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세계선교의 시대
고대에서의 지중해는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여러 민족들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결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창시 이후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사이의 통로는 폐쇄되어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종교’가 되었으며, 게다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유럽’에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십자군 원정은 실패하였으며 동방교회와의 재일치도 끝났고(1204년) 더구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터어키의 점령(1453년)은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판도를 더욱 축소시켰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서구교회가 빈곤해지고 축소되어가는 과정에 만난 최후의 타격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이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계탐험에 나서면서 교회는 ‘세계선교’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인도와 통상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이슬람제국 때문에 율로를 통한 무역이 불가능하여 동양 항로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은 동인도 해안과 아프라카, 브라질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1542년에는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고, 1557년에는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극동무역가 선교의 중시지로 삼았다.
한편 스페인은 중남미의 프에르토니코, 쿠바, 파나마,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를 정복하여 식민지를 삼았다.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의 건설은 유럽인들이 동양과 직접 통상하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종교적 문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고 선교사들의 생계 유지와 신변 안전을 보장할 의무를 요구하는 대신에 교회 감독권과 주교 임명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선교 후원제도는 교회의 의도와는 달리 선교보다는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주는 동기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정복자들의 식민지 정책과 강제적 개종정책은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착취자와 압제자의 종료로 보이게 하였고 선교사를 식민정책의 협조자로 생각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로 교회의 선교는 강력한 식민지 정책이 확립되고 토착종교가 저항하지 않는 중남미 지역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고대 문명국가인 인도, 중국, 일본에서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또한 선교방법에 있어서도 선교의 중심세력이던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의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식민지의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원주민에게 유럽의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주입시키고자한 반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토착민들과 의식주를 함께 하였다. 또한 그들은 원주민들이 신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우선 그들의 언어로 교회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 간의 충돌로 예수회의 순응주의적 선교방법을 금지하는 유럽주의의 근시안적인 태도는 결국 인도와 중국에서의 선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인도와 중국의 문화에 대해 교회가 취한 태도와 선교방법이 초래한 결과는 오늘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3-6. 세계선교의 시대
고대에서의 지중해는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여러 민족들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결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창시 이후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사이의 통로는 폐쇄되어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종교’가 되었으며, 게다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유럽’에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십자군 원정은 실패하였으며 동방교회와의 재일치도 끝났고(1204년) 더구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터어키의 점령(1453년)은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판도를 더욱 축소시켰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서구교회가 빈곤해지고 축소되어가는 과정에 만난 최후의 타격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이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계탐험에 나서면서 교회는 ‘세계선교’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인도와 통상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이슬람제국 때문에 율로를 통한 무역이 불가능하여 동양 항로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은 동인도 해안과 아프라카, 브라질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1542년에는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고, 1557년에는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극동무역가 선교의 중시지로 삼았다.
한편 스페인은 중남미의 프에르토니코, 쿠바, 파나마,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를 정복하여 식민지를 삼았다.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의 건설은 유럽인들이 동양과 직접 통상하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종교적 문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고 선교사들의 생계 유지와 신변 안전을 보장할 의무를 요구하는 대신에 교회 감독권과 주교 임명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선교 후원제도는 교회의 의도와는 달리 선교보다는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주는 동기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정복자들의 식민지 정책과 강제적 개종정책은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착취자와 압제자의 종료로 보이게 하였고 선교사를 식민정책의 협조자로 생각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로 교회의 선교는 강력한 식민지 정책이 확립되고 토착종교가 저항하지 않는 중남미 지역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고대 문명국가인 인도, 중국, 일본에서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또한 선교방법에 있어서도 선교의 중심세력이던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의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식민지의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원주민에게 유럽의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주입시키고자한 반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토착민들과 의식주를 함께 하였다. 또한 그들은 원주민들이 신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우선 그들의 언어로 교회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 간의 충돌로 예수회의 순응주의적 선교방법을 금지하는 유럽주의의 근시안적인 태도는 결국 인도와 중국에서의 선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인도와 중국의 문화에 대해 교회가 취한 태도와 선교방법이 초래한 결과는 오늘에까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