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그리스도교의 박해

 

초대 그리스도교의 박해


                                     




박해(迫害)의 원인




로마 제국은 법치국가였기에 정부당국이 반(反)그리스도교적 조처를 취하였을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박해한 법적 근거가 되는 자료를 제시하여주는 국가문서는 3세기 중엽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박해에 대한 사료(史料)또는 순교사 등 그리스도교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다. 놀랍게도 로마 저술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박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렇자면 로마 제국은 일반법이 아닌 특별법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였는가? 아니면 국가의 통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ꡐ부당한 종교ꡑ로 보았기 때문에 단속 권한을 행사하였는가?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대부분이 황제들이 대체로 법적 근거가 없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처벌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떼르뚤리아노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한 박해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부당한 조치였다고 비난한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뜨라야노 황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 이름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고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국가는 이 신도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일 그들이 범죄자라면 왜 기소당하지 않았는가? 또 그들이 범죄자가 아니라면 왜 선고를 받고 처벌되었는가? 이제 그 이유를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원인은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주장하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으로 인한 유일신교(唯一神敎)와 다신교(多神敎)의 충돌이다. 로마 제국은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들에 대해 묵인 또는 관용의 태도를 보였으니, 그 대신 국가의 이교적 경신예식에 참석하고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예수만이 하느님이며 그리스도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절대론은 국가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케 하였고,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 로마 인들에게는 무신론자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둘째 원인은 로마 국민이 그리스도와 그 신도들에 대해 갖고 있던 오해와 증오심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국법(國法)을 성실하게 준수하였고, 황제를 신(神)으로 승인하여 그에게 기도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어떠한 반(反)그리스도교적 조처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박해는 오직 간헐적으로 일어났고 그 기간이나 범위도 각 지방에 따라 달랐다. 특히 2세기의 박해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분화(噴火)와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자연의 재해, 패전(敗戰) 등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국가의 신들에게 제사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군중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미움을 폭발시켰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인들이 증오했는가? 이는 일반 대중이, 자기들과 다른 생활을 하면서 윤리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던 이들에게 갖는 본능적인 반감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대중에서 떨어져 생활한 것은 의혹을 사고 비방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로마 국민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 집회에서 범죄행위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즉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먹는 것을 희랍 신화에 나오´Â 인육제처럼 오해하여, 인간의 육신을 먹고 그들이 서로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을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세째 원인은 황제들의 그리스도교에 의한 국가 위기 의식이다.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은 범세계적이고 초(超)국가적인 향방의 그리스도교는 국가를 전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그리스도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특히 2~3세기의 유능한 황제들이 종교를 토대로 하여 국가를 내적으로 견고케 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그리스도교는 장애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박해의 과정




제 1 기 : 100년까지 로마 제국은 대체로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과 묵인의 자세를 보였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어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종교로서 대우를 받았다. 이 시기에 있었던 박해는 황제들의 폭군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며 법적 근거가 없었고 로마 시와 소 아시아 지역에 한하였다. 네로 황제(54-68)는 64년 로마 시의 화제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뒤집어씌워 박해하였다. 이때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였다. 도미씨아노 황제(81-96)는 귀족들과 지식인들에게 살인적 만행을 가하였다. 91년에 원로원 의원인 아칠리오 글라브리오는 무신론자로 처형되어 그의 토지의 일부는 후에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고, 96년에 황족(皇族)인 플라비오 클레멘스와 그 아내인 도미틸라가 희생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 사도가 파트모스로 유배간 것도 이 시기이다.


제 2 기 : 100년부터 250년 사이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로부터 구별되면서 그 자체가 종교로 인정을 받았으나 국가와 적대되는 부당한 종교로서 박해를 받았다. 황제 뜨라야노(98-117)와 하드리아노(117-138)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였으나 이들에 대한 익명(匿名)의 고발은 금하였고 배교하는 신도들은 처벌을 면하였다. 마르코 아우렐리오 황제(161-180)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며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였다. 유스띠노와 뽈리까르뽀가 이때 치명하였다. 또 리옹의 박해로 인하여 신도들의 일부는 순교하였고 일부는 영국으로 건너가 고대 영국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셉티모 세베로 황제(193-221)는 그리스도교를 묵인하였으나 202년에 갑자기 북 아프리카와 근동 지역의 신도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성녀 뻬르뻬뚜아와 펠리치따스가 이때에 순교하였다.


마지막으로 첨부하고자 하는 것은, 제2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반(反)그리스도교적인 책이나 팜플렛에 대해 교회를 변호하는 호교적 그리스도교 문학이 발생하였다(「경향잡지」 1980년 5월호 ꡐ호교교부ꡑ참조)는 사실이다.


제 3 기 : 250년부터 311년까지의 시기에 비로소 일반법에 의해 금교(禁敎)조치가 취하여졌다. 데치오 황제(249-251)는 250년에 유행병을 퇴치하기 위해 로마 신에게 제사를 바칠 것을 명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 참석자에게는 리벨루스(Libellus)란 증명서를 발부하였다. 여기서 참석을 거부한 신도들이 드러나 체포 처형되었다. 동시에 수많은 배교자가 속출하여 교회 내부에 경종을 울렸고, 더우기 이들이 교회에 복귀하고자 할 때에 이를 반대하는 엄격주의자들은 이단적 교회를 세움으로써 교회 분규를 일으켰다. 발레리아노 황제(253-260)는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이때 치쁘리아노 주교와 라우렌시오 부제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전보다 내적으로 더욱 견고해졌고 배교자도 적었다. 발레리아노 황제 이후 40년 동안 평화시대를 맞이한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마지막으로 가장 잔인한 대박해를 디오끌레시아노 황제(284-305)로부터 받았다. 그는 처음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묵인하는 자세로 관용을 베풀었으나, 303년부터 304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칙령을 반포하면서 전(全)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근절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교회를 파괴하고 성서를 불사르고 그리스도 신자인 공무원을 해직시켰다. 305년 이후서 로마 제국에서는 대체로 박해가 끝났으나 동 로마 제국에서는 311년까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311년에 갈레리오 황제(305-313)는 그의 박해가 효과 없음을 인정해야 했고, 죽음을 앞둔 병석에서 관용의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고 콘스탄틴 대제의 옹호 아래 국교(國敎)로서 급성장하게 된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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