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교회-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

 



  2-5.  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




  동방(비잔틴)교회에서 100여년 이상 지속된 성화상 파괴 논쟁은 제국 안에서 교회 박해, 폭력 사태, 정치적 혼란, 사회 소요를 야기시켰다.


  성화상 파괴란 어원적 의미로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된 외적 표현이었고 당시의 주요 쟁점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례에 관한 문제였다.


  성화상 파괴 논쟁은 십게명의 제1게명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출애 20,4: 레위 26,1: 신명 4,16-19) 즉 하느님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불가시(不可視)한 신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해 어떠한 형태의 모상(模相)도 만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이 가시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이 금령은 더이상 구약시대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5세기에 이르러 성화상은 특히 동로마제국의 동방교회에서 많이 등장하여 신심의 대상이 되었고, 6-7세기에는 성화상에 대한 입맞춤, 무릎 끊음, 분향, 엎드럼 따위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에 발생 동기는 지상, 연옥, 천국에 있는 교회 구성원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통공(聖人通攻)의 교리에 근거하였다.  이 교리에 의하면 지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전구(轉求) 즉 중재(仲裁)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신자들의 성화상이 인간사를 좌우하고 질병에 대한 효과있는 구제약이며 영적 및 세속적 축복을 내리고 하느님 은총의 유력한 통로하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그들 사이에 널러 펴져 있던 전설이나 기적들을 쉽게 믿고 공경한 것이 성화상 신심을 더 부추겼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는 견해도 강하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주장하고 그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人性)을  부정한  단성론자(單性論者)들은 성호상 공경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외에 비잔틴교회 안에서 성화상 공경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심 행위가 오히려 우상 숭배에 딸어지지 않을까 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육화(肉化)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만이 표현됨으로써 성화상 공경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이단인 네스토리우스 사상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을 방해하는 논증에 대해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의 신비를 담은 기록, 문맹자들을 위한 교리서’일 뿐만 아니라 성화(聖化)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하느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을 정리, 구분하였는데 이는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흠숭(欽崇)’,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은 ‘공경(恭敬)’이었다. 




  또한 성화상 공경의 대상은 성화상 자체가 아니라 성화상이 표현하는 주제를 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에서는 성화상 문제가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성화상 파괴운동으로 발전하여 동방교회를 격심한 대립 세력으로 양분하였고 교회 박해, 폭력 사태, 정치적  사회혼란을 야기하였다.  레오3세 황제로부터 성화상 공경 반대조처에 동의를 얻어 소아시아이 주교들은 각자의 교구 성당에서 성화상을 제거하고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였다.




  콘스탄티누스5세 때에 이르러 성화상 파괴 운동은 극에 달하였는데 황제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참석한 338명의 주교들의 만장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금지하였고,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던 교회 지도자들, 특히 수도자들을 처형하였다.  따라서 성화성 파괴 운동은 반수도회 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786년 이레네의 섭정으로 성화상 신심을 다시 회복시켰고 787년에는 제2차 니체아공의화를 개최하여 성화상의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한 754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미카엘3세 때인 848년에 콘스탄타노플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100여년 이상 동로마제국과 비잔틴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성화상 논쟁은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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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교회-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5.  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


      동방(비잔틴)교회에서 100여년 이상 지속된 성화상 파괴 논쟁은 제국 안에서 교회 박해, 폭력 사태, 정치적 혼란, 사회 소요를 야기시켰다.

      성화상 파괴란 어원적 의미로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된 외적 표현이었고 당시의 주요 쟁점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례에 관한 문제였다.

      성화상 파괴 논쟁은 십게명의 제1게명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출애 20,4: 레위 26,1: 신명 4,16-19) 즉 하느님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불가시(不可視)한 신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해 어떠한 형태의 모상(模相)도 만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이 가시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이 금령은 더이상 구약시대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5세기에 이르러 성화상은 특히 동로마제국의 동방교회에서 많이 등장하여 신심의 대상이 되었고, 6-7세기에는 성화상에 대한 입맞춤, 무릎 끊음, 분향, 엎드럼 따위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에 발생 동기는 지상, 연옥, 천국에 있는 교회 구성원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통공(聖人通攻)의 교리에 근거하였다.  이 교리에 의하면 지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전구(轉求) 즉 중재(仲裁)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신자들의 성화상이 인간사를 좌우하고 질병에 대한 효과있는 구제약이며 영적 및 세속적 축복을 내리고 하느님 은총의 유력한 통로하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그들 사이에 널러 펴져 있던 전설이나 기적들을 쉽게 믿고 공경한 것이 성화상 신심을 더 부추겼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는 견해도 강하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주장하고 그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人性)을  부정한  단성론자(單性論者)들은 성호상 공경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외에 비잔틴교회 안에서 성화상 공경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심 행위가 오히려 우상 숭배에 딸어지지 않을까 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육화(肉化)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만이 표현됨으로써 성화상 공경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이단인 네스토리우스 사상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을 방해하는 논증에 대해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의 신비를 담은 기록, 문맹자들을 위한 교리서’일 뿐만 아니라 성화(聖化)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하느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을 정리, 구분하였는데 이는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흠숭(欽崇)’,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은 ‘공경(恭敬)’이었다. 


      또한 성화상 공경의 대상은 성화상 자체가 아니라 성화상이 표현하는 주제를 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에서는 성화상 문제가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성화상 파괴운동으로 발전하여 동방교회를 격심한 대립 세력으로 양분하였고 교회 박해, 폭력 사태, 정치적  사회혼란을 야기하였다.  레오3세 황제로부터 성화상 공경 반대조처에 동의를 얻어 소아시아이 주교들은 각자의 교구 성당에서 성화상을 제거하고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였다.


      콘스탄티누스5세 때에 이르러 성화상 파괴 운동은 극에 달하였는데 황제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참석한 338명의 주교들의 만장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금지하였고,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던 교회 지도자들, 특히 수도자들을 처형하였다.  따라서 성화성 파괴 운동은 반수도회 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786년 이레네의 섭정으로 성화상 신심을 다시 회복시켰고 787년에는 제2차 니체아공의화를 개최하여 성화상의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한 754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미카엘3세 때인 848년에 콘스탄타노플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100여년 이상 동로마제국과 비잔틴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성화상 논쟁은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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