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몽고 천주교

 

고려와 몽고 천주교


  1215년부터 몽고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여 중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요동지방의 거란족을 몰아내기 시작하자 1217년에 거란족은 한반도의 고려를 침입하여 강동성(평안남도)을 점령하였다. 1219년에 고려는 몽고군의 도움을 받아 강동성의 거란족을 소탕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몽고와 국교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몽고는 거란족을 소탕해 주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려에게 막대한 물자를 바칠 것을 요구하였으며 고려를 원 제국에 속한 나라로 여기고 무례한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고려는 민족적 주체 의식이 강한 무신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몽고의 지나친 요구에 불응, 30년 동안 몽고에게 투쟁하면서 저항하였다. 그러나 1258년에 무신정권이 몰락하자 고려의 몽고에 대한 저항 태도도 약화되어 1259년에 고려는 몽고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 고려의 세자가 몽고의 황실에 인질로 있는 동안 몽고 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고려는 원 제국의 부마국이 되었다. 이러한 정책 결혼은 두 국가의 귀족, 학자, 기술자, 상인들을 서로 왕래하거나 상대국에 거주하게 하였다. 공민왕 시대에 원의 카라코룸에는 2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고, 요동지방에는 몽고의 무거운 공물 부담에 못 이겨 이민 온 유민들이 많았다. 한편 고려의 세자와 결혼한 몽고 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온 많은 몽고인들이 궁정에서 세력을 잡고 갖가지 몽고 풍습을 유행시켰다. 이러한 양국 국민의 상호 방문과 이주는 문화 교류의 기원이 되었다.


  유목사회의 몽고문화 자체는 보잘것없었지만, 몽고인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의 건설로 여러 민족의 문화를 접촉, 세계 문화를 흡수하였다. 따라서 몽고와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고려는 자연스럽게 그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충렬왕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다이두에 ‘만경당’이라는 문화 교류 센터를 세워 많은 서적들을 구입하고 원의 학자들과 고려의 학자들을 초대하여 학문과 예술을 교류하게 하였다.


  이러한 국민의 상호 왕래와 문화적 교류를 통해서 우리는 원 제국에서 성행하였던 천주교가 간접적으로 개인적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고려의 천주교 접촉을 증명하는 역사적 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빌럼 반뤼스브룩이 몽고군이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에 압록강까지 왔다가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에서 ‘카울레’라는 표현으로 고려를 서양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사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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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몽고 천주교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고려와 몽고 천주교

      1215년부터 몽고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여 중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요동지방의 거란족을 몰아내기 시작하자 1217년에 거란족은 한반도의 고려를 침입하여 강동성(평안남도)을 점령하였다. 1219년에 고려는 몽고군의 도움을 받아 강동성의 거란족을 소탕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몽고와 국교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몽고는 거란족을 소탕해 주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려에게 막대한 물자를 바칠 것을 요구하였으며 고려를 원 제국에 속한 나라로 여기고 무례한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고려는 민족적 주체 의식이 강한 무신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몽고의 지나친 요구에 불응, 30년 동안 몽고에게 투쟁하면서 저항하였다. 그러나 1258년에 무신정권이 몰락하자 고려의 몽고에 대한 저항 태도도 약화되어 1259년에 고려는 몽고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 고려의 세자가 몽고의 황실에 인질로 있는 동안 몽고 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고려는 원 제국의 부마국이 되었다. 이러한 정책 결혼은 두 국가의 귀족, 학자, 기술자, 상인들을 서로 왕래하거나 상대국에 거주하게 하였다. 공민왕 시대에 원의 카라코룸에는 2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고, 요동지방에는 몽고의 무거운 공물 부담에 못 이겨 이민 온 유민들이 많았다. 한편 고려의 세자와 결혼한 몽고 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온 많은 몽고인들이 궁정에서 세력을 잡고 갖가지 몽고 풍습을 유행시켰다. 이러한 양국 국민의 상호 방문과 이주는 문화 교류의 기원이 되었다.

      유목사회의 몽고문화 자체는 보잘것없었지만, 몽고인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의 건설로 여러 민족의 문화를 접촉, 세계 문화를 흡수하였다. 따라서 몽고와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고려는 자연스럽게 그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충렬왕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다이두에 ‘만경당’이라는 문화 교류 센터를 세워 많은 서적들을 구입하고 원의 학자들과 고려의 학자들을 초대하여 학문과 예술을 교류하게 하였다.

      이러한 국민의 상호 왕래와 문화적 교류를 통해서 우리는 원 제국에서 성행하였던 천주교가 간접적으로 개인적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고려의 천주교 접촉을 증명하는 역사적 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빌럼 반뤼스브룩이 몽고군이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에 압록강까지 왔다가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에서 ‘카울레’라는 표현으로 고려를 서양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사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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