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1.말씀읽기:루카10,25-37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아시지만 따뜻한 미소로 그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옳게 대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옳게 사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옳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하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물음은 신자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물음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물었던 물음이었고, 율법학자들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했던 물음이었습니다. “랍비,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는 다가올 세상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의 질문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자로 예수님을 재보기 위한 질문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는 율법서에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613가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자세가 아니라 외적인 행위였습니다.




나도 매 순간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정성스럽게 답을 해 줘도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답만을 들으려고 하는 나는 질문할 자세가 안 됐고, 들을 자세가 안 된 사람입니다. 나는…,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고 있는 율법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이제 그 율법학자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답을 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율법학자 하나가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그르쳐 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장엄하게 고백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계명(신명기6,5)을 상기하였으며,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주저함 없이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또한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완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그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행동이 옳다면 칭찬을 해주고, 그를 본받으려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너무도 교만합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하고 기도했던 교만한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율법학자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은 것은 책망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이 율법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율법교사는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에 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레위19,34). 유대교에서 이방인에 대한 이 사랑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이스라엘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할례를 포함하여 율법을 준수하는 완전한 개종자들에게 한정되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대파의 사람들도 이 사랑의 계명의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이란 다른 사람의 궁핍을 해소시켜 주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이 사랑의 실천에는 종족, 인종, 국가, 사회계급의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 특히 가난과 곤경에 처한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입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이지만 유다인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은 강도들의 습격이 빈번했습니다. 그는 그냥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종교도 모르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르고. 좌우지간 이 사람은 반쯤 죽었습니다.


 내려갔다는 표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예루살렘은 800미터 높이에 있고  예리코는 해발 150미터의 땅이니 내려간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왜 이 사제가 이 곳을 지나갔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성전 봉사의 기간을 마치고, 사제의 동네인 예리코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제라는 직책으로 보아 이 불쌍한 부상자에게 당연히 동정을 가지고 돌보아 주어야 할 터인데 그는 냉담하게 못 본 체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사제와 함께 신명기에 있는 “너희는 동족의 나귀나 소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모른체해도 안된다. 반드시 동족을 도와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한다”(신명22,4)고 한 가르침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나쳐 버립니다.




아마 이들은 이 사람이 반쯤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 시체를 만지지 않았습니다(레위21,1). 아니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강도들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단지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일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들을 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데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었지만 그래서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했지만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지나쳤을 것입니다.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혹시 내가 연루되면 어쩌지. 나도 저렇게 당할지 몰라. 난 바쁘니까.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신앙이랑 삶이랑 참 별개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예 상종하지도 않았고 서로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를 가엾게 여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합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놔두고 지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그를 돌봐 줍니다. 신앙인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를 데리고 병원까지 달려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순교자의 밤 행사가 있던 날입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전례담당자가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연습을 했던 담당자가 오지 않으니 신부님도 당황했고, 다른 사람들도 당황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여 순교자의 밤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순교자의 밤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 그날 전례 담당자가 살며시 들어와서 성호경을 긋고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신부님께 그날 전례담당자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성당에 오는데 앞에 어떤 할머니가 길가에 쓰러져 계시더라구요. 뺑소니를 당한 것 같았습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빼앗기면 안 되는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분과 함께 하길 바라실 꺼야! 아냐! 이 사람이 나를 가해자로 지목하면 어떻게 하지? 도와주려고 했다가 오히려 피해를 당할 텐데……, 아냐!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그렇게 그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가족들에게 알리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도 다들 전례에 참가하느라 전화를 꺼 놔서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


신부님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 앞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서 계시는군요.”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는 강도 맞은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치료하여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두들겨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상태입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유다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았지만 초주검이 된 유다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입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액수로는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닙니다. 기원전 140년경 이탈리아에서의 하루 숙박료는 1과 3분의 1데나리온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진 사람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데에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조금만 내어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이웃 사랑을 위한 마음이 있습니까?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이제 율법학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세 사람 중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고. 이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나에게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그와 나와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적이나 종교, 당파, 직업, 지위 등이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동정을 호소할 때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답을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너무 옹졸합니다. 유다인들은 그냥 지나갔지만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멋진 일을 했기에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을 실행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는 다른 사람들의 곤궁에 마음을 여는 자세를 지니는 것입니다. 나는 기꺼이 동정을 느껴야만 합니다. 평범한 성경적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비참함을 “몸 속 깊이” 느껴야만 합니다. 비참한 모습을 보고 “안됐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얼굴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나에게 자비를 청하는 이들을 애써 외면하고 돌아선 나였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자비를 청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때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외면했던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봅시다.




