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최후의 만찬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께서 떠나가실 것(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께서 아주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오실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특별한 신뢰입니다. 나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하기에 감당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끊임없는 세상의 적개심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년간 함께 했던 예수님. 자신들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걸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믿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당신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은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응답이며, 또한 마음의 걱정을 떨쳐 버리고 굳게 믿는 신뢰이며, 걱정을 극복하고 넘어서 내적 평화와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노력 외에 나머지 것은 모두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듯이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무조건적인 의탁과 변함없는 충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믿음에 대하여 이와 같이 호소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는 이유를 하나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이 있을 곳을 준비하려 하신다는 말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마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을 합당하게 준비시키셨고, 제자들은 합당하게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했으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늘나라에 불러올리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2코린 5,1). “집”이나 “거처”라는 개념은 인간의 깊은 욕구, 즉 확실한 안전과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장소, 급격한 변화에 대해 안정과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영원한 집, 또는 영원한 거처를 이해한다면 지상의 삶을 망명생활이나 순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갈 곳은 지금 이곳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있을 곳입니다. 그곳을 생각한다면 더 힘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산다 할지라도 언제나 내 마음은 하늘 고향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에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엄마 장에 갔다 올게”


“엄마 가지마. 무섭단 말야”


“엄마가 갔다 오다가 맛있는 것 사다줄게. 엄마 장에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


“알았어 엄마! 빨리 와야 돼!”


하지만 엄마가 좀 늦게 오면 아이는 불안해하고, 결국에는 울음을 터트립니다. 엄마가 늦게 오시는 이유를 모르고, 그저 아이 편에서만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의 일치된 공동체를 시사하십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셔야만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가리키시지만 그 전에 예수님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죽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천상세계에서 거처할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하늘에서의 자리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과 나의 함께 함은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런데 토마 사도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는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제자들의 길입니다. 이것이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길도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그 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지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때문에 길이십니다.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길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내가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기에 나는 그분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의 목적지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예수님의 사명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희생입니다. 어떤 세상적인 영광을 받으러 오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받아들이려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예를 들면 오천명을 먹이신 후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할 때 그들을 피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메시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셨기에 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모두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려고 하시는 그 여행(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예사로운 경우에서 말하는 여행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마 사도는 제자들 모두를 대표하여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로서는 예수님의 여행 목적지를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있냐고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서로 섬길 것을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할 것을 말씀하시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오늘 토마스 사도의 고백과 다를 바가 없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는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제자들의 길입니다. 이것이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길도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그 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라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 사도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려고 하시는 그 여행(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예사로운 경우에서 말하는 여행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제자들 모두를 대표하여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로서는 예수님의 여행 목적지를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있냐고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해 본다면 그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그 길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때문에 길이십니다.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길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내가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기에 나는 그분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의 목적지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시려고 당신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바치실 것입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나갈 때 일어나는 두려운 마음,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이런 저런 경우를 언제나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좀 믿어 달라고. 내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요, 그 답을 풀 수 있는 진리요, 평온함을 주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지 알아봅시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해 본다면 그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그 길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때문에 길이십니다.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길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내가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기에 나는 그분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의 목적지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시려고 당신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바치실 것입니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길로 표현하심으로써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하셨다. ➀ 예수님은 제자들의 처지와는 다르다. 제자들처럼 자신에게는 길이 필요치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길이 되셨다. ➁ 길과 목표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구원은 계시자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길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또한 길은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그리고 다시 성부께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삶의 여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➀ 허위나 거짓에 반대하면서 생각과 의도를 말하는 것. ➁ 거짓에 반대하면서 사실과 일치하여 표현되는 사고, 말, 가르침. ➂ 올바른 실천에 대한 가르침. ➃ 이성, 논리 또는 과학적 탐구의 규법을 따르는 선언이나 이론”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이 중의 어떤 것과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리는(히브리어: emet 에멧)에 대한 구약성서의 이해를 고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에멧(emet)의 신학적 의미는 하느님의 행동, 계시,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믿고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 즉 하느님의 말씀, 약속, 하느님의 충실함을 조건 없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존재는 하느님의 신뢰, 충실 그리고 진리에 의해 살 수 있는 것이며, 이로써 삶의 근본적인 항속성과 안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에 의지하며 신앙 안에서 진리를 행함으로써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진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확실한 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될 때만이 내가 자유로울 수 있으며,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 사고와 연관시켜 볼 때, 생명(영원한 생명)은 구원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계시가 제시하는 모든 것의 핵심 단어입니다. 인간생명의 필수조건은 음식, 의복, 주택 등입니다. 하지만 보다 충만한 인간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어떤 수준 내지는 문화적 가치들을 향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인간적 삶은 오직 하느님과의 통교를 통해서만 완전히 충족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신앙인이 하느님과의 통교가 없는 삶은, 즉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는 삶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예수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예수님의 진리를 실천하면서 얼마나 큰 영적 생명의 기쁨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제자들의 이해하지 못함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듣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모르는 말씀, 못 알아듣는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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