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말*
1815년 흉년이 들자 전지수라는 배교자는 교우들의 등을 쳐먹을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경상도 이마을 저마을을 다니며 교우들에게 구걸하였다. 교우들은 형편없는 처지에서도 그에게 많은 애긍을 주었으나 그는 이에 만족치 않고 포졸과 결탁하여 교우들을 밀고하여 그 오죽지 않은 교우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약탈질을 좋아하던 포졸들과 함께 그는 부활절에 침례바치던 교우들을 급습하였다.
*사료*
최 여옥 – 奉漢이라고도 한다. 프란치스꼬는 진강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부르는 이들도 많았는데 서석봉 안드레아와 최성열(性悅) 발바라의 사위였다. 홍주 다래골 태생으로서 어머니와 같이 입교한 후 세성산(歲城山)에 와서 살았다. 주(周)신부가 서울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성사를 받고 임종때에는 종부(終傅)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의 누이는 서울 정약종(丁若鐘) 아우구스띠노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최봉한 프란치스꼬는 시골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동정(童貞)으로 살 생각이었으나 사촌의 모범도 있고 다른 친척 몇몇이 권하기도 하여 마음을 고쳐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뒤로 그는 처음 계획을 끝까지 이행하지 못한 것을 가끔 후회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아내와 집안과의 아주 좋은 의(義)가 상하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포졸들에게 붙잡힐 때 그는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관헌이 문초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 씌우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고 꿋꿋하여 한시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대구로 옮겨져 연거푸 지독한 혹형을 당했기 때문에 여러번 까무러치기까지 하였으나 그의 열심과 용기는 끄덕도 없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일이 오기전에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장독(杖毒)으로 그랬는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때는 을해년(乙亥年-1815) 5월이요, 나이는 30을 갓 넘었었다.

*도움말*
1815년 흉년이 들자 전지수라는 배교자는 교우들의 등을 쳐먹을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경상도 이마을 저마을을 다니며 교우들에게 구걸하였다. 교우들은 형편없는 처지에서도 그에게 많은 애긍을 주었으나 그는 이에 만족치 않고 포졸과 결탁하여 교우들을 밀고하여 그 오죽지 않은 교우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약탈질을 좋아하던 포졸들과 함께 그는 부활절에 침례바치던 교우들을 급습하였다.
*사료*
최 여옥 – 奉漢이라고도 한다. 프란치스꼬는 진강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부르는 이들도 많았는데 서석봉 안드레아와 최성열(性悅) 발바라의 사위였다. 홍주 다래골 태생으로서 어머니와 같이 입교한 후 세성산(歲城山)에 와서 살았다. 주(周)신부가 서울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성사를 받고 임종때에는 종부(終傅)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의 누이는 서울 정약종(丁若鐘) 아우구스띠노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최봉한 프란치스꼬는 시골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동정(童貞)으로 살 생각이었으나 사촌의 모범도 있고 다른 친척 몇몇이 권하기도 하여 마음을 고쳐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뒤로 그는 처음 계획을 끝까지 이행하지 못한 것을 가끔 후회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아내와 집안과의 아주 좋은 의(義)가 상하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포졸들에게 붙잡힐 때 그는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관헌이 문초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 씌우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고 꿋꿋하여 한시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대구로 옮겨져 연거푸 지독한 혹형을 당했기 때문에 여러번 까무러치기까지 하였으나 그의 열심과 용기는 끄덕도 없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일이 오기전에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장독(杖毒)으로 그랬는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때는 을해년(乙亥年-1815) 5월이요, 나이는 30을 갓 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