 용서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율법 규정을 십계명으로 환원하셨고, 십계명은 다시 이렇게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결국 사랑의 이중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 나만 생각하는 말들. 배려하지 못하는 작은 행동들. 이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가족들을 어렵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웃에게는 체면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예의를 지키지만 가족 앞에서는 체면이나 예의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위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학자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었습니다. 그동안의 고민 속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예수님을 통해서 받게 된 것과도 같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시원 했을까요!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말이 옳다면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모습. 무조건 자기만 옳다고 하는 지금의 나의 모습을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율법학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또한 진리를 향해서 이렇게 목말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매달려보고, 고민해보고, 안되면 물어보고…,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율법학자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의식보다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른 율법학자들은 매일 야훼께 두 마리의 양을 희생으로 바치는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따랐고(예레미야7,21-23;호세아6,6) 예수님은 그의 결론에 칭찬을 하십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율법학자들의 동료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니 다른 사람은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향했으면 좋으련만…
이제 의심을 품었거나 호기심으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명쾌한 답을 들을 후 아무 말도 못하게 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질문, 부활에 대한 질문, 그리고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 이것에 대한 답을 들은 군중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신 율법교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숙제는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숙제는 내가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요?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물었다면 시원한 답을 얻으셨는지요.
2. 예수님께서는 슬기로운 율법학자에게 축복을 내리십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