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 교회 상황

 

3. 교회 상황


3.1. 중세적 일치와 약화


중세의 그리스도교위 일치의 약화 를 초래한 역사적 사실들 중의 하나는 교황청의 Avignon 유폐이다. 이는 1305년 새로 선출된 프랑스인 Clemens 5세가 당시에 이태리의 불안한 政情으로 인하여 교황청을  Avignon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어 Gregory 11세가 1377년 성녀 Catharine of Siena 의 督責으로 로마로 환도 하기까지 70여년간 계속되었다.


6명의 Avignon의 교황들과 교황청 성직자의 대부분이 프랑스인이었고 그 사고방식도 프랑스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보편적 영신지도자들이기 보다는 프랑스의 국가주의로 여겨져 다른 지역, 특히 독일 지방에서 교황권의 세력의 상실과 그 종교적 보편주의의 소멸을 갖고 왔다. 아울러 이들은 세력 증강에 집착하여 세속적 권한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敎會稅制를 확장시켜 교회생활의 어느 부분에도 돈과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교회세금의 미납은 성사수여금령이나 교회의 공공전례참여금령등 영신적 처벌의 대상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황들의 지나친 중앙집권화와 교황청 재정정책에 대한 惡感은 전체에 번지게 되었다. 마침내 대사부의 판매는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는 마지막 불꽃이 되었다.


그리고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一致를 약화시킨 또 하나의 역사적 事件은 西歐의 大分裂 즉 교황청의 유폐(1378~1417)였다. Gregory11세의 서거(1378년) 이후, 16명의 추기경들 (11명 프랑스 추기경 포함)은 프랑스인 교황의 選出을 저지하려는 로마 시민의 우려와 군대의 위협하에 타협하여 半프랑스인 Urban 6세를 새 교황으로 뽑았다. 그는 원만한 性格을 갖추지 못하여 교황청 聖職者들 및 추기경들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갔다. 곧이어 프랑스와 스페인의 추기경들은 교황선거가 강압에 의한 것이기에 無效라고 선언하면서 또 하나의 교황 Clemens 6세를 선출하였다. 이에 두 교황을 가진 교회의 혼란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주교들과 추기경들은 Pisa에서 집회 열어 두 교황을 해직시키고 Alexander 5세를 선출 하나 이 교황은 곧 사망하였다. 다시 회의 에서 John 23세를 선출하나 물러났던 다른 두 교황들과 그 추종자들이 승복치 않았다. 따라서 교황은 다시 세 명이 되었다. 이러한 교회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Constance공의회(1414-1418)에서 세 명의 교황을 강제해임시키고 Maryin 5세를 교황으로 내세움으로 교황청의 대분규는 끝났다.


이 사건은 교회를 불확실성 시대로 이끌었다. 이제 대중은 진짜 교황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또한 이 분규는 교회 안에 불목과 마찰을 불러일으겼다. 각 교황의 支持者들은 사방에서 충돌하였다. 교황들은 각자 반대파들을 파문하여 모든 그리스도 교회는 파문상태 하에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공의회주의, 즉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학설을 발생케 하였다. 이 사상은 위에서 언급한 Constance 공의회에서 주창되어 Basle공의회(1431)에서 재확인되었다. 이 주장은 교황의 정치적, 영신적, 권세는 약화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더욱 쉽게 해주었다.




3.2. 교회개혁의 외침


12세기 말 이후로 교회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사도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교회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즉 제 4 차 Lateran공의회(1215)는 교회개혁에 대해 취급하였다.


특히 15세기 말에는 개혁의 외침과 교회 악폐에 대한 불만은 일반화되어 갔다. 당시의 탄핵의 대상은 고위성직자들과 교황청의 자본주의였다. 이 성직자들은 사치생활을 하면서 순박한 신도들을 착취하는 폭군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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