2. 다른 이의 옳은 행동을 칭찬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요?



218.150.125.66 로사리아: 외적인 형식보다 마음이 담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길 빌어봅니다 [10/07-20:41]
218.150.125.66 황요아킴: 나에게잘해준이웃 [10/07-20:44]
211.224.232.218 ^&^: 엄청 뜨끔! 율법학자의 그 모습이 제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내옆에 있는데 내가 눈을 돌리지 않고 일면만을 보고서 외면하진 않았는지~~ 더 멀리, 더 깊이 바라보는 내가되어 나역시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거듭나길 기도해 봅니다. [10/07-20:45]
218.150.125.66 d: 성당에미사드리러올때시간이없다고 힘겹게걸어오는자매님들을 가끔씩 모른채하고올때가 생각나네요 진정한이웃의내모습이부끄럽습니다 [10/07-20:47]

218.150.125.66 ㅂㅂㄴㄷㅌ: 저는 영생을 바라면서도 내 주위의 이웃에게 저의 모든것을 걸고 도와주
질 않았었읍니다. 뜨끔하군요.저는 율법을 가르친다 하고 주위를 도운다
해놓고서는 도와주질 않는 율법학자처럼 같은 친구 같은 학교 같은 종교
에 다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사람도
다른사람을 도와줄 날이 오도록 기도해야 겠습니다. [10/07-20:50]
218.150.125.66 ^^: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아는 것보다는 실천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생각만하지 말고 실천하는 제가 되어야겠습니다.. [10/07-20:50]
218.150.125.66 황요아킴: 네가힘틀때도아준형재님을찾아보아야겠습니다 [10/07-20:51]
218.150.125.66 일 몰: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10/07-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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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의 이웃입니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1.말씀읽기:루카10,25-37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아시지만 따뜻한 미소로 그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옳게 대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옳게 사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옳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하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물음은 신자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물음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물었던 물음이었고, 율법학자들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했던 물음이었습니다. “랍비,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는 다가올 세상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의 질문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자로 예수님을 재보기 위한 질문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는 율법서에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613가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자세가 아니라 외적인 행위였습니다.


    나도 매 순간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정성스럽게 답을 해 줘도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답만을 들으려고 하는 나는 질문할 자세가 안 됐고, 들을 자세가 안 된 사람입니다. 나는…,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고 있는 율법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이제 그 율법학자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답을 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율법학자 하나가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그르쳐 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장엄하게 고백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계명(신명기6,5)을 상기하였으며,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주저함 없이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또한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완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그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행동이 옳다면 칭찬을 해주고, 그를 본받으려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너무도 교만합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하고 기도했던 교만한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율법학자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은 것은 책망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이 율법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율법교사는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에 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레위19,34). 유대교에서 이방인에 대한 이 사랑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이스라엘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할례를 포함하여 율법을 준수하는 완전한 개종자들에게 한정되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대파의 사람들도 이 사랑의 계명의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이란 다른 사람의 궁핍을 해소시켜 주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이 사랑의 실천에는 종족, 인종, 국가, 사회계급의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 특히 가난과 곤경에 처한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입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이지만 유다인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은 강도들의 습격이 빈번했습니다. 그는 그냥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종교도 모르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르고. 좌우지간 이 사람은 반쯤 죽었습니다.

     내려갔다는 표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예루살렘은 800미터 높이에 있고  예리코는 해발 150미터의 땅이니 내려간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왜 이 사제가 이 곳을 지나갔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성전 봉사의 기간을 마치고, 사제의 동네인 예리코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제라는 직책으로 보아 이 불쌍한 부상자에게 당연히 동정을 가지고 돌보아 주어야 할 터인데 그는 냉담하게 못 본 체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사제와 함께 신명기에 있는 “너희는 동족의 나귀나 소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모른체해도 안된다. 반드시 동족을 도와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한다”(신명22,4)고 한 가르침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나쳐 버립니다.


