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3.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6세기의 이른바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의 쇄신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개입과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교회 밖에서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은 루터 자신의 개인적 성격, 사상과 더불어 중세 말기의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신학 역시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즉 신학이나 교리가 성서 구절의 인용이나 학문적인 견해를 나열하는 단순한 자식 전달이었을 뿐,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그 방법을 일깨워주는 지혜를 주지 못했음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신앙문제는 모호하게 만든 오컴의 유명론(唯名論)과 영혼이 직접 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신비신학의 창시자로 지적되는 에크하르트, 인간의 절대 가치를 주장한 반그리스도교적인 인문주의 들이 또한 종교개혁의 정신적 원인이 되었다.  물론 당시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 또한 배제할 수는 없겠다.




  마지막으로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의 횃불이 일어났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개혁과 쇄신의 소리는 훨씬 이전부터 교회 내부에서 항상 있어 왔었다.  그러나 교회의 단합된 모습은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적 상황이 많이 변한 상태였다.




  그리고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계시한 95개 조항은 다만 학술상의 논쟁문이었고 공공연한 선전문(宣傳文)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문은 대학의 혹판격으로 논쟁의 정보와 학술적 행사가 게시되는 장소 역할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제시한 원인은, 당시 도미니꼬회의 수사 신부인 텟셀의 대사(大赦)에 대한 설교 때문이었다.  교황 레오10세의 베드로대성당 신축기금 모금을 위해 공포된 대사(大赦)에 관한 칙령(당시 교회뿐만 아니라 교량같은 공공건물과 관련하여 대사를 반포함으로 오랜 관습으로 이어왔다)이 발단이 되기는 하였지만 텟셀의 웅변적인 기금 모집 설교는 대중의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교회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1519년 3월 3일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로마 교회의 권위와 교황 성하의 권위에 간섭하거나 혹은 음모로써 암암리에 해하려 원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 앞에 맹세합니다”라고 하였고, 또한 이틀 후에 보낸 편지에서도 “로마 교황으로부터 이역(離逆)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루터가 교회에 대해 의식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불행한 과오이기는 하지만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 루터에 대한 관대한 태도가 이루어졌다면 그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여하간 인류 역사상 대사건인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일어났고 그 여파는 종교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방면에 걸쳐 큰 층격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건으로 그리스도 교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되고 유럽 사회는 대변혁을 가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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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6세기의 이른바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의 쇄신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개입과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교회 밖에서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은 루터 자신의 개인적 성격, 사상과 더불어 중세 말기의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신학 역시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즉 신학이나 교리가 성서 구절의 인용이나 학문적인 견해를 나열하는 단순한 자식 전달이었을 뿐,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그 방법을 일깨워주는 지혜를 주지 못했음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신앙문제는 모호하게 만든 오컴의 유명론(唯名論)과 영혼이 직접 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신비신학의 창시자로 지적되는 에크하르트, 인간의 절대 가치를 주장한 반그리스도교적인 인문주의 들이 또한 종교개혁의 정신적 원인이 되었다.  물론 당시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 또한 배제할 수는 없겠다.


      마지막으로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의 횃불이 일어났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개혁과 쇄신의 소리는 훨씬 이전부터 교회 내부에서 항상 있어 왔었다.  그러나 교회의 단합된 모습은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적 상황이 많이 변한 상태였다.


      그리고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계시한 95개 조항은 다만 학술상의 논쟁문이었고 공공연한 선전문(宣傳文)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문은 대학의 혹판격으로 논쟁의 정보와 학술적 행사가 게시되는 장소 역할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제시한 원인은, 당시 도미니꼬회의 수사 신부인 텟셀의 대사(大赦)에 대한 설교 때문이었다.  교황 레오10세의 베드로대성당 신축기금 모금을 위해 공포된 대사(大赦)에 관한 칙령(당시 교회뿐만 아니라 교량같은 공공건물과 관련하여 대사를 반포함으로 오랜 관습으로 이어왔다)이 발단이 되기는 하였지만 텟셀의 웅변적인 기금 모집 설교는 대중의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교회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1519년 3월 3일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로마 교회의 권위와 교황 성하의 권위에 간섭하거나 혹은 음모로써 암암리에 해하려 원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 앞에 맹세합니다”라고 하였고, 또한 이틀 후에 보낸 편지에서도 “로마 교황으로부터 이역(離逆)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루터가 교회에 대해 의식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불행한 과오이기는 하지만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 루터에 대한 관대한 태도가 이루어졌다면 그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여하간 인류 역사상 대사건인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일어났고 그 여파는 종교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방면에 걸쳐 큰 층격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건으로 그리스도 교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되고 유럽 사회는 대변혁을 가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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