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 그리스도교 사상

 

2. 그리스도교 사상


2.1. 유명론


14세기부터 유럽 중부 지역과 영국에서는 신학의  쇠퇴기에 들어섰다. 중세 후기의 신학자들은 토론의 기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기법은 대부분 순전히 외면적 문제에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 후기의 신학은 실재적이 될 수 없는, 즉 교회생활을 외면한 단조롭고 표면적인 장황한 말마디로 격화된 스콜라 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참된 신학이 교회생활 특히 그의 성사적 생활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라면 이 시대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었다.


중세 말기의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는 유명론을 내놓은 영국인 William of Occam(Ockham:1285-1347)이었다. Thomas Aquinas(1225-1274)사상의 구방법(via antiqua)은 희미한 옛 모습일일 뿐, 여기에 유명론의 신방법이 대치되었다. 그런데 오캄의 신학체계는 근본적으로 비가톨릭적이었다. 토마스와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반대하여 자연계와 초자연계, 인간이성과 신의 계시 사이의 조화를 거부하였다.


루터는 그의 스승인 유명론자 Gabriel Biel(1420-1495)을 통해서 오캄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을 오캄의 제자로 간주하였다.


오캄은 토마스가 주장하는 類比에 의한 신과 자연과의 내적 연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자연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을 거부하였다. 인간은 오직 신이 자신을 계시할 때에만 신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오캄의 인간이성과 자연에 대한 懷疑主義는 계시에 대한 굳은 신뢰와 대응하였다. 오로지 계시된 성서만이 신앙의 원천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聖書唯一(sola scriptura)의 사상은 이런 견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울러 오캄은 인간의 이성을 무력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오직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인식케 하고 인간의 구원을 이룩해 준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루터의 신앙유일(sola fides)의 원칙이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캄은 인간의 본능 자체는 無能하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신의 은총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후에 이러한 은총유일(sola gratia)의 교의를 끌어들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따라서 가톨릭 입장에서 볼 때 루터의 이단은 오캄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세 가지의 유일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있다.




2.2.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


인문주의는 14세기에 이태리에서 발단하여 15-16세기에 유럽 지역에 번진 지성적 운동이다. 인문주의이란 명칭은 이 운동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의 高揚에 관심을 두는 데에서 나왔으며 또 이는 다른 인문주의 운동들과 구별하기 위해 르네쌍스 인문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운동은 고대 희랍과 로마 문학에 대한 태도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국가주의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태리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들의 조상인 로마인들의 고대 문화의 재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울러 이들은 객관적, 스콜라적, 체계적 사상을 경시하고 주관주의, 개인주의와 인간 각자의 경험을 치중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과학적 방법, 즉 역사적 철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법은 원천에  비판적 탐구 및 복귀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북부 및 서부 유럽의 인문주의는 그 개인주의적 성격에 종교적 의미를 적용하여 각 인간은 ‘성령의 궁전’으로 존중하였고 고대 원문, 원서로의 복귀에 있어서 고전적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적 원천, 즉 신약성서 – 특히 희랍어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를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란 용어가 나왔다. 한편 루터가 성서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을 사도시대로의 복귀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는 종교개혁과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이기보는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한 遠因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들은 내적 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개혁을 주장하였지만, 혁명적인 인물들이 아니었으며, 후에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단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톨릭시즘을 떠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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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2. 그리스도교 사상

    2.1. 유명론

    14세기부터 유럽 중부 지역과 영국에서는 신학의  쇠퇴기에 들어섰다. 중세 후기의 신학자들은 토론의 기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기법은 대부분 순전히 외면적 문제에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 후기의 신학은 실재적이 될 수 없는, 즉 교회생활을 외면한 단조롭고 표면적인 장황한 말마디로 격화된 스콜라 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참된 신학이 교회생활 특히 그의 성사적 생활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라면 이 시대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었다.

    중세 말기의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는 유명론을 내놓은 영국인 William of Occam(Ockham:1285-1347)이었다. Thomas Aquinas(1225-1274)사상의 구방법(via antiqua)은 희미한 옛 모습일일 뿐, 여기에 유명론의 신방법이 대치되었다. 그런데 오캄의 신학체계는 근본적으로 비가톨릭적이었다. 토마스와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반대하여 자연계와 초자연계, 인간이성과 신의 계시 사이의 조화를 거부하였다.

    루터는 그의 스승인 유명론자 Gabriel Biel(1420-1495)을 통해서 오캄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을 오캄의 제자로 간주하였다.

    오캄은 토마스가 주장하는 類比에 의한 신과 자연과의 내적 연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자연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을 거부하였다. 인간은 오직 신이 자신을 계시할 때에만 신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오캄의 인간이성과 자연에 대한 懷疑主義는 계시에 대한 굳은 신뢰와 대응하였다. 오로지 계시된 성서만이 신앙의 원천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聖書唯一(sola scriptura)의 사상은 이런 견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울러 오캄은 인간의 이성을 무력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오직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인식케 하고 인간의 구원을 이룩해 준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루터의 신앙유일(sola fides)의 원칙이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캄은 인간의 본능 자체는 無能하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신의 은총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후에 이러한 은총유일(sola gratia)의 교의를 끌어들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따라서 가톨릭 입장에서 볼 때 루터의 이단은 오캄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세 가지의 유일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있다.


    2.2.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

    인문주의는 14세기에 이태리에서 발단하여 15-16세기에 유럽 지역에 번진 지성적 운동이다. 인문주의이란 명칭은 이 운동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의 高揚에 관심을 두는 데에서 나왔으며 또 이는 다른 인문주의 운동들과 구별하기 위해 르네쌍스 인문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운동은 고대 희랍과 로마 문학에 대한 태도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국가주의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태리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들의 조상인 로마인들의 고대 문화의 재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울러 이들은 객관적, 스콜라적, 체계적 사상을 경시하고 주관주의, 개인주의와 인간 각자의 경험을 치중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과학적 방법, 즉 역사적 철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법은 원천에  비판적 탐구 및 복귀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북부 및 서부 유럽의 인문주의는 그 개인주의적 성격에 종교적 의미를 적용하여 각 인간은 ‘성령의 궁전’으로 존중하였고 고대 원문, 원서로의 복귀에 있어서 고전적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적 원천, 즉 신약성서 – 특히 희랍어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를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란 용어가 나왔다. 한편 루터가 성서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을 사도시대로의 복귀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는 종교개혁과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이기보는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한 遠因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들은 내적 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개혁을 주장하였지만, 혁명적인 인물들이 아니었으며, 후에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단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톨릭시즘을 떠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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