    아마 이들은 이 사람이 반쯤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 시체를 만지지 않았습니다(레위21,1). 아니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강도들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단지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일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들을 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데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었지만 그래서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했지만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지나쳤을 것입니다.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혹시 내가 연루되면 어쩌지. 나도 저렇게 당할지 몰라. 난 바쁘니까.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신앙이랑 삶이랑 참 별개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예 상종하지도 않았고 서로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를 가엾게 여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합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놔두고 지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그를 돌봐 줍니다. 신앙인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를 데리고 병원까지 달려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순교자의 밤 행사가 있던 날입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전례담당자가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연습을 했던 담당자가 오지 않으니 신부님도 당황했고, 다른 사람들도 당황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여 순교자의 밤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순교자의 밤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 그날 전례 담당자가 살며시 들어와서 성호경을 긋고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신부님께 그날 전례담당자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성당에 오는데 앞에 어떤 할머니가 길가에 쓰러져 계시더라구요. 뺑소니를 당한 것 같았습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빼앗기면 안 되는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분과 함께 하길 바라실 꺼야! 아냐! 이 사람이 나를 가해자로 지목하면 어떻게 하지? 도와주려고 했다가 오히려 피해를 당할 텐데……, 아냐!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그렇게 그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가족들에게 알리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도 다들 전례에 참가하느라 전화를 꺼 놔서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

    신부님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 앞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서 계시는군요.”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는 강도 맞은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치료하여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두들겨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상태입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유다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았지만 초주검이 된 유다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입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액수로는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닙니다. 기원전 140년경 이탈리아에서의 하루 숙박료는 1과 3분의 1데나리온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진 사람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데에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조금만 내어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이웃 사랑을 위한 마음이 있습니까?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이제 율법학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세 사람 중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고. 이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나에게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그와 나와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적이나 종교, 당파, 직업, 지위 등이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동정을 호소할 때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답을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너무 옹졸합니다. 유다인들은 그냥 지나갔지만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멋진 일을 했기에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을 실행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는 다른 사람들의 곤궁에 마음을 여는 자세를 지니는 것입니다. 나는 기꺼이 동정을 느껴야만 합니다. 평범한 성경적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비참함을 “몸 속 깊이” 느껴야만 합니다. 비참한 모습을 보고 “안됐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얼굴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나에게 자비를 청하는 이들을 애써 외면하고 돌아선 나였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자비를 청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때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외면했던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봅시다.


    2. 다른 이의 옳은 행동을 칭찬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요?

    218.150.125.66 로사리아: 외적인 형식보다 마음이 담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길 빌어봅니다 [10/07-20:41]
    218.150.125.66 황요아킴: 나에게잘해준이웃 [10/07-20:44]
    211.224.232.218 ^&^: 엄청 뜨끔! 율법학자의 그 모습이 제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내옆에 있는데 내가 눈을 돌리지 않고 일면만을 보고서 외면하진 않았는지~~ 더 멀리, 더 깊이 바라보는 내가되어 나역시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거듭나길 기도해 봅니다. [10/07-20:45]
    218.150.125.66 d: 성당에미사드리러올때시간이없다고 힘겹게걸어오는자매님들을 가끔씩 모른채하고올때가 생각나네요 진정한이웃의내모습이부끄럽습니다 [10/07-20:47]

    218.150.125.66 ㅂㅂㄴㄷㅌ: 저는 영생을 바라면서도 내 주위의 이웃에게 저의 모든것을 걸고 도와주
    질 않았었읍니다. 뜨끔하군요.저는 율법을 가르친다 하고 주위를 도운다
    해놓고서는 도와주질 않는 율법학자처럼 같은 친구 같은 학교 같은 종교
    에 다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사람도
    다른사람을 도와줄 날이 오도록 기도해야 겠습니다. [10/07-20:50]
    218.150.125.66 ^^: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아는 것보다는 실천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생각만하지 말고 실천하는 제가 되어야겠습니다.. [10/07-20:50]
    218.150.125.66 황요아킴: 네가힘틀때도아준형재님을찾아보아야겠습니다 [10/07-20:51]
    218.150.125.66 일 몰: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10/07-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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